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7/21 11:44



추억...1997년 홍콩과 덩샤오핑, 그리고 패튼

" 이덕보원(以德報怨) : 장졔스(蔣介石)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처리문제와 관련하여 내놓은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은혜로써 원한을 갚자'라는 이 '도덕적' 슬로건은 어찌 보면 중국적인 실리외교의 전형이다.

이 슬로건은 일본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해 중국에게 여전히 '두려운' 존재인 일본군대를 하루라도 더 빨리 철수시키는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식량지원과 함정까지 동원, 일본군의 철수를 도왔다.

이 사실에서도 이 슬로건을 통해 지향한 실리를 살필 수 있다. '이덕보원' 슬로건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그 것을 오히려 '덕'으로 포장하는 중국적 실리외교의 정화이다.

일국양제(一國兩制) : 덩샤오핑(鄧小平)이 영국으로 하여금 홍콩을 내놓게 한 그 슬로건에서도 이덕보원과 같은 맥락을 느낄 수 있다. 중국에게 홍콩할양은 치욕이상의 것이다.

영국제국주의는 자유무역원칙 구현이라는 미명아래 중국인들에게 마약의 자유로운 유통을 강요했고 '힘없는' 중국은 그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홍콩은 바로 그 수모의 상징이었다.

십자군원정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킨 것과 같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징인 홍콩접수가 중국인들의 속내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일국양제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영국이 더 이상의 피해를 주지 않고 후퇴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한 인내는 '살라딘의 영광'을 지향하며 포클랜드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접수하려다 '혹만 더 붙인' 아르헨티나와 이라크와는 달리 중국에 엄청난 실리를 안겨주었다.

7월의 인물로 기리는 고려조의 서희(徐熙)장군 : 그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의 수십만 대군을 철군시켰다.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자신의 힘에 대한 냉철한 계량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기말의 국제정세가 한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를 잉태하는 격동기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의 계절에 비전의 빈곤은 눈을 밖으로, 또 과거로 돌리게 만든다."
(1997년 7월 18일자 한국일보 칼럼 '앞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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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1일 홍콩의 반환, 홍콩의 중국귀속을 멀리서 바라다보았다.

그 때는 필자가 국제부에서 다른 부로 옮긴 탓에 홍콩반환이라는 이 역사적 이벤트를 전하는 작업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천안문(天安門)사태'와 '한중수교'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등 중국관련 굵직굵직한 뉴스를 처리해온 필자입장에서 홍콩귀속이라는 이 세기적 뉴스 이벤트를 처리하는 작업에서 '소외'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필자가 1992년 4월부터 1993년 2월까지 10개월 동안 특파원으로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홍콩의 중국귀속은 지난 10년간 취급했던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더 큰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는 뉴스였기 때문이다.

중국을 10년 가까이 관찰하고 또 수많은 기사를 써온 입장에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아무런 기여 없이 지나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칼럼을 써야할 순번이 되었을 때 '이덕보원, 일국양제(以德報怨, 一國兩制)'라는 제목으로 필자의 소회를 짤막하게 담았던 것이다.

홍콩 중국 귀속문제는 워낙 광범위한 사항을 포괄하는 문제였다. 주권 반환의 원칙은 이미 1984년 9월에 합의되었지만 이에 따른 세부적 문제는 반환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까지도 중국과 영국 사이에 끊임없이 논의되었다.

홍콩특파원 시절 신문에서 반환과 관련한 기사가 하루라도 빠지는 법이 없었으며 베이징 특파원 시절 외교부 브리핑 장에서도 홍콩기자들이 반환과 관련한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문제들이라는 것이 당사자들에게는 절실한 사안임이 분명한 것이지만 제 3자에게는 하품마저 나오게 하는 미시적이고 전문적인 인 것이 많았다.

홍콩 반환의 역사적 맥락을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숲'속에 묻혀 있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홍콩의 중국 귀속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제국주의의 종말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것이 그처럼 축제로 끝난 것은 역사의 경이(驚異)이다. 2차대전 이후 각지에서의 서구제국주의의 종말은 항상 유혈과 혼란이 동반됐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프랑스 제국주의는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의 참패로 끝났다. 인도에서의 영국제국주의의 종말은 인도대륙에 분열과 유혈의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홍콩에 있어서 떠나는 자는 영광스러운 철수였고 오는 자는 혼란이 없는 접수였다. 그리고 홍콩인들을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그러나 큰 두려움 없이 옛 주인을 보내고 새 주인을 맞았다. 이러한 '역사의 경이'를 연출한 중국과 영국 두 당사자 모두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영국이 비록 강압적인 것이기는 하나 영구 할양받은 홍콩 섬과 주룽(九龍)지구를 99년의 조차기간이 만료하는 '신계(新界)'지구와 함께 중국에 넘기기로 한 결단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면적으로 따져 홍콩의 90%를 차지하는 신계를 중국에 넘겨주고 홍콩 섬과 주룽반도의 일부만을 경제단위로 존속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평가절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의 제국주의의 끝맺음이 피와 증오 그리고 혼란을 동반했던 것은 바로 그 불가피한 선택을 회피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국도 동양의 군사적 상업적 거점인 홍콩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했다. 홍콩의 신계지구의 조차기간이 만료되기 18년 전인 1979년 '홍콩반환'문제를 먼저 제기한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주권(主權)과 치권(治權)'의 분리를 통해 이 문제를 접근해나갔다.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넘겨주되 영국이 홍콩에 대한 통치권을 계속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철두철미하게 자본주의적인 홍콩을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접수하게 되면 홍콩이 제 기능을 상실할 것이며 그 것은 홍콩을 대(對)서방 창구로 활용하고 있는 중국에게도 도움이 되지못할 것이라는 논리아래 '명분과 실리'를 교환하자고 중국을 설득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중국인들에게 홍콩이 갖는 상징성을 간과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82년 9월 24일 홍콩문제 담판을 위해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에게 "1997년 홍콩의 주권을 회복 못한다면 그 어떤 중국지도자도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에 대해 낯을 들 수 없을 것"이며 "(홍콩주권 회복을 못한)중국 정부는 만청(晩淸: 청나라 말기)정부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지도자는 리훙장(李鴻章)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홍콩을 반환받지 못하면 그 어떤 중국정부도 인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으며 정권을 내놓는(下野) 것은 물론 정치무대로부터 스스로 물러나(自動退出)하기 때문에 다른 선택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홍콩문제는 어떠한 실리를 제공하더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중국의 자존심'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1984년9월 양국이 '홍콩반환 공동성명'에 합의하기까지 22차례의 협상을 거치는 동안 중국의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었다.

(중국당국이 1982년 9월 24일에 있은 덩샤오핑의 이 발언을 전문 공개한 것은 만 11년 뒤인 1993년 9월24일이었다. 서방의 인권잣대라는 벽 때문에 거국적으로 추진하였던 2000년 올림픽 유치가 실패한 바로 당일, 이 애국심과 자존심이 넘쳐흐르는 덩샤오핑의 발언록을 공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주권회복이라는 원칙에는 촌보의 양보가 없었지만 영국이 영광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 주었다. 그 것은 바로'일국양제(一國兩制)'였다.

덩샤오핑의 '일국양제'는 홍콩문제 해결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홍콩보다는 오히려 대만과의 통일을 염두에 둔 장기적 구상이었다. 이는 중국이 무력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놓은 평화 통일방안이었고 홍콩에서 구체적 적용실험을 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영국과의 협상과정에서 '항인치항(港人治港: 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 '고도자치(高度自治)', '50년 불변'을 약속했다. 이러한 중국의 유연한 자세가 영국으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철수'라는 '차선의 선택'을 받아들이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TV를 통해 행사를 지켜보면서 필자가 주의 깊게 살폈던 것은 홍콩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의 딸의 표정이었다. 홍콩에서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영국 왕실 전용 요트 '브리타니아'호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부두에서 환송하는 홍콩인들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5년 전 홍콩에 도착했을 초기 홍콩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다소 거만한 자세를 보였던 그 식민지 총독의 딸은 진정으로 홍콩과의 작별을 슬퍼하는 듯 보였다. 그 표정은 그날 낮 총독관저에서 유니언잭을 내리면서 아버지인 패튼이 지어 보였던 표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영국 왕실을 대표하여 반환 행사에 참석한 찰스 왕세자와 패튼의 우울한 표정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마침표를 찍는 데서 비롯된 '정치적'인 것이었다면 패튼 총독의 딸이 보여준 그 슬픈 표정은 정들었던 대상과의 작별에서 비롯된 인간적이며 순수한 것처럼 보였다.

5년 전 식민지 홍콩과 홍콩인들에 대해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인상을 물씬 풍겼던 '총독의 딸'의 변모는 보기 좋았다.

멀어져 가는 홍콩의 모습을 보며 패튼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홍콩은 가장 아름답게 치장한 채 어제까지의 주인을 배웅하고 있었을 것이다.

축하행사로 불야성을 이룬 홍콩의 모습은 '동양의 진주'라는 별칭을 오히려 소박한 표현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 것이 더 이상 '영국의 소유'가 아니라는 현실을 절감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에 사로 잡혔을까.

트로이 성 앞에 목마를 세워놓고 떠나는 오디세이를 생각했을까. 아니면 로마를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야 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의 심정이었을까.

부임 초기 홍콩인들 사이에서 패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정치가인 그는 확실히 외무부 고위관리 출신인 기존의 전임 총독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젊은데다 적시에 적절한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는 그는 '식민지 총독'이 아니라 '민선 총리' 혹은 '민선 대통령'과 같은 인상을 홍콩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적극적 자세는 홍콩의 중국귀속을 앞두고 불안감에 싸여있던 홍콩인들에게 '희망봉'의 기능을 했다.

확실히 그는 마지막 총독이었지만 무엇인가를 마무리하려한다는 인상보다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결국 중국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직선제 입법국(의회에 해당)을 성립시켰다.

말하자면 '마지막 식민 총독'으로서 '민주 홍콩'의 첫 지도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배웅하는 홍콩인들의 표정에서 '민주'를 선물한 총독에 대한 '아쉬운 표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홍콩인들은 '마지막 식민 총독'으로 그를 배웅하는 듯 보였다.

패튼이 1995년에 세운 '트로이 목마'(민선 입법국)는 그가 홍콩을 떠난 뒤 몇 시간도 못되어 해체 되었다. 선거절차를 거쳤지만 사실상 중국이 낙점한 홍콩(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의 새 지도자 둥졘화(董建華)는 주권 이양을 공식선포한 직후인 7월 1일 새벽 2시 45분 입법국을 대체한 임시입법국의 첫 회기를 열고 10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이 남겨둔 '트로이 목마'에 대한 '확인 사살'이었다. 마틴 리로 불리는 홍콩민주당의 지도자 리주밍(李柱銘)은 임기 2년을 남겨 둔 '민선 입법국'이 해체되는 그 순간 지지자들과 함께 홍콩의 '민주 회복 장정(長征)' 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마지막 선물처럼 '주어 졌던' '민주와 자유'를 홍콩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해내겠다는 마틴 리의 표정은 축제분위기 속의 여타의 홍콩인들과는 달리 비장한 모습이었다. 다만 외국 언론, 주로 서방언론을 상대로 한 인터뷰여서인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자신의 결의를 밝히는 것이 '옥의 티'처럼 보였다.

마틴 리는 '홍콩의 양심' '민주투사'라는 평가와 아울러 식민주의자들의 숨은 의도를 파악 못하는 비애국자라는 비난도 함께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행사 모습은 화려하고 또 화기애애하였지만 주권을 넘기고 받는 절차는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주권을 인수인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1일 새벽 6시 경무장한 중국인민해방군 4,000여명의 병력이 21대의 장갑차를 비롯한 차량 400대에 분승, 홍콩으로 진주, 영국군 관할 하에 놓여있던 14개 기지를 접수했다.

지상군 외에도 함정 10척과 헬기 6대가 동원된 육해공의 입체 진주였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또 경무장을 한 군대의 진주 모습을 홍콩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중국 당국은 주권이 이제 중국에 넘어왔음을 과시한 것이다.

이는 영국이 주권을 보유하고 있을 때 선발대를 진입시키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특히 6월 30일 오후 9시 선발대 509명은 사관생도와 같은 산뜻한 복장에 최신형 흰색버스에 분승하여 홍콩에 진입, 연도의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기까지 했다.

주권회복 몇 시간 전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손님'의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면 주권회복 후 인민해방군은 '주인' 티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홍콩의 영국군 본영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 기지'에 끝까지 남아있던 영국군 1,000여명은 7월 1일 0시를 기해 중국군에 기지를 이양한 뒤 헬기편으로 홍콩을 떠났다. 7월 1일 새벽 3시 경에 홍콩을 통치한 영국 지도부도 그리고 그 지배의 물리적 기반 군대도 홍콩 땅에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질서 있고 또 사전에 잘 짜여진 스케줄에 따라 이루어지는 철수였지만 그 것은 '혼란과 공포속의' 미국의 사이공 철수와 본질상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미군의 베트남 철수가 강요된 것이고 그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것인 반면 영국의 홍콩철수는 합의에 의한 것이라 차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만이 차이일 뿐이다.

홍콩반환을 지켜보면서 어김없이 떠올려진 인물이 덩샤오핑이였다. 그러나 홍콩반환을 중계하는 뉴스 프로그램과 신문 보도는 이 행사 4개월 10여일 전에 사망한 '홍콩주권회복의 총 설계사' 덩샤오핑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듯했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중국 땅이 된 홍콩 땅을 밟고 싶다'라고 말했었다. 덩샤오핑은 끝내 그 염원을 실현할 수 없었다. 프랑스 유학을 위해 '출향관(出鄕關)'한 이후 단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않았던 이 냉정한 지도자가 '죽음'의 순간을 늦추어서 가면서까지 밟아 보려 했던 곳이 바로 홍콩 땅이었다.

아마 그가 역사 속에 단 한 줄로 그의 업적을 기록하라면 그는 '홍콩의 주권을 회복했다'라는 글귀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의 홍콩 주권 회복에 대한 덩의 염원은 그처럼 강렬했다. 기록은 그가 공산주의 혁명 활동을 하던 시기 5차례 홍콩 땅을 밟았다고 전하고 있다.

6월 30일 하오 5시 그의 부인 줘린(卓琳)과 덩난(鄧楠)이 항공기 편으로 조용하게 '아직은 영국 주권 하의' 홍콩에 내렸다. 남편과 부친의 유지를 대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홍콩 땅을 밟은 7시간 여 뒤 베이징(北京)에서 30시간여를 쉬지 않고 달린 한 열차가 주룽 역에 멈추어 섰다. 그 열차의 이름은 '덩샤오핑'이었다.

홍콩의 주권 회복이 이루어 직후 홍콩 땅에 들어선 것이다. '덩샤오핑 호'의 이러한 ' 금의야행(錦衣夜行)'은 홍 콩 반환을 위한 모든 기반을 마련해 놓고도 그 영광으로부터 '소외'된 덩샤오핑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1999년 4월 4일)<차이나 워처>

2004/09/24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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