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7/09 22:42



[今天歷史-3월 10일] 鄧小平 2차복권

1973년 3월 10일 중공중앙(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은 ‘덩샤오핑(鄧小平) 동지의 당 조직생활과 국무원 부총리 직무회복에 관한 결정’을 통해 문화대혁명 초기, 류샤오치(劉少奇)에 이어 ‘제 2호 주자파’로 공격받고 축출됐던 덩샤오핑을 복권시키고 직책도 회복해 주었다.

중공 중앙의 이 같은 결정은 마오쩌둥(毛澤東)이 1972년 8월 24일 덩샤오핑이 보낸 편지를 승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장시(江西)성 트랙터 수리공장에 배치되어 있던 덩샤오핑은 1972년 8월 1일 직공들과 함께 린뱌오(林彪)반당집단 음모반란죄에 관한 보고를 들은 뒤 숙소에 돌아와서 곧바로 마오쩌둥에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고 이를 8월 3일 장시성 혁명위원회를 경유하여 마오에게 보냈다.

린뱌오가 거세된 이후 군부통제에 고심하고 있던 마오에게 덩은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덩은 국공내전 당시 제2야전사의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덩은 평소 린뱌오가 랴오선(遼瀋)전투의 영웅이라면 자신은 화이하이(淮海)전투 승리의 주역이라며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하곤 했다. 랴오선 전투, 화이하이 전투는 핑진(平津)전투와 더불어 국공내전의 승부를 가르는 3대 전투로 꼽히고 있다.

덩은 이 서한에서 바짝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몇 대목을 보자

“제가 과오를 범한 후 완전히 업무에서 이탈되었고 사회와의 접촉으로부터 유리된 지 이미 5년이 넘었으며 곧 6년이 됩니다. 저는 항상 업무를 하면서 저 자신의 과오를 교정하고 주석의 무산계급혁명노선으로 되돌아 갈 기회가 한 번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제 생각에는 저의 건강이 아직 좋아서 비록 이미 68세가 되었으나 조사연구 업무 같은 기술적인 일은 할 수 있으며, 또 당과 인민을 위하여 7년 내지 8년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과오를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밖의 다른 특별한 요구는 없습니다. 저는 주석과 중앙의 지시를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덩샤오핑은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973년 4월 12일 인민대회당의 캄보디아 국가원수 노르돔 시아누크(Nordom Sihanouk) 공의 환영식 만찬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사진) 그의 복권을 세계에 알렸다. 그에게 ‘부도옹(不倒翁)’, 즉 오뚝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1970년 3월 외유 중 론 놀 총리 등 우파세력의 쿠데타로 실각했던 시아누크 공은 같은 해 5월 베이징에서 좌파 크메르 루즈를 포함한 캄보디아 왕국 민족연합정부를 수립했으며 당시 환영연은 캄푸차(Kampuchea)해방구를 둘러보고 다시 베이징에 온 그를 환영하기 위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주최한 것이었다.

당시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내민 시아누크 공과 역시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는 덩샤오핑의 대면 사진이 세계인들에게 ‘2호 주자파’의 정계복귀를 극적으로 알렸다.

2004/03/1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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