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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덩샤오핑(鄧小平)의 사망과 야근
중국에서 천하를 뒤흔드는 대 사건이 터졌을 때 필자는 신문사(한국일보)의 국제부 야근 기자로서 1보를 처리했다. 그 것도 두 번씩이나.
그 첫 번째는 1989년 6.4 천안문 유혈진압이었고 다른 하나는 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鄧小平)의 사망이었다. 모두가 중국사의 한 분기점이 되는 대 사건이었다.
지난 19일(2005년 2월 19일)은 덩샤오핑의 8주기가 되는 날이었으나 조용히 지나갔다. 이제 그의 죽음도 역사가 된 것이다. 다음은 덩샤오핑이 1997년 2월 19일 사망하던 날의 야근에 대한 추억이다. <차이나워처 주>
“덩샤오핑(鄧小平)이 죽었다고 나오네요.”
1997년 2월 20일 새벽, 국제부에서 함께 야근을 하던 최서용(崔瑞容) 기자가 와이어 한 장을 찢어 들고 시내판 마감을 끝내고 ‘영안실’에서 막 눈을 부친 필자를 깨웠다.
국제부의 텔레타이프실 한켠에는 국제부 야근자를 위한 별도의 숙직실이 붙어 있는데 편집국 기자들은 이 곳을 ‘영안실’이라는 희화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로테스크한 표현으로 부른다.
이 별칭은 필자가 신문사에 입사한 1982년 이전, 국제부가 외신부로 불리던 시절에 붙여진 ‘유서’깊은 것으로 아마 긴장으로 점철된 외신 야근을 끝낸 야근자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깊은 잠을 자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최 기자가 건내준 와이어(텔레타이프 용지를 지칭.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는 홍콩발 외신으로 홍콩의 한 TV 방송사가 덩샤오핑(鄧小平)이 19일 밤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는 내용이었다. 2줄이 채 안됐다. 새벽 3시를 막 넘어선 시각이었다.
홍콩과 베이징(北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수많은 ‘덩샤오핑 사망설’을 접했고 또 귀국한 뒤 국제부에 근무하면서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는 사망설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경험이 있던 터라 ‘이 것도 과거와 같은 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앞서 2월 15일 홍콩의 빈과일보(蘋果日報)가 ‘덩샤오핑의 병세가 악화돼 13일 30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며칠동안 본보를 포함한 전 세계 언론들이 덩샤오핑의 병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있었다.
덩의 나이 만 92세, 그리고 노인은 겨울을 조심해야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당시 덩의 병세는 국제부의 제1차적 관심사는 아니였다. 1980년대 말 이후 수십 차례나 있었던 사망설로 면역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8일전인 2월 12일, 북한의 주체사상을 확립한 것으로 알려진 황장엽(黃長燁) 북한 노동당 중앙비서가 베이징(北京)에서 한국의 총영사관에 망명신청한 초대형 사건의 속보 챙기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덩샤오핑 사망 임박설은 2차적 관심사였던 것이다.
(후에 사전 '시사'가 없었는가 하고 복기해 보니 19일 밤 9시에서 10시 사이 무렵 한국 총영사관을 경계하던 병력의 상당수가 갑작스레 철수했다는 기사가 타전됐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 것이 덩샤오핑의 사망을 ‘시사’한 것임을 그 순간에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황장엽 망명 협상이 잘 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징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만 했었다.
만일 그 때부터 준비해두었던 기사를 챙기고 베이징에 확인 작업을 요청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것은 '일이 벌어진 연후 현명해지기는 쉽다(It is easy to be wise after the accident)"라는 격언을 입증하는 한 사례일 뿐이다.)
이번의 덩샤오핑 사망 보도도 과거 '설'의 패턴을 답습하기 시작했다. ‘덩의 병세에 변화가 없다’라는 중국 외교부의 짤막한 공식 언급이 있었고 또 이를 계기로 해서 덩의 사망임박설이 잦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국내외 언론들은 여전히 덩샤오핑의 사망 임박설을 보도하고 있었으나 대세는 아니었다.
한국일보도 20일자 시내판 국제면에 ‘덩샤오핑이 한 때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고비를 넘겼다’라는 내용의 외신 기사를 전재했다. ‘이번에는 사망할지도 모른다’라기 보다는 ‘이번에도 설로 끝날 것 같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때문에 최 기자의 보고를 듣고 와이어를 받아든 순간까지 머리가 곤두서는 것과 같은 긴장을 느끼지는 않았다.
기사는 최 기자의 구두 보고 내용에서 한 마디도 더 보탤 것이 없었다. 심상치 않았다. 과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덩샤오핑 사망설 기사가 이처럼 한밤중에 이러한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나온 것은 필자의 경험으로는 없었다.
대부분의 덩 사망설 기사는 작성자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위한 방증을 갖다대느라 장황하기 마련이었다.
폭포수처럼 관련 기사를 쏟아내는 큰 사건의 제 1보는 이처럼 거두절미하고 핵심적 팩트만 전달하기 마련이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의 1보도 이랬다. 당시 1보는 '이라크 군이 쿠웨이트 국경선을 넘었다'라는 딱 한 줄이었다.
드디어 덩샤오핑이 죽었던 말인가. 그 것도 내가 야근하는 날을 맞춰서 말인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천안문 사태 당시의 야근이 떠올랐다. 눈꺼풀을 짓누르고 있던 잠은 순식간에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
최 기자에게 “후속 기사를 잘 지켜보라”는 사족과 같은 지시를 던진 뒤 편집부로 달려갔다.
1992년~95년 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사이 편집국의 전면적인 부서 재배치가 있었으며 그 결과 지척사이였던 국제부와 편집부는 편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서가 되었다.
지면 확대에 따라 편집부는 보다 넓은 공간을 필요로 했고 텔레타이프실 등을 갖춘 국제부는 창가 쪽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초래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야근 중 마감시간을 앞두고 처리해야할 기사가 나오면 두 명의 국제부 야근자 중 한 사람은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위해 편집부로 뜀박질을 해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론 구내전화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마감을 지키기위해 신경이 곤두선 편집 기자들을 납득시키고 때로는 설득하기위해서는 얼굴을 마주하며 직접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래서 마감시간을 전후해 국제부 기자들은 단거리 경주를 자주 하기 마련이었다.
1989년 6.4 사태 당시에는 텔레타이프 실 문을 거칠게 열어 젖히고 "총 쐈어"라는 한 마디를 편집부에 외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편집부에 가니 1면 편집자는 신문을 보고 있었고 야간국장은 간이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당시 야간국장은 주일 특파원을 지낸 이재무(李在武) 부국장이었다. 와이어를 보여주며 보고를 하자 야간국장은 “이거 해야겠는데”하며 1면 편집자를 바라봤다.
공장 사정이 어떻겠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1면 편집자는 “통상적인 가판 마감 시간이 지났는데... ”하며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 와이어의 내용 만으로는 빈약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덩샤오핑 사망설에 모두들 ‘양치기 소년에 속은 마을 사람들의 심정’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 때 최 기자가 편집부 쪽으로 뛰어오며 소리쳤다. “신화 통신이 덩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어요!!”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틈도 없었다. 수개월동안 내게 한번도 흥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최기자도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덩샤오핑 사망을 대비해서 우리 신문사는 사실 단단한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국제부에서는 사망설이 나돌거나 중병중인 외국의 권력자의 오비츄어리를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 관례이다.
야근 시 사건이 터지는 것을 대비하기위해서다. 두 사람 혹은 한 사람이 근무하는 상황(시내판 마감을 끝낸 새벽 2시 이후 시니어 야근자는 보통 퇴근 하기 마련이다)에서는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를 처리하기에도 버겁기 때문에 일대기 등은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경우도 이미 1989년 천안문사태 직후 일대기와 연표를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는 상황변화에 따라 일대기와 연표를 보완해왔으며 관련 사진과 자료들은 정리된 채로 혹은 미정리된 채로 야근자용 설합에 넣어두고 만일을 대비했다.
필자도 홍콩과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일대기를 개작했으며 덩샤오핑 관련 사진을 입수하는 대로 꾸준하게 보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오비츄어리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준비가 그렇게 치밀한 것은 아니었고 종종 보관해둔 일대기를 잃어버려 다시 작성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러한 덩샤오핑 사망에 대한 어설픈 대비는 1995년 초에 와서 문자 그대로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맞게 된다. 1995년 1월 초 덩샤오핑의 막내 딸 덩룽(鄧榕)의 뉴욕타임스지 인터뷰와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의 사망임박설 발표로 세계 언론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이후 한국일보는 덩샤오핑의 사망을 상정해 지면을 사전제작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다시 말해 1면에 처리할 스트레이트와 관련 스케치, 또 각국반응과 같은 사망 당일에 처리할 수밖에 없는 기사만 제외해놓고 덩의 사망과 관련하여 쓸수 있는 아이템을 모두 선정, 기사 출고는 물론 아예 편집까지 마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덩샤오핑 사망 준비를 철저히 하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1994년 7월 9일의 김일성의 사망발표 직후 준비부족으로 겪었던 혼란이 좋은 약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수종(金首宗) 국제부장은 이러한 방침아래 베이징에 있는 필자에게 기존 일대기와 어록 연표를 보완할 것과 함께 사후전망 해설 그리고 사후에 중요 역할을 할 인물들에 관한 약력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필자와 이상석(李相石) 당시 워싱턴 특파원 (미국이 보는 덩 사후 중국의 시나리오)그리고 국제부원들이 총동원되고 정치부 기자(덩 사후 한중간 외교관계 전망)와 경제부 기자(덩 사후 한중 경제적 관계전망)까지 가세하여 제작한 지면은 스트레이트와 스케치용 기사를 처리할 1, 2면을 제외하고도 낮용 6개 면, 밤용 4개면이었다.
낮용은 덩샤오핑이 편집국과 공무국 인력이 퇴근하기 전에 사망한 경우를 상정한 것이었고 밤용은 마감시간 전후에서 덩샤오핑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낮용의 아이템중 핵심적인 것만을 골라 압축 편집한 것이었다.
1995년 5월 귀국한 뒤 살펴보니 편집부에 낮용과 밤용 각각의 대장쇄(최종편집한 것을 가인쇄한 것)가 비치되어 있었다. 만일 덩샤오핑이 사망할 경우 편집에 교정까지 끝낸 상태로 중앙컴퓨터에 입력된 이 제작판을 불러내고 스트레이트와 스케치를 추가하여 그대로 인쇄에 돌리면 되게 돼있었다.
그 준비된 정도는 덩샤오핑이 오늘 당장 사망했으면 하고 바랄정도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사망이 ‘지연’되면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 것은 컴퓨터 기술상의 문제였다.
중앙컴퓨터는 정기적으로 이미 지난 기사들을 정리하는데 이 때 덩샤오핑 제작판도 함께 휩쓸려 가버린 것이다. 국제부원들과 편집부원들이 달라붙어 재복구를 하고 다음부터는 묵은 편집판 정리 시에 덩샤오핑 관련 제작판은 남기기로 했다.
그러나 전산실에서 이러한 편집국의 주문사항을 잊는 바람에 또다시 제작판이 통채로 날아가 버렸다. 디지탈 시대의 아날로그 마인드의 희비극이었다.
덩샤오핑이 위독하다는 외신보도가 나와 확인하면 매번 날아가 있는 사실을 확인하자 국제부는 국제부대로 편집부는 편집부대로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짜놓은 판이 두 번째로 날아가 버리자 편집부는 세 번째 헛수고는 하지 않겠다며 다시 판 제작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편집부가 이러한 입장을 취한 데는 대장쇄가 있는 만큼 유사시 기사를 즉각 중앙 컴퓨터에 입력시켜주고 관련 사진을 공급해준다면 편집 복구는 단번에 할 수 있어 곧바로 인쇄에 들어 갈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미리 제작해놓았던 판이 정작 써야할 때 또 날라 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만큼 임박해서 아니면 아예 사망사실이 공식 발표된 뒤에야 판을 짜는 것이 헛수고를 면하는 경제적인 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덩샤오핑 사망 임박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 되면 사전에 인쇄직전 상황으로 복구해놓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부에 떨어진 책무는 두 가지 였다. 그 하나는 덩샤오핑 사망 임박 시 이를 편집부에 사전 통지해 편집부가 사전제작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만일 사전 제작이 돼있지 않은 상황에서 덩샤오핑이 사망할 경우 편집부가 가장 빠른 기간 내에 편집을 복구할 수 있도록 대장쇄와 사진을 국제부 차원에서 별도로 보관하는 것이었다.
국제부는 중앙 컴퓨터에 미편집 상태의 기사가 남아 있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날라 갔으면 다시 입력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하여 국제부 개인용 컴퓨터 하드 디스크와 플로피 디스크에 중앙컴퓨터에 입력된 것과 꼭 같은 기사를 저장시켜 놓았다.
만일 편집부가 사전 제작판을 복구해놓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덩이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일차로 중앙컴퓨터의 기사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2차로는 개인용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3차로는 플로피디스크에 보관된 기사를 불러내어 처리키로 하는 3중의 대비책을 마련 한 것이다.
낮용과 밤용의 대장쇄와 사진은 잘 보이는 장소에 별도의 함에 담아 보관해 놓고 또 야근자 책상의 유리덮개 밑에 유사시 행동지침을 적어 넣어 두었다.
실제 상황이 벌어진 2월 20일 새벽은 상정했던 것 중 최악의 경우였다. 앞서 밝힌 바대로 며칠 전부터 덩샤오핑의 사망임박설이 보도되고 있었으나 사망할 것으로는 생각지 못한데다 황장엽 사건에 매달리느라 사전 제작을 편집부에 요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장쇄를 보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복구해야 할 참이었다. 하지만 가판 마감 시간이 끝난 뒤라 공무국 직원은 최소 인원만 남겨 놓고 모두 퇴근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앙컴퓨터에 기사 보관여부를 확인해보니 기사는 날아가 있는 상태였다. 개인용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 보관되어 있는 밤용 기사를 불러내 중앙컴퓨터에 다시 입력시켰다. 또한 국제부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쇄와 사진들을 편집부로 넘겼다.
하지만 시간 부족, 인력 부족으로 인해 밤용으로 계획된 것처럼 기사를 5개 면으로 펼칠 수가 없었다. 야간국장과 편집부에서는 일단 1면 스트레이트와 2면에 덩샤오핑 일대기를 처리하는 것으로 가판용 신문을 처리하고 그리고 곧바로 뒤이어 호외를 제작키로 방침을 정했다.
신화통신 보도가 있은 후 베이징의 송대수(宋大洙) 특파원과 홍콩에서 연수중이던 박정태(朴正泰)기자가 전화연락을 통해 덩샤오핑사망 사실이 현지에서 보도되고 있음을 알려왔다.
또한 야간국장의 연락을 받고 김서웅(金曙雄) 편집국장과 도영봉(都瓔峰) 종합편집부장이, 그리고 최 기자의 연락을 받고 김인규(金仁圭) 국제부장이 편집국으로 나왔다.
종합편집부장은 가판 2개면과 뒤이은 호외제작보다는 2개면이라도 가판을 더 많이 찍는 것이 더 좋을 뻔 했다고는 했지만 시간상으로 방침을 번복할 수 없었다.
준비된 기사와 사진은 충분했기 때문에 광고 없이 일반신문 판형 4개 면의 대형 호외를 만들어내었다. 1면에 덩샤오핑의 대형 사진과 함께 그의 사망을 전하는 스트레이트와 그에 따른 각국반응이 들어갔고 2면에는 덩샤오핑일대기, 그리고 3면에는 장쩌민(江澤民) 등 덩 사후 중국을 움직일 주요 인물들의 프로필과 덩샤오핑의 어록이 그리고 4면에는 덩의 사후의 각 분야의 전망이 들어갔다.
그리고 덩샤오핑이 1992년 10월 14차 전당대회가 폐막한 후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지도자들과 함께 찍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도 화보로 처리되어 게재되었다. 밤용으로 준비한 기사를 모두 소화시키고 사진도 큼직큼직하게 처리해 편집이 시원한 만족할만한 호외였다. 그러나.......
인쇄된 호외를 검토한 뒤 새벽 5시 30분께 일단 귀가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며칠 동안 덩샤오핑과 관련하여 기사를 써야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자료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현관에 경쟁지들이 배달돼 있었다. 가판이야 우리와 비슷하겠지 하는 예상과 마찬가지로 다른 신문들도 1면 스트레이트를 포함, 2개면 혹은 3개 면이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황급하게 제작한 구석이 역력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를 들쳐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는 우리가 낮용으로 준비해둔 양만큼의 기사로 1면부터 몇 개 면에 걸쳐 도배를 해놓은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 신음처럼 터져 나온 의문에 대한 답을 2면에 싣고 있었다.
이른바 특종기인 그 기사에 따르면 중앙일보의 문일현(文日鉉) 베이징 특파원은 한국시간으로 새벽 1시 2분(중국시간 0시 2분)에 소식통으로부터 덩샤오핑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듣고 다른 소식통을 통해 이를 확인한 뒤 1시 5분께 서울 본사로 연락했다는 것이다.
신화통신이 덩샤오핑 사망을 공식발표한 시각이 한국시간으로 3시 8분이었으니까 정확히 2시간 6분 전에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2시간이라는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의 결과를 빚고 말았다.
여타 신문의 독자들은 TV 방송이 덩샤오핑의 사망을 전하는 뉴스를 계속 보낼 때 ‘덩샤오핑이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 결과적 오보’를 읽고 있었던 반면 중앙일보의 서울 지역 대부분 독자들은 스트레이트는 물론 각종 관련 박스를 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덩샤오핑 죽음' 1보 싸움에 대비하여 중앙 각 신문이 모두 나름대로 단단히 준비했지만 결국 중앙일보가 완승한 것이다.
홍콩의 케이블 TV가 중앙일보가 덩샤오핑 사망과 관련한 제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 덩의 사망을 보도했고 또 베이징의 몇몇 그룹 지사에서도 공식발표가 있기 전에 이 정보를 입수했다는 후일담이 있기는 했지만 문 특파원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일보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발표가 아닌 상황에서는 그 것은 어디까지나 ‘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베이징에 있을 때 덩샤오핑 집 주변의 라오바이싱(老百姓: 일반 평민)들은 큰 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각국의 언론사들이 그들에게 덩의 집에 갑자기 고급 승용차들이 대거 몰려든다든지 혹은 집 주변 경계가 강화된다던지 하는 ‘이상한 조짐’이 있기만 하면 이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월 1,000달러씩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소문은 세계 각국의 언론들, 특히 홍콩과 대만의 언론들이 덩의 사망 1보를 가장 먼저 보도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또 다각적인 대비책을 갖추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식발표가 있기 전 미리 준비해둔 기사를 펼치라고 주장하여 관철시킨 문 특파원에 대해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서울시내 거의 대부분 지역에 배달까지 한 것은 중앙일보가 ‘덩샤오핑 사망’과 관련한 모든 가능성을 상정하고 편집, 제작, 배달까지를 일관한 철저히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음을 반증한다.
2 시간이라는 시차의 벽 때문에 제대로 못했을 뿐이지 다른 신문들도 우리와 중앙일보 못지않게 역시 단단한 준비를 해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가판 상황에서도 준비해 논 몇 개면으로 지면을 펼쳐 대량 인쇄할 방침이었지만 컴퓨터상의 잘못으로 실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컴퓨터 관련 담당자에 대한 문책을 검토 중이라는 기사를 기자협회보에서 읽었다.
또 조선일보에서는 가판용으로 만든 신문을 일부 지역 가정에 추가로 배달, 같은 날자로 2개의 신문이 배달됐다는 이야기를 출근한 다른 부서 부장으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필자는 1987년 국제부에 전입하여 홍콩, 베이징 특파원을 거쳐 귀국한 뒤에도 계속 국제부에서 근무했다. 그 10년 동안 ‘덩샤오핑 사망’은 늘상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1보를 어떻게 빨리 입수할 것인가, 1보를 입수했으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밤이라면, 또 낮이라면, 그리고 속보는 또 어떻게 등등.
베이징에서 있을 때 갑자기 먹구름이 끼어 주변이 어두컴컴해지기라도 하면 컴퓨터에 입력된 덩샤오핑 기사를 슬그머니 점검해보기도 하였다. 위인이 죽을 때면 하늘이 그 사실을 알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
또 1994년 여름 중국 남부지방에 큰 수해가 낮을 때도 마오쩌둥의 사망 전의 탕산(唐山) 대지진처럼 이는 덩의 사망을 예고하는 전조가 아닌가하고 홀로 긴장하기도 하였다. 이쯤되면 '노이로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덩샤오핑 사망과 같은 중국관련 초대형 뉴스의 1보를 처리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필자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또한 비록 늦긴 했지만 우리가 만든 지면에 대해서 안팎에서 적지 않은 칭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1보를 특종한 것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중앙일보 국제부는 덩샤오핑 사망 특종으로 1997년 기자협회가 주는 기자대상을 수상했다. (199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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