최종 : 20/10/23 21:17



[今天歷史-7월 6일]인민해방군 창설자 朱德 사망

1976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시자이며 전인대(全人大) 상무위원장인 주더(朱德)가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6개월 전인 이해 1월 6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사망에 이은 주더의 죽음은 중국 공산당 제 1세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결국 주더의 사망한 지 2개월 3일 뒤인 9월 9일 1세대의 핵심 마오쩌둥(毛澤東)마저 동지 곁으로 떠남으로써 1세대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자 “모두가 한 솥밥을 먹던 사이가 아닌가”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의 반골정신을 드러내 주는 한 사례로 마오와 주더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950년대 장정(長征) 간부들의 공적을 다룬 연극 ‘만수천산(萬水千山)’이 마오와 주더가 포함된 당 간부들 앞에서 공연되었다.

연극이 병사들이 “마오(毛)위원 만세”를 제창하는 것으로 끝을 맺자 덩샤오핑은 큰소리로 “한 가지가 빠졌지 않은가. ‘마오 위원 만세’ 뒤에 ‘주(朱) 총사령 만세’도 들어가야 한다. 그 것이 역사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한메 디지털 세계대백과 사전에 실린 그의 약전이다.

『중국 군인·정치가. 쓰촨(四川)성 이룽 출생. 1909년 윈난(雲南) 강무학당(講武學堂)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했고 신해혁명(辛亥革命) 때에는 차이어 (蔡鍔)군의 보병 중대장으로 참가했다.

차이어가 죽은 뒤에는 군벌간의 전쟁에 휩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22년 상하이(上海)에서 쑨원(孫文)을 만나게 되어 그때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독일에 건너갔다.

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만났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괴팅겐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고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추방당했다.

소련을 경유하여 1926년 귀국, 북벌에 참가했다. 1927년 우한(武漢)정부의 난창(南昌) 군관학교 교장 겸 공안국장에 취임했다.

우한 정부가 분열된 뒤인 그해 7월 저우언라이·허룽(賀龍) 등과 함께 난창봉기를 꾀했으나 실패하자 장시(江西)·푸젠(福建)·광둥(廣東) 등으로 옮겨가면서 전투를 했다.

1928년 5월 루이진(瑞金)의 중화(中華)소비에트 임시정부에 들어가 마오쩌둥을 만났으며 홍군 제4군을 조직, 총사령(總司令)이 되었다가 1930년 홍군총사령이 되었다. 1931년 중화소비에트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마오쩌둥과 함께 리리산(李立三)의 좌경노선에 반대하여 창사(長沙)와 우한에 대한 진공작전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또 장제스(蔣介石)의 토벌군을 여러 차례 게릴라전으로 격파했다.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했고 1935년 1월 준이(遵義)회의에서 왕밍(王明)의 좌경노선을 비판하고 마오쩌둥이 당의 주도권을 잡는 것에 찬성했다. 도중에 북상항일(北上抗日)에 반대한 장궈다오(張國燾)와 함께 한때 남하했지만 뒤에 합류했다.

항일전쟁 중에는 팔로군의 총사령으로 화베이(華北)에서 전투를 했고, 항일근거지를 건설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한편 국민당에 의한 산간닝(陝甘寧: 陝西·甘肅·寧夏) 변두리 지역의 봉쇄에 대해서는 생산운동으로 극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이 되었고 랴오천(遼沈)·화이하이(淮海)·핑진(平津) 등의 3대 전투에서 국부군(國府軍: 국민당군)을 괴멸시켜 공산당이 승리하는 전기를 이루었다.

1949년 중국 수립 후에는 국가부주석·국방위원회 부주임·당부주석·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위원장이 되어 군사면의 최고 지도자이자 당·정부의 장로(長老)로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마오쩌둥을 도와 신중국 건설에 공헌했다.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아 한때 격하되었지만 린뱌오(林彪) 실각 후 1973년의 10대(十大)와 1975년의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복권되었다. 강석승』

2003/07/0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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