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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한중수교 당시 대만의 여러 표정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한 지 올해(2005년)로 13년이 되었다. 일월(日月)이 켜켜이 쌓인 만큼 한중수교는 이제 ‘역사’다.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필자는 베이징(北京)이 아닌 타이베이(台北)에 있었다. 한국일보 홍콩특파원으로 재직 중이던 필자에게 본사는 베이징이 아닌 타이베이 취재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한중 수교 당일 저녁 타이베이에서 팩시밀리로 보내 온 한국일보의 지면을 받아 보았다. 베이징에서 조인식을 마친 뒤 환하게 웃는 이상옥(李相玉) 장관과 노재원(盧載源) 주중대표, 그리고 첸치첸(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의 얼굴에 한동안 눈길이 잡혔다.
그 때 그 기분은 ‘이혼’당한 집안 취재를 힘겹게 마친 상황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 장면을 사진으로 볼 때의 착잡함이라고 해야 할까. 거의 단신 수준으로 처리된 필자 크레디트의 기사는 더욱더 맥 빠지게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취재하고 송고했지만 필자의 기사는 흥겨운 잔치판에 뿌려진 ‘한줌의 재’였을 뿐이다. 본인이 송고한 기사들이 보일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귀퉁이에 숨어 있어 한참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은 그 5년 여 뒤에 정리한 그 날 전후의 추억이다. <차이나워처 주>
펑요우(朋友)처럼 맞아준 타이베이 공항의 택시기사
“부산, 제주도...”
1992년 8월 22일 늦은 밤, 타이베이(台北) 장제스(蔣介石) 국제공항에서 타이베이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상.
운전기사는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공항출발부터 연신 말을 붙여왔다.
중국어, 그리고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자신이 몇 해 전 한국을 단체관광 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기후와 풍경이 아주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운전기사의 태도는 친근했지만 필자는 장단맞출 기분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는 지금 대만과 한국과의 단교를 취재하기위해 대만 땅을 밟은 것이었다. 4월 서울에서 홍콩으로 부임하는 길에 트랜지트를 위해 장제스 공항을 잠시 기착했었기 때문에 대만방문은 이 번이 처음이었다.
첫 번 방문이라 긴장한 데다 단교를 바로 이틀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항 입국심사대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앞서 타이베이에 간 타사기자들의 기사와 홍콩TV뉴스를 통해서 대만 일반국민들 사이에 반한감정이 고조되어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택시 기사의 태도는 영 생각 밖이었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한국의 ‘배신’에 대해 비난을 퍼붓거나 적어도 무거운 침묵으로 불만을 표시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가.
운전기사는 혼자 신나 유쾌하게 떠들어대고 승객은 운전자의 눈치를 살피며 조마조마해 하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됐다. 이런 사이 택시는 어느덧 호텔에 도착했다.
요금을 받아든 뒤 좋은 여행이 되라며 웃는 얼굴로 인사까지 했다. 그 운전기사는 한국과 대만이 단교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과천서부터 기듯 홍콩서부터 잔뜩 긴장한 채 대만에 왔지만 대만 단교 취재의 출발은 이처럼 예상과 영 어긋났다.
다음날 아침 숙소인 궈롄호텔(國連飯店) 도로 건너편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았다. 장충동 국립극장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손문(孫文 : 쑨원) 기념관과 4차선 도로를 격해 있는 곳에 위치한 타이베이 주재 한국대사관의 건물형태는 참 독특했다.
2층 3층 4층으로 올라갈수록 건물 옆의 폭이 작아져 옆에서 보면 마치 사각형 상자에 직삼각형을 얹져 놓은 형상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양식은 멋을 부린 것이 아니라 건물을 지을 당시 대만 당국으로부터 임대받은 부지에 비해 책정된 건축예산이 적어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대사관 앞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것은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불안한 조용함이 결코 아니었다. 겉에서 보기에 대사관 주변을 감돌고 있는 것은 일요일의 한가로움이었다.
이 곳이 바로 하루 뒤 주재국과 단교하는 대사관이라는 사실은 전면의 2층 창문 중 하나가 깨져있는 것이 가까스로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입구를 통해 들어가니 대사관안은 겉모습과는 달리 분주했다.
박노영(朴魯榮)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직원 32명이 모두 출근해, 단교에 따른 각종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1층 출입구 앞 사무실에선 필자가 홍콩으로 부임한 직후 홍콩에서 대만으로 임지를 옮긴 장문익 공보관이 서울과 홍콩 등지에서 온 기자들에게 상황 브리핑을 반복하고 있었다.
장 공보관에게 “분위기가 의외로 조용한데요”하고 운을 떼었다. 장 공보관은 상황이 과장되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며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는데 동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0일 이후 22일까지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던 인원은 불과 20여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일요일이어서인지 오늘은 아예 모습조차 비치지지 않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사실 한국과 대만과의 관계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당시 대만 농구대표단이 그들의 국기인 ‘청천백일기’의 사용을 금지한데 항의, 본국으로 철수할 때 금이 갔다는 것이다.
그 당시 대만 국민들 사이의 반한 분위기는 한국 사람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며 대사관과 한국 기업체를 가릴 것 없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번에는 한국 대사관 앞에서 ‘점잖게’ 시위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1986년 당시 시위대들은 돌을 던졌지만 이번에는 돌이 아닌 계란으로 바뀌었다는 것도 항의 강도가 완화된 또 다른 증거라고 말했다. 대사관 창문을 깬 돌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유엔가입 이후 국가다운 국가들과 거듭된 단교를 해왔던 이력이 있어다고는 대만국민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한국과의 단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마음이 딴 여자에 가버린 사실을 오래전에 안 부인이 남편의 공식적인 이혼제기를 심드렁해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할까. 화풀이는 이미 1986년 아시안 게임 당시 충분히 했다고는 하지만 대만 일반 국민들의 무관심은 대만과의 특수한 관계를 의식해온 우리가 오히려 섭섭할 정도였다.
일반국민들의 무관심과는 대조적으로 대만 관리와 대만 언론들은 한국의 단교를 배신행위라며 맹폭을 가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아픈 지적도 있었다. 한국이 1960년대 초 식량난에 시달릴 당시 장제스 총통이 자국도 여유롭지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가한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 한 예다.
임시정부를 유일하게 승인한 것이 장제스의 국민정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중국과의 수교가 시대의 대세임을 인식하면서도 대만과 단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미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의 반응을 이해하면서도 좀 심하다 싶은 것도 없지 않았다. 23일 자 대만 신문들은 대만 외교부로 소환되어 첸푸(錢復) 외교부장과 만나는 박노영 대사의 사진을 크게 싣고 있었다.
사진은 박 대사의 모습을 마치 꾸지람을 듣는 학생의 모습으로 잡아 놓았다. 그리고 본국의 훈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외교관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 대사를 ‘허수아비 대사’ ‘특명전권 대사 자격이 없는 인물’이라는 적절치 못한 인신공격마저 퍼부었다.
박 대사는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한다는데 동의했다는 사실이 전해지기 전 까지 만해도 대만에서 가장 대접받는 외교사절이었다.
골프광인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라운딩 상대로 자주 초청되었다고 한다. 박 대사 역시 대만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입장이어서 중국과의 수교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본국정부에 보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주재국을 위한 노력도 또 골프 등으로 맺은 친분도 관계 단절이라는 상황 하에서는 아무런 완충작용도 하지 못했다. 대만관리와 언론들은 한국정부에 대한 섭섭감, 불만, 그리고 배신감 등을 박 대사에게 쏟아 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만정부가 실제로 취하는 조치는 겉으로 드러내는 분노에 비해 훨씬 강도가 약했다. 우선 단교절차에 있어서도 한국의 중국 수교에 앞서 단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공식적으로 수교하는 시점과 동시에 단교하기로 했으며 또 국적기인 대한항공의 취항금지를 9월 15일로 늦추어 잡는 등 당장의 취항금지에 따른 혼란을 피했다.
또한 대만당국은 단교설명을 위한 사절단의 방문은 거부하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위한 방문은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으며 한국교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명확히 밝혔다.
대만이 이러한 두 모습은 보일 수밖에 없던 것은 실질적인 보복조치가 자국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보복 조치라는 것도 몇 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중국과의 수교를 늦추기 위해 부여해왔던 특혜를 철회하는 정도에 그쳤다.
한 예로 당시 대만은 자동차 수입을 미주와 유럽지역으로 제한하면서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에 한해 수입쿼터를 배정해주었으며 매년 30%씩 증량시키기로 약속했었다. 1991년의 쿼터량이 8,000여대였으며 1992년은 1만 400대였다.
서운감 마저 느낄 정도의 일반 국민들의 무관심, 언론과 정부의 과장된 분노,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경제적 이익 등 실리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 등 대만은 한국과의 단교를 여러 얼굴로 맞이하고 있었다. (1997년 12월 21일)
옛 친구와의 작별, 그 날의 풍경
1992년 8월 24일 오전 8시 30분.
중화민국(中華民國) 수도 타이베이(臺北)시 한국대사관 2층 대회의실.
교민대표 상사직원들 유학생 대표 그리고 대사관원들이 모인 가운데 박노영 대한민국 주(駐)중화민국 특명전권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대사의 표정은 마치 상을 당한 사람처럼 어두웠고 장내의 분위기는 납덩이 같이 무거웠다. 박 대사는 대만당국이 한국이 중국과 수교할 방침이라고 밝힌 8월 19일 이후 한동안은 공식적으로는 한중 수교방침을 부인하는 본국정부와 대만정부 사이에서 안팎곱사등 신세가 되었으며 단교방침의 공식발표 이후에는 대만정부와 언론의 섭섭감과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신문을 통해 혹은 TV 방송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사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마냥 취급받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대만 거주 한국인들의 심경은 착잡했었다. 박 대사는 모여선 사람들을 좌우로 둘러보며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입을 열었다. 다음은 박 대사의 담화 내용이다.
“여러분을 이렇게 초청한 것은 잠시 후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게 됨에 따라 당부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한국시간으로 10시, 이 곳 시간으로 9시이면 베이징(北京)에서 한중 수교협정이 체결되고 서울에서는 이에 따른 대국민 성명이 발표됩니다.
이 곳에서는 한국대사관 현판의 강판식이 있게 되며 중화민국과 우리나라는 단교하게 됩니다. 그동안 본 대사관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교민 여러분들께 제대로 설명드리지 못했지만 여러분들이 이를 이해해주신 데 대해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본인이 이 곳에 부임한지 오늘로 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대사관 업무에 잘 협조해 주시고 그간 어려운 시기를 별 문제없이 극복한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지난 1주일 동안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본대사관이 여러분들에게 사전 통보, 주의를 환기시키지 못했던 점을 여러분께서는 이해해주시라 믿습시다.
본대사관은 언론 보도 이상을 먼저 인지한 사실이 없습니다. 보도보다 빠른 내용을 여러분들께 알려 이에 대처하도록 하지 못한데 대해서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합니다.
18일에서야 양국간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란 사실을 인지, 19일 저녁에 교민회장, 지사장 대표, 유학생 학생회장 등에 자숙을 통해 난국을 극복하자는 당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부 전달받지 못한 경우도 있고 다소 빠진 경우도 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지난 1주일 동안 본인에게 개인적으로 참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국가를 대표해서 본인 책임아래 본국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데 있어 주재국으로부터 못마땅한 대우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바람을 막고 이 곳의 분위기를 본국에 충실히 전달했다고 자위합니다.
가장 고심했던 점은 극적인 변화의 시점을 맞아 우리 교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비록 어려움이 있더라도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받아들이고 원대한 우리국가의 장래안보를 위한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의 지원을 보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50년 한국동란 당시 적으로 마주 싸웠던 중국과 40년이 지난 지금 수교하는 사실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극과 극으로 엄청나게 변화하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교이후 여러 분야에 있어서의 양국간의 교류에 대해서 특히 유학생과 상사주재원들의 우려가 많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중화민국과 외교적으로 단교하더라도 민간차원에서는 최고수준의 관계를 설정할 것이라는 점을 대외에 천명하였습니다. 그러한 기우와 걱정이 다소 해소되리라고 봅니다.
우리 법무부가 한국 내 중국화교에 대한 지위처리문제가 발표될 것입니다. 한국내의 화교는 우리의 10배 숫자입니다.
지금까지의 생활과 변함이 없는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이 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교민을 위한 조치도 곧 내려질 것입니다. 유학생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한 교섭단의 방문을 통해 처리될 것입니다.
아울러 지사와 상사에 대해서도 양측간의 교섭을 통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리라고 기대를 합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도 없이 합심을 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시길 당부드립니다. 그간 대사관의 업무에 대해 협조를 해주신데 대해 대사로서 다시 심심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저는 즉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대만당국의 말과 정부의 훈령도 있고 해서 가까운 시일내에 귀국할 것입니다. 귀국한 뒤에도 다른 공관원들이 업무처리를 계속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간의 우의에 대해 사의를 드리고 평생 군 생활을 해온 본인이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게된 데 대하여 가슴이 아프고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정부의 훈령에 따라 먼저 떠나는 저자신의 심경도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것으로 당부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박대사의 발언이 끝난 뒤 대만 교민의 '韓中 外交關係 變化(환중 외교관계 변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의 전달이 있었다. 낭독되지는 않은 채 대사와 참석자들에 배포된 이 문건은 그간의 정부 조치에 대한 섭섭감과 미수교국의 국민이 된 불안을 담고 있었다. 김사옥(金四玉) 회장 명의로 발표된 성명내용은 다음과 같다.
“韓中 兩國(한중 양국)간 43年(년)동안의 국교가 하루아침에 마감되고 中國大陸(중국대륙)과의 修交(수교)가 될 즈음에 臺灣(대만)에 居住(거주)하고 있는 우리 僑民(교민)들은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깊은 失意(실의)와 我國 政府(아국 정부)의 無誠意(무성의)한 措置(조치)에 커다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北方政策(북방정책)의 마지막 단계로 中國大陸(중국대륙)과의 修交(수교)를 推進(추진), 實利外交(실리외교)를 展開(전개)하여 國益(국익)을 追求(추구)하는 것은 首肯(수긍)이 가지마는 中國大陸(중국대륙)과 수교에 급급한 나머지 이 곳 中華民國(중화민국)과의 마무리에 너무 疏忽(소홀)했던 것으로 認識(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에 居住(거주)하고 있는 우리 僑民(교민)들은 더욱 당황하고 不安(불안)해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後續 措置(후속 조치)가 어떤 形式(형식)으로 推進(추진)되어 어떤 結果(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우리 政府(정부)에서는 誠意(성의)있는 姿勢(자세)로 중화민국 정부와 交涉(고섭)하여 僑民保護對策(교민보호정책)에 만전을 기할 것을 促求(촉구)하는 바입니다.
國家政策(국가정책)이 國家利益(국가이익) 우선으로 추진되면서 대만지역은 다소 疏外地域(소외지역)이 돼왔던 것도 사실이고 우리는 커다란 희생을 안게 되었습니다.
國交(국교)가 있는 상황에서도 이 곳에서 居留權(거류권)과 就業保障(취업조장) 등이 문제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정식 국교가 斷絶(단절)되면 이러한 어려움은 더욱 加重(가중)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중화민국 정부차원에서는 한국국민들에 대한 보복 조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현지 국민들의 感情(감정)이 誘發(유발)되어 不祥事(불상사)가 발생될 것도 排除(배제)할 수 없습니다.
중화민국에서는 斷交(단교)를 宣言(선언)하면서도 한국에 거주하는 2만 명의 華僑(화교)들에 대한 安全保障 聲明(안전보장 성명)을 발표하는데 우리 정부는 아직까지 아무런 措置(조치)와 발표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정부차원에서 僑民保護對策(교민보호정책)을 公式 發表(공식발표)해줄 것을 정중하게 要請(요청)하는 바 입니다.”
문맥 곳곳에 본국정부에 대한 섭섭감이 배어있는 이 성명서의 전달이 있은 이후 참석자중 몇몇 사람들이 대사관 영사 업무와 교민 신변보장에 관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박 대사는 첸푸(錢復) 외교부장과의 회견에서 교민 유학생 상사직원과 그 가족들에 관한 신변안전 보장을 당부했으며 대만 정부 내에서도 이에 관한 관련 부처간의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불안해하는 교민들을 안심시켰다. 뒤이어 기자들과의 간단한 회견이 있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그리고 대만주재 마지막 대사로서의 개인적 감회는.
“내일 귀국합니다. 착잡한 심경입니다.대만 대사관은 우리 정부 수립이후 첫 번째의 공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공관이 이렇게 문을 닫게 된다는 것에 대해 인간으로서 당연히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쪽 보도내용에 앞서 본국정부로부터 단교에 관한 사전 통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사전 통고를 받은 내용은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만 중요한 정책의 시행과정에서는 일정기간 어느 정도의 비밀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당 대사관에서는 이 곳 언론보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라는 본부의 훈령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앞으로 대만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하십니까.
“1948년 8월 25일에 주중화민국 대사관을 처음 열었으니까 만 44년에 하루가 모자란 날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양국은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단교는 되었다고는 하지만 우호관계는 유지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외무부 장관께서도 민간수준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관계를 설정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잘돼나가리라고 희망합니다.”
-이 곳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만정부가 단교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당분간 영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곳 정부도 대국민용으로 어떠한 제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는 앞으로 실무교섭단에 의해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됐으면 하는 것이 바람입니다.
-현재 대사관은 부지는 대만정부 소유이고 건물만이 우리 정부 소유인데 대사관 이전 요구가 있지 않을까요.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대사관 부지 문제는 실무교섭에서도 이미 제기되었습니다.”
-만 1년 만에 귀국하시게 됐는데 대만에 대해서 주재하면서 느낀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 쉬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지난해 8월 28일에 부임했으니까 만 1년은 아닙니다. 부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방문을 해서 낯 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 대한 인상은 과거 우리하고 같은 수준의 발전을 해온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건실하게 발전하는 국가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고 나쁜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최근 들어 양국간의 완충적인 역할을 해야하는 대사의 입장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일생 중 지난 1주일간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본국정부의 조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서운하다는 감정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대사의 소임은 본국정부의 지시를 받아 이를 수행하며 또 이 곳 교민들의 사정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특히 당부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이 곳에는 유학생 1,500여명이 각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단교로 인해 혹 불상사는 당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각 업체의 지사들도 이번 사태로 큰 타격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의실 현관 위 시계의 어느덧 9시를 가르켰다.
박 대사와의 회견을 끝낸 기자들은 대사관 현관 앞으로 우르르 내려갔다. 대사관 현관 앞에는 ‘역사적 순간’을 담으려는 대만 기자들이 이미 와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진 기자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가운데 현관 입구 측면 벽에 설치되어 있던 대사관의 현판(구리동판인 대사관 현판은 생각 외로 작았다. 가로로는 한팔 길이에 못 미쳤고 세로 길이는 한 뼘 정도를 약간 넘는 정도였다)이 대사관 직원에 의해 철거됐다.
우리가 대만으로 부르는데 익숙한 중화민국과의 단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정부 수립 10일 뒤인 1948년 8월 25일 최초의 해외공관으로 당시 중화민국 수도였던 난징에 설치되었던 주중화민국 대사관은 개설 44주년 기념일을 꼭 하루 남긴 채 폐쇄되고 만 것이다.
단교의 절차는 다 끝났으나 무언가 허전했다. 그 허전함은 교민들도 마찬가지 인듯했다. 대사관 입구의 교민회 사무실에 모여 그동안 참아왔던 본국정부에 대한 섭섭감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이 곳의 리덩후이 총통은 21일 우리정부에 대해 한국내 거주하는 화교에 대해 한 안전보장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어요. 진주시(金樹基)주한대사도 2차례에 걸쳐 화교보호를 촉구했어요. 그런데 우리정부는 대만교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어 서운했습니다.”
“교민들이 대만정부에 대해 민원 업무를 하기위해서는 대사관이 발행하는 국민거류증이 필요해요. 그래서 단교 후 영사업무 지속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였어요. 그런데 단교 후 영사업무가 어떻게 되느냐는 묻는 교민들의 문의에 대해서 대사관에서 책임 있는 답변을 못했어요.
단교하는 당일인 오늘에 와서야 대사가 고별간담회에서 영사업무가 지속된다고 말하고 있군요. 대륙과의 수교는 불가피한 일이지만 대만교민을 조금만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지금 이 사무실로 걸어오는 전화는 바로 영사업무가 지속되는 지 여부를 묻는 전화입니다.”
“단교보도 이후 교민회 사무실로 협박과 비난 전화가 하루 30~40통 꼴로 걸려왔습니다. 하지만 위로하고 걱정하는 대만 지인들의 전화도 많습니다. 우리에게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정부 수립후 최초로 개설된 대사관을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문 닫아도 되는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대사관에서는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이 대만에 거주하는 한국교민들의 10배가 되니까 한국교민들이 별로 큰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우리 처지와 한국 화교들의 처지는 달라요. 한국에는 대만대사관이 철수한다 해도 중국대사관이 들어서요. 체제는 달라도 같은 민족이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대변해주는 대사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 곳은 3.000여명의 교민 중에 유학생과 연수생 1,500명, 상사 직원 및 그 가족들 500여명을 제외하면 순수 교민은 1,000명이 되어요. 한국과 대만과의 관계 악화되기 시작한 뒤 1년 전부터 이들 교민들 중에서 대만으로 귀화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단교 이후에 이런 경향은 더욱 커질 것 같아 우려가 됩니다.”
교민들의 불만의 소리를 듣다 밖으로 나와 보니 북적대던 대사관 주변은 월요일의 일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대사관 주변을 지나던 대만주민들은 바로 오늘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수교국이자 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대만이 국교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다운 국가인 한국과 단교하는 날이고 또 지나는 곳이 한국대사관이란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기묘한 섭섭감은 이 곳 언론들이 약간은 달래주었다. 이 날 석간 신문들은 한국과의 단교 사실을 관련 사진들과 함께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한 신문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신문은 양국의 단교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하기식을 염두에 두었던 모양으로 서울 대만 대사관에서의 청천백일기 하기 모습과 타이베이 한국대사관에서의 태극기 하기모습을 대비시켜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진이 전하는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대조적이었다.
우선 대만 측 하기식 사진은 진수지 주한대사가 서울 명동의 대사관에서 대만교민과 공관원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하기하는 모습이었던 반면 태극기하기 사진은 평상복 차림의 한 노인이 태극기를 내리는 모습이었다.
아침의 단교행사에는 대사관 현판 강판식 외에 별도의 국기 하강식은 없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태극기하기모습은 하루 전인 23일 저녁의 모습으로 사진에 등장하는 노인도 한국 사람도 아니고 현지 고용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적절치 못한 편집이었다는 지적도 나올 수는 있다. 그러나 무언가 쫓기듯, 그리고 좀 심하게 말해 내팽겨 지듯 대만과의 단교를 마무리하려는 우리 대사관, 우리 정부의 자세가 엿보이는 듯해 씁쓸했다.
이날 저녁, 서울에서 출장온 기자들과 홍콩특파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러 가기위해 숙소인 호텔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차 앞자리에 앉으려던 한 기자가 운전기사와 몇 마디 나누더니만 그냥 내리는 것이었다.
뒷좌석에 타려던 다른 기자들이 의아해하며 이유를 묻자 “운전기사가 ‘너희들 한국인들이지.태우고 싶지 않아’라고 했어요. 다른 차를 잡읍시다” 하는 것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우리 일행들을 쏘아보는 그 운전기사의 나이는 50이 넘어 보였다.
그날 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보니 본국 국제부가 팩시밀리로 보낸 한중수교 와 대만단교 관련 기사가 실린 지면이 도착해 있었다.
중국과 수교를 끝마치면서 환하게 웃는, 낯익은 우리 대표단의 얼굴 모습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모두가 밝은 표정인 그 사진에 아침에 있었던 무거운 모습의 박노영 대사와 공관원, 교민들의 모습이 그리고 우리들을 분노서린 눈길로 바라보던 대만 택시 기사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새 친구를 사귀기 위해 옛 친구를 너무 소홀히 다룬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한중 수교의 니제르 변수
“한국과의 단교가 머리기사로 올라있는 25일자 대만신문의 1면 한 귀퉁이에 아프리카 니제르의 총리 일행이 이날 4일간의 일정으로 대만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지난 7월말에 있은 니제르공화국과의 복교는 대만정부가 ‘두개의 중국’을 지향하는 탄성외교(彈性外交)를 펼치기 시작한 이래 최대의 성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대만정부의 자신감을 한껏 고양시켰던 니제르와의 복교는 한국을 잃음으로써 채 한달도 못돼 그 빛이 바랬다.
니제르와의 복교를 통해 중국에 멋진 ‘잽’을 먹였던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한국과의 수교라는 ‘어퍼컷’을 맞은 셈이다.
49년 10월 대륙에 공산정권에 수립된 이래 중국과 대만은 누가 중국을 대표하느냐하는 이른바 ‘중국대표권 문제’로 싸움을 벌여왔다.
나라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없이 세계의 모든 나라를 ‘중국의 대표권’문제의 재판관을 만든 이러한 외교전에서 양측 모두 상대방과 수교한 국가와는 단교한다는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중국의 유엔 가입과 미중수교 이후 ‘제로섬의 게임’에서 밀릴 대로 밀린 대만은 사실상 ‘두개의 중국’을 인정한 ‘쌍중(雙重)승인’을 지향점으로 하는 탄성외교 정책으로 선회, 돌파구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대만은 줄기 만하던 수교 국가를 증가세로 반전시키는 성과를 거두어 왔다. 대만의 탄성외교 이후에도 중국은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속속 국교를 맺고, 대만과 단교케 하는 등의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과거처럼 일방적이지는 못했다.
1개월여 동안 외교전이 진행된 니제르의 경우에서는 중국은 대만에게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지난번 니제르를 상대로 ‘경제적 능력’과 ‘국제적 위상’이 맞부딪친 외교전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던 끝에 대만이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이다.
대만은 ‘쌍중승인’의 외교정책에 서광이 보인다고 흥분했고 중국은 점차 달라지는 국제환경변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중수교는 대만이 처하고 있는 냉엄한 국제적 위상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의 사설이 침통한 어조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대륙정부가 ‘일국양제’의 통일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해협양안의 영토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대만은 힘들 것”이라는 것은 대만이 처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외교적 패배와 스스로 처한 위상에 대한 냉철한 자기 확인을 하는 가운데서도 대만 언론은 중국이 두개의 한국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한반도에 두개의 정치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중국이 중국에서는 같은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또한 중국이 소련 붕괴 이후 베트남 북한 등과의 유대 강화를 통해 사회주의권의 존속을 꾀했으나 한중수교로 이러한 구상은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도 제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한중수교로 중국은 그동안 견지해온 중요한 원칙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경제적 실리를 위해 동독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독과 수교했던 소련이 결국 붕괴하지 않았느냐는 역사적 사실을 외국 언론을 인용, 보도하기도 했다.
대만 언론은 한중수교라는 외교적 패배 속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기위한 실마리를 찾기에 애를 쓰는 모습이다.”
한국과 대만이 단교한 이틀 뒤인 26일 한국일보에 게재된 ‘기자의 눈’의 전문이다.
이 글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이 일반적인 예상을 앞질러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를 하는데 촉매역할을 한 것은 한-대만 단교 바로 한달 전에 있었던 아프리카 니제르공화국을 둘러싸고 벌였던 중국과 대만과의 한판 승부였다.
필자가 홍콩에 부임하기 전 인사를 다닐 때 흔히 듣던 인사말은 베이징(北京)을 거쳐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필자 역시 3년 뒤에 귀국하기 전에 중국의 문이 열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홍콩에 부임해 채 홍콩에 적응하기도 전에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질 줄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중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한중간에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던 교섭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홍콩주재가 오래된 다른 특파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콩 대만 언론이 일제히 한국과 중국이 수교할 방침이라는 보도를 하고 있을 즈음 동남아 출장을 가 있던 한 타사 특파원은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수교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이냐”라고 재삼재사 물었을 정도로 한중 수교 뉴스는 모두의 의표를 찌르는 ‘기습’이었다.
3년 전인 1989년에 소련과 수교한 한국이 중국과 수교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양국간의 실질적 교류는 1991년의 체제변화로 옛 이름을 회복한 러시아를 넘어섰다.
하지만 정작 수교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본 것은 한국과 중국 모두 대만과 북한을 소홀히 다룰 수 없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 놓여있던 당시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를 유일하게 인정하고 지원한 나라였으며 냉전시기 아시아의 반공보루로서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해온 국가였다.
또한 중국과 북한 관계는 6. 25 당시 혈맹관계였다. 이러한 한국과 대만, 또 북한과 중국과의 특수한 관계에 살펴 볼 때 ‘중국과의 수교, 대만과의 단교’라는 기존의 외교방정식이 성사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진통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사실 이상옥(李相玉)외무장관이 중국과 수교를 하게 되면 대만과는 단교가 불가피하다고 일반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시사한 것은 한중 수교 2개월 보름전인 6월 8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있은 이 대학 국제대학원 고위국제관리과정 특강에서가 처음이었다.
이상옥 장관은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다소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대만과의 단교불가피성을 완곡하게 언급한 것이다. 이 장관은 이 같은 시사조차도 특강연설에서가 아니라 특강을 마친 뒤 참석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형식을 통해 밝혔다.
대만과의 관계조정이라는 표현은 결국 중국이 수교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던 ‘하나의 중국’원칙에 따른 대만단교를 받아들일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그 발언의 함축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1단 정도로 짤막하게 다루었을 뿐 이었다.
중국과 수교하기위해 대만과 단교해야한다는 사실을 아직은 우리 국민들에게 선뜻 받아들이고 있지 않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92년 8월은 한중수교를 위한 제반 여건이 무르익은 때라기 보다는 중국과 수교를 위해 ‘오랜 우방’ 대만과의 단교가 불가피함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뜸들이기 과정을 막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우방인 대만과 단교하면서까지 중국과의 수교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우리의 지도층 사이에 폭넓게 퍼져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중수교를 3주를 앞둔 시점인 1992년 8월 3일 중국공산당의 대외교섭를 담당하는 대외연락부의 주량(朱良)부장은 일본의 한 중의원과의 회견에서 북한문제가 한중수교의 최대 걸림돌임을 밝혔다.
그는 한국과의 수교는 “필연적 추세”라고 밝혔으나 “일본과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언급했다. 당시 언론은 주량이 ‘11월 조기수교설’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회피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한중수교가 아무리 빨리 이루어진다 해도 11월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상황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11월 조기 수교설’은 무슨 특별한 조짐이 잡혀서라기보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12월 대선을 앞두고 중국과의 수교교섭을 타결짓지 않겠느냐는 다분히 한국의 정치일정과 연관시켜 유추한 전망이었다.
중국이 수교분위기를 조성하기위한 전제로서 항상 강조해온 북-미간 북-일간의 교섭이 지지부진한 것도 한중간의 수교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 또 다른 이유였다. 베이징에서 진행되어 오던 북한과 일본과의 수교교섭은 8월 당시 8차 회담의 일정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한 북한과 미국과는 역시 베이징에서 진전 없는 참사관급 접촉을 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1992년 8월의 한중수교는 북한 측의 입장을 고려, ‘만만디’자세를 취했던 중국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자세를 돌변함으로써 성사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왜 중국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을까.
당시 대만 언론들은 이러한 중국 측의 입장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 니제르를 둘러싼 외교전을 지적했다. 니제르 공화국이 중국과의 단교를 무릅쓰고 대만과 수교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중국이 이를 단번에 만회하기위해 카드로 한국수교카드를 썼다는 것이다.
1989년 7월 이후 경제원조를 앞세운 대만의 ‘탄성외교’로 대만과 복교한 국가는 니제르에 앞서서도 7개국이나 되었다. 중미 소국들이 대부분인 이들 국가들에 대해 중국은 예의 ‘할슈타인 원칙’을 적용, 해당국가와 단교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했다.
하지만 니제르 공화국에 대해서 중국은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다. 중남미 국가들은 국토면적도 작고 또한 냉전 시절부터 미국의 뒤뜰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대만과의 복교가 외교적으로 미치는 파장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냉전시절 비동맹운동의 한 축이었던 아프리카지역에서 또 인구는 적지만 국토면적이 기존의 수교 국가들을 합친 것만큼이나 넓은 국가와 대만과의 수교는 실질적인 면보다도 상징적인 면에서 그 여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첸지천(錢其琛) 외교부장이 니제르 공화국으로 달려가 일단 번의를 시켰다. 그러나 첸 외교부장의 뒤를 이어 다시 니제르를 찾은 대만 외교팀은 니제르공화국의 재번의를 이끌어 내 중국에 외교적 참패를 안겼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대만과의 복교대가로 니제르는 5,00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냉전 종식 이후 대만의 ‘달러외교’가 중국의 실질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당시 대만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동구국가에 대해 외교적 파상공세를 펴고 있었고 또 외교백서를 통해서는 유엔 재가입을 정책목표로 제시하고 있었다.
중국은 천안문사태로 자신들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진 상황을 이용,‘공세적 외교’정책을 펴오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또한 동구 공산권 국가의 붕괴 도미노에 이어 바로 반년 전 소련의 소멸은 중국의 지도부를 긴장시켰다. 이런 가운데 ‘니제르 쇼크’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중국은 장래의 화근은 조기에 확실하게 뽑아야한다는 생각에서 한국과의 수교를 서둘렀고 북방외교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무망해진 상황에서 임기 중 중국과의 수교를 마무리 짓고자 했던 노태우 정부의 입장과 맞아 떨어져 양국의 수교가 전격적으로 성사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만 언론들은 다른 요인들도 지적했다. 경제적 요인으로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개혁 개방의 촉진을 위해 양국간의 경제협력이 더욱 절실하여 졌으며 당선이 유력한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가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겠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중국과의 수교에 적극적인 노태우 정부와 서둘러 수교교섭을 타결짓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중국은 경제개발을 가속화하기위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카드’를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적극적인 개혁 개방을 추진하겠다는 자세였으나 미국은 주춤거리고 있었고 일본은 경계감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한국을 끌어들여 미국과 일본을 자극하자는 것이고 이런 목표는 결과적으로 대박을 터드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 이유는 수교 이전에 누구나가 수교를 위한 분위기로 거론했던 것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니였다. 대만언론들은 결국 니제르에서의 작은 승리가 한국을 예상보다도 빨리 잃는 큰 패배를 맛보게 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1998.01.25)
대만인들은 대륙적이 아니었다
1992년 12월 23일 홍콩의 야경이 바라다 보이는 한 호텔에서 이상옥(李相玉)외무장관과 홍콩주재 한국특파원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22일 베트남과의 수교조인식을 마치고 귀국길에 홍콩에 들른 이장관이 특파원들을 저녁만찬에 초대하여 이루어진 자리였다.
‘북방외교’를 국시(國是)처럼 추진하였던 6공 정부의 하반기 외교사령탑을 맡았던 이상옥 장관에게 1992년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이 있는 한 해였을 것이다. 냉전시기 적으로서 피를 흘리며 싸우기까지 했던 중국과 베트남과의 수교를 4개월 간격으로 잇달아 이룩함으로써 ‘냉전의 최전선 국가’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국제무대의 활동공간을 질적으로 양적으로 대폭 넓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퇴임을 앞두고 있는(18일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 당선) 이 장관이었지만 상당히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홍콩의 분위기도 곁들여져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대만단교 당시의 이야기가 화제에 떠올랐다. 당시 대만에서 취재했던 한 특파원이 단교 당시 박노영(朴魯榮)대사가 겪었던 곤욕을 이야기하며 박대사의 근황을 물었다.
이 장관은 “당시 박 대사가 무척 고생을 했지요. 그래서 가톨릭신자인 본인의 희망도 있고 해서 교황청 대사로 발령을 내려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장관은 “대만 사람들 당시 박 대사에게 너무 심하게 대우했지요. 대만사람들 이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국사람들 기질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장관에 따르면 대만과 홍콩언론들이 8월 20일부터 한국이 중국이 수교에 합의하고 이에 따라 한국이 대만과 단교할 방침이라고 ‘정확하게’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박 대사를 통해 이 같은 한국 측의 입장을 사전 통보받은 대만당국이 이를 언론에 흘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공식적 발표에 앞에 비공식적으로 대만에 단교방침을 통보한 것은 대만과의 특수한 관계를 감안한 최소한의 예의표시였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대만당국은 국내정치적인 목적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정부의 방침을 확인해줄 수 없는 박 대사를 ‘허수아비 대사’ ‘특명전권대사의 자격이 없는 대사’운운해가며 인격적 모독을 가하며 몰아붙인 것은 소위 중국인들에 대해 지녀왔던 ‘대국인’인상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 장관의 말을 듣고 보니 당시 대만 대사관의 외교실무진이 한사코 특파원들과 박 대사와의 직접 대면을 막았던 것이 떠올랐다.
박 대사는 단교행사를 끝마친 뒤 특파원들과 점심식사를 가지려했으나 이마저도 안전을 이유로 취소됐다. 이처럼 외교실무진이 대사와 특파원들과의 접촉을 애써 차단한 것은 ‘단교방침 사전통보’와 같은 외교적 비밀이 박대사의 입을 통해 튀어 나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사는 단교 당일 대사관에서 있은 기자회견에서도 ‘사전 통보 받지 못했다’는 공식입장을 되풀이했으나 ‘그간 참을 수없는 경우를 당하기도 했다’며 소회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중국과의 수교에 급급한 나머지 대만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소홀했다는 한중수교 이후 줄곧 제기되어 왔던 비판을 의식한 자기변병의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모임은 구태여 그 것을 문제 삼자는 분위기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국인답지 못한 대만인’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9월 중순에 있었던 김재순(金在淳)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고위 민간사절단이 대만을 진사 방문했을 때 당한 박대와 수모가 화제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대만 현지로 가 이를 취재했던 최창국(崔昌國) 매일신문 특파원에 따르면 수모는 사절단이 9월 15일 대만 땅을 밟으면서 시작되었다.
사절단이 전직 국회의장과 정일권(丁一權) 전 총리 등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공항당국은 이들의 귀빈실 이용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사절단의 면면은 둘도 없는 친(親)대만 인사들로 특히 김재순 단장은 8월 24일에 있은 주한 대만대사관에서의 하기행사에 우리 측 고위인사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했다.
대만과 관계가 깊은 인사가 수백 명이었겠지만 모두들 향후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 주한 대만대사관의 마지막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 전 국외의장의 이 같은 처신은 신의‘를 중시한 것으로 극히 예외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정일권 전 총리는 하와이에서 신병치료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절단에 참가했다. 대만입장에서는 ‘귀빈’일듯 싶었는데 환영의 꽃다발 대신 수모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김 단장은 출입구가 봉쇄된 귀빈실 입구에 서서 도착성명서를 읽어야했다. 한 해 뒤 재산파동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를 은퇴하면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를 회자케 한 김단장의 성명서는 춘추전국시대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의 고사를 인용하며 시작되었다.
“부형청죄(負荊請罪 : 스스로 형구을 짊어지고 사죄하다)의 심정으로 대만을 찾았다”고 운을 뗀 뒤 김 단장은 불가피하게 대만과 단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의 처지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품격을 갖춘 정중한 성명서였지만 문전박대로 그 빛이 바래도 한참 바랬다.
사절단의 수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6일 진수지(金樹基) 전주한대사는 사절단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와 ▲ 새로 신설될 대표부에 정식국호와 국기사용 ▲ 양국정부간 체결된 기존의 모든 조약유지 ▲ 한국 내 대만 재산권 보장 ▲ 화교에 대한 기존 입장유지 등 4개항을 주요 내용으로한 합의서를 제시하며 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 단장은 ‘사절단이 민간차원에서 구성됐다’는 이유를 들며 서명을 거부했다. 민간차원의 사절단이라는 점도 물론 있었지만 정식 국호와 국기사용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 한중수교 기본원칙과 정면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도저히 서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대만 외교부는 첸푸(錢復)외교부장의 만찬초청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약속시간 불과 1시간여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로 예정된 리덩후이(李登輝) 총통과의 면담도 자연 취소되었다.
김재순 단장은 김영삼(金泳三) 당시 민자당 총재의 친서를 전달하지 못한 채 귀국해야했다. 대만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애초부터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고 또 그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미리 예정된 만찬을 취소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옹졸한 처사가 아니냐는 것이 그날 모임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민간외교사절단에 대한 박대와 수모에는 진수지 전 주한대사의 개인적인 좌절감도 다분히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진수지 대사는 한국과 중국 접근으로 대만의 외교활동입지가 날이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에서 한국에 부임했지만 수세적이었던 전임들과는 달리 부임이후 공세적이며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폈다.
한국사회의 각계각층과 접촉하여 중국수교 시기 상조론과 대만단교 불가론의 여론을 조성하는 등 활발한 공세적 외교활동에 대해서는 이상옥 장관도 높이 평가했다.
1992년 초 대만당국이 명동의 대만 대사관이 한중수교후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화교에게 싼 값으로 매각할 방침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언론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소문은 수교에 관한 한중간의 외교접촉 진척상황과 대만단교에 대한 한국민들의 여론을 살피기 위해 진대사가 띄운 애드벌룬이라는 추측이 높았다.
진수지대사가 이렇게 적극적인 활동을 편 배경에는 국익을 지킨다는 측면과 함께 개인적인 이해도 작용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유력한 차기 외교부장 후보였던 진 대사는 ‘예정대로’ 자신이 외교부장이 되는 길은 주한대사로 있는 동안 한중 수교를 저지시키는 길이라는 생각에 그처럼 열심히 뛰었다는 것이다.
진수지 대사는 한국대사로 내정된 뒤 한동안 자신을 무덤으로 내모는 것이라며 반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위기는 기회라는 생각에 한국대사직을 수락하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전화위복을 삼으려 했다.
이 때문에 임기만료를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한중수교는 그동안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외교부장의 꿈을 앗아가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만을 위한 변명도 있었다. 한중수교를 전후 대만이 옹졸하고 속좁게 보일정도로 한국을 비난한 것은 한국을 잃은 상처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는 이상으로 큰 것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한국의 상실로 아시아국가인 대만은 아시아에서는 단 한 곳과도 수교를 하지 못한 상태에 빠졌다. 한 곳이라도 수교국가가 있는 것과 하나도 없는 것이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의 차이는 크다.
한국의 상실로 대만은 또 국제적 외교활동공간을 상실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다른 주요 지역에서의 대만외교관은 미수교국의 외교관인 관계로 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한 대만대사는 어였한 수교국의 대사이기 때문에 각종 외교행사와 모임을 통해 주요국가의 외교관들과 자연스레 접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 주요 국가의 대사관이 주재하고 있는 한국이야말로 대만이 전방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 명동의 주한대만대사관은 실질적인 대만의 외교부이자 주유엔대사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고 주한대사를 외교부장을 가는 코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대만은 또 한국이 대만의 ‘쌍중외교’의 입지를 강화시켜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국가로 간주한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에 따른 단교가 불가피하더라도 대만 국호사용허용 등의 ‘반대급부’를 주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민간사절단에 서명을 강요한 것은 한국이 아닌 다른 어느 나라에서 그 같은 목적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정부에 대한 배신감은 더욱 컸는지 모른다.
대만이 한국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음은 단교 당일에 벌어진 한 한국 유학생에 대한 폭행사건에 대한 언론보도 자세에서도 드러났다.
중국어 연수차 대만에 온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어과 3학년 김진우(21)군은 24일 밤 타이베이(臺北)시 거리에서 대만청년 4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 전치 4주의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 사건을 하루 뒤에 알게된 한국기자들은 ‘한국유학생이 대만단교에 불만을 품은 대만학생들로부터 폭행당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국립사범대학 부속 중국어 연수센터 부근이었고 또 김군이 한국인 학생과 우리말로 이야기하던 중이었던 정황증거로 보아 폭행이 단순 폭행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폭행이 있었던 그 무렵 우리말을 들은 한 운전기사의 승차거부를 당한 것도 그같은 기사작성의 한 배경이 되었다. 이들 기사는 서울의 도하 각 신문 사회면에 크게 취급되었다.
문제는 이후 대만 언론들의 반응이었다. 대만언론들은 한국언론 보도 이후 이 사건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가며 취급했는데 전체적인 논조는 한국학생에 대한 폭행이 반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 폭행사건이라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연일 반한무드를 고취하던 것과는 영 정반대의 자세였다.
대만 언론의 그러한 보도태도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고자하는 대만인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단교하기는 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대만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일련의 대만 당국의 행동은 결코 당하는 입장에서는 유쾌할 리 가 없었다. 그러나 역지사지(易之思之)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상호 실리를 쉽게 복원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로 상대방의 감정의 골을 파이게 한 우리외교의 세련성 부족이다.
대만대신 더 큰 이익을 주는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으나 우리 입장에서 최선의 상태는 중국을 얻고 대만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일본 아니 싱가포르가 그 같은 목표를 성취한 마당에 우리라고 못할 바는 없었다.
대만과의 단교 6년째인 1998년에도 양국관계는 불편한 상태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다. 1997년에는 대만이 북한에 핵폐기물을 판매하는 문제로 양국 관계는 험악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1998년 초 양국관계의 현주소는 이해 1월 20일 연합통신 짤막한 기사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서울=연합] 한국과 대만은 지난 16일 타이페이(台北)에서 과장급 접촉을 갖고 과일 등 농수산물의 수출문제와 항공회담의 재개 방안 등 실무 현안을 논의했다고 외무부가 20일 밝혔다.
외무부 관계자는 ‘한국과 대만은 16일 과장급 접촉을 갖고 실무현안들을 논의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고 밝혔다” (1998. 2.03)
덧붙임 : 한중수교의 여파로 단절된 한국과 대만의 직항 항공노선은 한중수교 12년 뒤인 2004년 9월 1일에 복구됐다.
▶ 한-대만 항공노선 12년만에 재개 2004/09/0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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