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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6.4 천안문 사태 야근
필자는 1989년 6월 4일 한국일보 외신부 야근기자로서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의 1보를 처리한 바 있다. 다음은 그 때로부터 8년이 지난 후에 정리한 그 날 밤의 기억이다. 다시 8년 흐른 2005년 6월 4일에도 천안문광장은 여전히 쉬란스키의 '마을광장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차이나워처 주>
6.4 천안문 야근
"땡땡땡 , 땡땡땡 ,때땡 땡땡땡...."
1989년 6월 4일 자정을 막 지난 한국일보 외신부(현재는 국제부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텔레타이프실.
초긴급 뉴스(Bulletin)의 타전을 알리는 신호음에 반사적으로 텔레타이프에 다가가니 4대통신의 텔레타이프들은 기계음을 가쁘게 토해내며 중국 베이징(北京) 천안문(天安門)광장의 발포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와이어실(텔레타이프실을 기자들은 보통 이렇게 불렀다) 문 밖쪽으로 튕겨지듯 나와 외신부 건너편 편집부를 향해 "총을 쐈어. 천안문광장에서 시위군중에 총을 쐈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중국 현대사의 획을 긋는 6.4 천안문 유혈진압을 전하는 숨가뿐 외신 야근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이 글을 쓰는 시점(1997년 10월)에서 8년 전인 그 날 밤의 상황과 한 일을 보다 정확히 되살려내기 위해서는 당시 신문 스크랩을 뒤적여야 했다. 신문 스크랩을 통해 어렴풋하던 기억을 되살리고 또 더러는 잘못된 채로 뇌리에 고여있던 기억을 교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텔레타이프 종이에 찍혀 나온 제 1보를 처음 보았을 때의 흥분과 긴장, 마감시간에 쫓기며 기사를 작성하며 느꼈던 긴박감, 기사를 마감한 뒤 새벽에 위성 TV를 통해 '중계'되는 천안문 광장의 유혈진압 모습을 편집국 야근 동료들과 지켜보던 일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날 야근은 필자의 진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날 외신부 야근(현재는 두 사람이 하고 있지만 당시는 혼자하는 야근이었다)의 시작은 한가로왔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계기가 되어 폭발한, 중국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시위는 5월 20일 계엄령선포 직후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그러나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하려던 중국 인민해방군이 학생과 시민들의 인간벨트로 저지되면서 상황은 또다시 소강상태의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6월 3일의 야근은 이처럼 계엄령 선포 초기의 긴장감이 많이 누그러진 상황에서 맞은 야근이었다. 또한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기도 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도 긴장이 이완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편집부의 도영봉(都瓔峰) 당시 1면 편집자는 지방판의 1면 서드 기사가 시내판에서는 빠져야하니 외신부가 쓸 수 있는 지면은 넉넉하다고 알려줬다. 외신 야근자와 편집 야근자는 밤중에 새로 들어온 외신 기사를 놓고 빈번하게 갈등을 빚는다.
외신 야근자는 새 기사가 우선이 아니냐며 1면 처리(이는 거의 대부분 지방 판에 만들어 두었던 국내 정치 경제 기사가 줄어들거나 심지어는 지면에서 아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를 주장하는 반면 편집자는 기사의 밸류 판단을 들어 외신 야근자의 주장을 배척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통보는 이런 문제로 편집 야근자와 외신야근자가 얼굴 붉힐 필요가 없게 됐다는 '화기애애한 야근'을 예고하는 ‘굿 뉴스’였다.
그러나 정작 채워야할 기사가 마땅치 않았다. 1면이 비웠다고 무턱 대고 아무 기사나 넣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편집부의 통보는 연일 천안문 시위관련 기사로 도배질하는 상황이니 그 관련 기사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야근에 들어간 오후 8시 이후부터 텔레타이프를 계속 지켜보았지만 통신마다 “천안문 광장은 이상없다”였다.
또 현지에 특파된 유주석(兪疇錫) 홍콩특파원도 이날 저녁 야근자와의 정례적인 전화통화에서 주목할만한 상황변화가 없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특파원이 보내온 내용과 외신 통신이 전해온 , 대수롭지 않은 새로운 팩트(fact), 그리고 전망이 뒤섞인 이른바 '기획성 해설 스트레이트'를 작성하고 있던 중에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폭풍'이 밀어 닥친 것이었다.
1보를 접했을 때 시내판 기사 마감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1면 편집자가 서드 기사를 새 기사로 채울 생각으로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돌연한 사태발전에 신속히 대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날 야근자 모두에게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이것은 그대로 경쟁지보다 앞선 지면을 제작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통상 최종판을 스크랩하는 관계로 그날 정상적인 시내판인 20판과 그 직후에 제작된 21판의 지면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기억에 따르면 20판 1면 머리기사로 처리된 천안문 유혈진압 기사의 제목은 '천안문 발포 4일 새벽 현재 8~9명 사망'으로, 또 레이아웃은 촉박할 때의 편집방식인 세로톱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제작한 21판에서는 기사를 좀더 보강하고 제목에서 사망자 수를 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크랩되어있는 최종판(22판 : 전철역 관공서 등 서울 시내 중심가 일부 지역에 돌리는 것으로 보통 가판이라고 한다)에는 '중국, 天安門 시위群衆에 發砲'가 굵은 가로 제목 컷으로, 세로 부제로는 '장갑차 銃쏘며 北京진입/30여명 死亡 수백명 負傷'으로 보다 진전된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서울 시내의 상당수 한국일보 독자들이 일요일 아침 이 뉴스를 읽었을 때 이 사실 조차 이미 '구문'이 되어 버렸다. 중국군의 유혈진압은 독자가 신문을 받아보던 시점에도 계속되었고 따라서 희생자는 큰 수효로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천안문 광장에서의 사망자 수자와 관련, 500명~1,000명설이 보도되었으며 심지어는 1만 2,000명이 죽었다는 황당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위안무(袁木) 국무원 대변인은 사태 이틀 뒤인 6일 외신기자 회견에서 최종 확인된 것은 아니라는 전제하에 300여 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텔레타이프를 통해 1보를 본 직후 몇몇 부원 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런 사태에서는 스케치 기사가 필수적인데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혼자서 쫓기에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 따라 거는 곳마다 응답이 없거나 부재중이었다. 또 연결이 되더라도 회사로 나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편집국을 둘러보니 외신부에서 반대편 끝에 위치한 체육부에 사람이 남아 있는듯 했다. 부리나케 가보니 이장훈(李長勳)기자가 남아있었다. 권투선수의 해외원정 경기 기사를 처리하고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스케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손이 빠른 것으로 정평난 이 기자는 한달음에 스케치 기사 몇 꼭지를 작성했다. 스트레이트 기사가 전할 수 없는 생생한 천안문 광장의 스케치는 결국 판을 갈면서 외신면에 실을 수 있었다.
베이징으로 유주석 특파원과도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 즉각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우선 기사처리부터 하고 있던 중에 베이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유 특파원이 전화를 건 것은 시내판 마감 전에 통상적으로 해오던 야근자와의 통화를 위해서였다.
통화 하려던 참이었다는 말에 유 특파원이 "무엇때문이지"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통신 내용을 다급히 읽어주니 유 특파원은 놀라면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광장을 한 번 둘러 봤을 때까지만 해도 별 이상한 조짐이 없었는데 ..."하다가 "가만 총소리가 들린 것 같아, 현장에 가보아야겠군"하면서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사태 후에 유 특파원이 쓴 글에 따르면 유 특파원은 3일 밤 10시(한국시간 오후 11시)께 천안문의 서쪽 편 거리인 서단(西單)거리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쪽으로 창안(長安)대로를 따라 걸으면서 시위대의 상황을 둘러본 뒤 천안문광장 동남쪽 2km지점에 위치한 충원먼(崇文門)호텔로 돌아와 회사와 연락을 취하던 중에 총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필자는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었을 때 유 특파원이 당시 걸었던 코스를 되 밟아 보며 그 날을 돼새겨 보기도 했다.)
기사 작성하랴 연락하랴 바쁜 와중에 일본 NHK-TV의 위성방송을 보니 NHK-TV의 외신부를 비추고 있었다. 그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외신부 야근 기자 한 명이 텅 빈 보도국을 배경으로 천안문 현지에 파견된 NHK-TV 특파원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가토상, 가토상..." NHK 보도국의 기자가 천안문 현지를 취재 중인 일본 NHK-TV의 특파원의 성을 꼬박꼬박 부르며 다급하게 현지 상황질문을 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화를 통해 상황을 전하던 NHK 위성방송의 화면에 천안문 광장의 모습이 화면으로 비쳐졌다. 그리고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대 사이를 누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 시간 0시 30분(한국시간 4일 새벽 1시 30분)에 촬영된 것이라는 이 장갑차 움직임을 담은 TV화면을 사진부가 재빨리 촬영하여 가판 스케치면에 게재했다.
장갑차와 불길의 모습이 TV화면을통해 직접 보게되자 현장으로 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던 유주석 특파원의 안위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계속 베이징의 유 특파원 숙소로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더 이상 기사를 처리하려해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 때부터는 NHK-TV를 지켜보면서 유 특파원과의 통화시도를 계속하였다.
유특파원과의 통화는 결국 퇴근을 앞둔 새벽 5시쯤에서야 이루어졌다. 전화를 받은 유특파원은 막 현장에서 돌아온 모양으로 대뜸 "총소리가 들지가 않아"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화기 수화기를 숙소 창가로 가져가는 듯했다. 콩볶는 듯한 총성이 전화선을 타고 또렸또렸하게 내 귀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 특파원은 4일 새벽 현장에서 목격한 바를 '나는 보았다. 학살의 현장을'이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한 대목도 빼기가 아깝다며 1개 면 전체를 털어 게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를 통해 총탄과 피로 얼룩진 비극의 현장을 한국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
퇴근하기에 앞서 배달된 상대지의 신문(시내판)을 보니 1면 머리기사가 아닌 1면 중간 기사로 천안문 발포기사를 처리하였다.
스트레이트 기사내용은 우리 것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머리기사로 올리지 않은 것이었다. 밸류 판단의 미스를 범한 것이 아니면 시간이 촉박했다는 이야기였다. 스케치 기사도 물론 실리지 않았다. "1보에서는 우리가 앞선 것 같은데"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천안문사태는 몇몇 기자의 진로에도 영향을 끼쳤다.
천안문 야근을 계기로 필자는 이후 중국 관계기사를 많이 쓰게 되었다. 그 것은 결국 3년 뒤인 1992년 유주석 특파원의 후임으로 홍콩특파원으로, 또 초대 베이징 초대 특파원으로 부임하는 단초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날 급히 '징발'됐던 이장훈 기자는 다음 인사에서 외신부로 발령났고 그리고 그것은 그가 한국일보의 초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부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97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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