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10/23 21:17



[今天歷史-1월 8일] 周恩來 사망 덩샤오핑 옌푸

1976년 1월 8일 중국인들 사이에서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했다. 1898년 생으로 향년 78세였다.

저우는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으며 저장(浙江) 샤오싱(紹興)이 원적이다. 1913년 톈진(天津) 난카이(南開) 중학에서 공부한 뒤 1917년 일본에 유학했다.

1919년 귀국하여 텐진에서 ‘5 · 4운동’에 참가했고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했다.

1920~1924년 프랑스와 독일에 근공검학(勤工儉學)으로 유학했다.

유럽 유학 중에 학생들과 근로자들에게 마르크스 주의를 선전했고 유럽 중국 소년공산당(후에 유럽사회주의 청년단으로 개칭)을 창설했다. 192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총지부 서기에 임명됐다.

1924년 8월 귀국 후 황포(黃)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 국민혁명군제1군 정치부 주임, 중국 공산당 양광구(兩廣區)위 위원장, 상무위원 겸 군사부 부장 등을 역임하며 국공합작 기간 중 당이 직접 관할하는 무장역량인 예팅(葉挺) 독립부대를 창설했다.

1926년 상하이(上海)로 가 중공중앙의 군사위 서기 겸 중국 공산당 저장(浙江)구 군위 서기에 임명됐다. 1927년 상하이에서 3차 무장봉기를 일으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상하이의 입성한 장제스의 반공 쿠데타로 상하이의 공산당 조직은 궤멸되고 그는 피신해야 했다.

8월에 난창(南昌) 폭동을 지휘하여 홍군 성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해 8 · 7 회의에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됐다.

1928년 중국 공산당 6대에서 군사문제와 조직문제에 관해 보고하였다.

이후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하며 중앙 조직부장, 중국 군사위 서기에 임명되었다. 1931년 12월 중앙 혁명근거지에 들어와 중공 소비에트 지구의 중앙국 서기, 중국 공농홍군 총정치위원 겸 제1방면군 정치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활약하며 국민당의 제4차 포위공격을 격퇴했다.

1935년 1월 준이(遵義)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영도적 지위를 확립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준이 회의 이후에 중앙혁명 군사위원회 부주석(주석은 마오쩌둥)으로 있으면서 3인 군사지휘 소조의 구성원이 되었다.

1936년 12월 시안(西安)사건을 해결하여 2차 국공합작을 설립시켰다. 이후 항일전쟁 기간 중공중앙 대표와 남방국 서기 겸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으로 있으며 우한(武漢)과 충칭(重慶) 등 국민정부의 수도에 머물렀다.

1945년 10월 10일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쌍십협정’을 체결하였다. 1946년 11월 옌안(延安)으로 복귀했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임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저우언라이 외교의 클라이맥스였으나 그 때에 바로 암에 걸렸다.

저우언라이는 이후 사망할 때까지 문혁 4인방 세력을 견제하S는 한편 문혁으로 파괴된 정부와 당 조직을 보호하여 마오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그 밖에 ...

1975년 = 덩샤오핑(鄧小平)이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10기 2중전회에서 중공 중앙 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이에 앞서 1월 5일 중공 중앙위원회는 1호 문건을 통해 덩샤오핑을 중공중앙 군사위 부주석 겸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국무원 제1부총리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사망을 꼭 1년 앞둔 저우언라이가 10기 2중전회를 주재하며 제4기 인민대표대회를 준비했다.

1954년= 청말의 계몽사상가이며 베이징(北京)대학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옌푸(嚴復)가 태어났다.

푸젠(福建) 성 허우관(侯官 : 현재 푸저우 福州)에서 태어난 그는 계몽사상가로 출발하였으나 1921년 사망할 때는 대표적인 반동 사상가였다.

유학을 하는 한의사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초명이 전초(傳初)였다가 종광(宗光)으로 개명했으며 자도 우릉(又陵)과 궤도(几道) 두 개가 있다.

1876년 영국 그리니치 해군대학에 유학했으나 군사학보다는 서구 사상과 제도에 관심이 많았다. 귀국 후 톈진 북양수사(北洋水師)에서 총교습과 총판으로 20년간 근무했다.

청일전쟁 이후 현실에 대한 비판과 변혁을 요구하는 ‘원강(原强)’, ‘벽한(辟韓)’등 4편의 정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서구 중요 사상서적을 다수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1898년 T. H.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번역한 ‘천연론(天演論)’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청나라 말기 변혁지향자들에게 약자로서의 현실인식과 탈출의 길을 모색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밖에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J.S. 밀의 '자유론'을 번역했다.

그러나 그는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여 혁명보다는 개량을 추구하였다. 무술(戊戌)정변 실패 이후 보수화하였으며 신해혁명 이후에는 심지어 복벽(復辟)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어 원세개(袁世凱)의 제정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공자를 존중하자고 주창하여 신문화운동과 5 · 4 운동에도 반대하는 등 말년에는 변법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시대의 흐름에 낙오된 행적을 보였다.

2004/01/0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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