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핵위기] 신조선책략(新朝鮮策略)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의 김홍집(金弘集)은 귀국에 앞서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기증받는다. 32살의 황준헌과 38살의 김홍집은 그동안 국제정세에 관해 많은 의견을 교환하던 처지였다.
황준헌이 건넨 책은 그가 저술한 것으로 제목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었다. 요즘 말로 풀이하면 ‘조선이 (앞으로) 취해야 할 외교 전략에 대한 개인적 의견’이 되겠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 일본, 청나라가 펼쳐야 할 외교를 포괄적으로 언급한 다음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정책으로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連美)’를 제시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은 마땅히 종주국인 청국과 친교하고 아울러 이웃나라인 일본과도 선린관계를 맺어, 삼국이 협력하여 영토보전을 도모해야 한다. 아메리카 합중국은 약소한 것을 돕고 공의를 유지하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 조선은 합중국과도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주장이다.
중화적 질서관에서 탈피한 황준헌의 조선책략
황준헌의 이 조선책략은 중화적 질서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동북아의 역학질서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훗날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과 함께 입헌군주제 수립을 위한 변법자강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될 이 젊은 중국 외교관-당시 직책은 주일공사관 참사관이었다-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우월적 위치를 고집하지 않고 있다.
1877년부터 일본에서 근무하며 국제정세를 관찰해 온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위협받는 중화적 질서를 고수하는 것 보다는 새로운 질서 형성을 주도하는 쪽이 중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고 보았다.
동북아의 전환기적 상황 하에서 황준헌이 중국의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했던 대상은 러시아였다. 그 대책으로 그는 해양국가인 일본과 미국을 새로운 동북아 질서 형성을 위한 게임 참가국으로 참여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이 러시아의 영향 하에 들어가는 것을 청국 단독으로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조선을 연결고리로 한 청-일-미의 연대를 구상한 것이다.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게임 참가국으로 언급한 국가들-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은 이후 한반도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3개국은 주변국이었지만 영국이 아닌 미국을 게임 참가국으로 끌어들인 것은 황준헌의 혜안이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영국은 부동항을 향한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막기 위해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러시아와 충돌했다. 영국은 한반도에서도 거문도 점령(1885년)과 같은 러시아 견제를 위한 실력행사를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황준헌은 영국이 아닌 미국을 끌어들일 것을 조선에 권유했다.
영국,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제국주의 경향이 덜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황준헌은 미국을 끌어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1982년 조미수호조약 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하여 조선에 건네, 조약체결에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이 조약은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 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
황준헌의 이 조선책략은 김홍집에 의해 고종에게 바쳐지고 전국 유생들에게 배포되었다. ‘영남만인소’등 위정척사론에 기름을 끼얹는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으나 보수적 유생들에게 맹목적 양이(洋夷)배척 정신을 버리고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조선 조정이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 적극적이었던 데는 이 책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황준헌의 조선책략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조의 실권자인 이홍장-원세개(李鴻章-袁世凱) 라인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의해 패퇴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종주권 수호라는 반동적 정책을 구사했다.
조선 정부 역시 조선책략의 노선을 견지하지 않았다. 일본이라는 주적을 막기 위해 대립되는 세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일변도(一邊倒)외교’를 펼쳤다. 청국, 러시아에 전적으로 기대었다가 마지막에는 미국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보듯 러일전쟁 후 조선은 미국의 ‘버리는 카드’가 되었다.
결국 황준헌의 한반도 게임 참가국 중 일본만이 남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조선 병탄으로 이어졌다.
중국이 이달 말에 개최되는 6자회담 성사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현 지도부의 이런 태도에서 ‘황준헌’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은 북한(중국에서는 조선으로 불리워 지고 있다)에 대한 우월적 지위에 대한 손상을 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미-북-중의 3자 회담을 6자회담으로 확대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한반도의 한 당사자인 한국만을 추가로 참여시키는 '2+2 방식'을 선택을 할 수 있었으나 주변국인 러시아와 일본이 참여하는 '2+4' 방식을 성사시키는 쪽으로 돌아섰다. 미국과 북한의 주장을 단순히 절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2+4 방식'의 성사에는 중국의 계산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로써 황준헌의 조선 책략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주변 3국과 미국이 탈냉전 이후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형성하는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1+3’의 형태로 한반도 중요 현안에 모두 함께 참여하는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된 이래 처음이다.
물론 '1+3'의 틀 안에서도 영향력의 우열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 곳이 다른 한 곳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배제된 상태로 한반도 문제의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6자 회담의 역사적 의미는 자못 크다.
황준헌이 과거의 중화적 질서관에서 탈피한 것처럼 중국의 현 지도부 역시 북한에 대한 우월적 영향력을 지키려 하기 보다는 주변국을 모두 참여시키는 가운데 중국의 이익을 도모하자는 계산을 한 것이다.
과거에는 러시아 견제 이번에는 미국 견제
다른 것이 있다면 황준헌의 경우에는 러시아가 견제 대상이었던 데 반해 이번에는 중국의 가상 주적은 미국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장기적으로 북한에까지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추구하는 것은 일단 북한의 생존이다. 자국의 경제개발에 전력을 쏟아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은 러시아의 대미 견제역량과 일본의 경제력을 끌어들여 자국의 안보적, 경제적 부담을 줄이려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들 두 국가를 일찌감치 참여시켜야 북한 정권이 설사 붕괴가 되는 경우에도 한반도가 미국의 독점적 영향 하에 들어가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고 중국은 판단했을 것이다 .
또 하나 다른 점은 황준헌 조선책략은 청국 지도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데 반해 이 ‘새로운 조선책략’은 최고 중국 지도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체제의 최고위급 외교관들은 6자 회담 성사를 위해 1970년대 키신저의 중동(中東) 셔틀외교를 연상시키는 적극적인 외교할동을 펼쳤다. 미국은 물론 러시아와 일본을 넘나들며 의견조율을 했으며 결국 북한을 설득시켰다.
한 중국관측통은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항미(抗美)’냐 ‘방핵(防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관측통은 후진타오의 전임 장쩌민이 ‘항미’, 즉 미국을 견제하는 쪽에 비중을 두었다고 한다면 후진타오는 ‘방핵’ 즉 북한의 핵 보유를 막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북핵문제에 대한 접근 자세도 따라서 판이하다. 장쩌민의 외교팀이 팔짱을 끼다가 막바지 순간에 개입했다면 후진타오 팀은 처음부터 소매를 겉어붙인 격이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후진타오의 친서를 들고 북한을 방문한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부부장은 중국 외교가 전통적으로 구사해 온 은유적인 수사없이 북한 핵문제에 관한 중국측 입장을 직설적으로 개진했다.
4 시간 동안 진행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다이빙궈는 사태가 악화되어 전쟁이 벌어질 경우 북한은 군사적으로 패퇴하고 정권은 붕괴할 것으로 본다는 중국측의 판단을 가감없이 밝혔다고 한다.
‘핵 협박’을 통해 미국과의 빅딜을 성사시키려는 북한의 기존 전략의 대안으로 중국이 제시한 것은 핵포기에 따른 안보적 불안을 다른 주변국을 끌어들여 미국을 견제함으로써 해소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황준헌의 용어를 빌려본다면 ‘친중(親中)-결일(結日)-연로(連露)’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신조선책략’으로 명명해볼 만한 외교전략을 중국은 조선, 즉 북한에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나워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