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3/29 22:03



[今天歷史-8월5일] 미국 중국백서 발표

중국 여객기 한국 비행정보 구역 첫 통과, 미-베트남 수교, 먼로와 버튼 타계, 남한 46개 언론사 사장단 방북, 판문점서 포로 교환 개시, 한국 첫 인공위성 무궁화호 발사 성공

미국 국무부가 1949년 8월 5일 발표한 '중국백서(The China White Paper)'는 아편전쟁 직후 1844년 체결된 미-청 간망하(望廈) 조약부터 1944∼49년 대중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관한 엄청난 양의 외교 기밀문서와 공표자료를 편찬한 것으로 100여 년에 걸친 미중 관계사 총괄이자 중국 공산화라는 당면한 미국의 실패에 대한 자기비판이자 변명이기도 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중국 백서는 "미국에 의존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국내적 우위를 지키는 것만을 기대했던" 국민당 정권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중국 내전의 불길한 결과는 미국 정부의 통제범위를 넘은 것"이라고 서술하여 미국의 대중국 정책 실패를 인정함과 함께 국민당 정권의 포기를 사실상 선언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대만 이전이라는 역사 전환을 목격한 직후인 1950년 1월, 트루먼 대통령이 성명에서 대만 국민당 군대에 군사원조를 하지 않을 것과 대만은 중국 일부임을 언명한 것은 '중국백서'의 이러한 기조 연장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달에 발표된 '애치슨 라인'은 대만을 한국과 함께 미국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함으로써 '트루먼 독트린'을 구체화하였다.

미국은 이미 유럽에서 전개되고 있던 미소냉전 속에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문제를 축소시키려고 생각한 것이며, 오히려 주적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중국공산당 정권을 중립화시키고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른바 '마오쩌둥(毛澤東)의 티토화' 전략이었다.

1973년 1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는 1949∼50년에 걸친 미중 관계 조사연구 보고를 공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트루먼 정권은 '중국백서' 발표를 전후한 시기부터 중국을 승인해야만 한다고 결론짓고 있었고, 중국 공산당도 이에 관심을 표명, 1949년 5∼6월에 당시 베이핑(北平 : 현 베이징)에 주재하던 미국 스튜어트 주중 대사와 후에 중국 외교부장이 된 그의 제자 황화(黃華) 간 비밀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스튜어트-황화 간 비밀교섭은 애치슨 국무장관의 지시에 의해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마오쩌둥도 소련으로 기울어졌지만, 이러한 사실은 전후 미중 관계사에 있어서 극히 의미심장한 사건이며 22년 뒤인 1971년 헨리 키신저 박사의 대중 비밀 외교 선례가 되었다.

중국은 1949년 7월 마오쩌둥의 유명한 논문 '인민민주주의독재에 관하여'에서 소련 지향을 선언한 이후 친소노선을 걸었다. 국공내전 당시 미국의 적극적인 국민당 정권 지지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 발표와 애치슨 라인 공표라는 노골적인 대중 추파를 던진지 불과 1개월 뒤인 1950년 2월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이 '중국의 티토화'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였다.

[今天歷史-2월 14일] 중소상호원조조약, 蘇 20차 당대회 2006/02/14 14:14

미국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인 J.R. 매카시가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100여 명의 외교관들을 추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매카시즘 선풍'의 불을 지핀 시기도 바로 1950년 2월이었다. 조약 체결로 가시화한 중소 밀착이 뇌관구실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인식과 미국 내 강경 반공 분위기는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원자폭탄 독점 지위를 상실한 상황과 맞물려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이 '중국 백서'의 정신에서 근본적으로 전환, 그동안 유럽에 국한된 '봉쇄정책'을 아시아에도 적용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1950년 4월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인 'NSC 68'은 미국 정책이 '중국의 티토화'를 기대한 중소 이간책으로부터 반공주의 일환인 '중국 봉쇄정책'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해 이해를 보였던 국무부의 스틸웰 그룹과 자유주의적인 중국학자가 '용공파'라 하여 직책에서 추방된 것도 트루먼 정부의 대아시아 정책이 중국 인정에서 거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1950년 6월 발발한 6·25는 아시아와 중국에 대한 미국정책의 전환을 되돌릴 수 없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과 반년 전 '트루먼 독트린'의 정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갑자기 장제스 정권 지원으로 재전환하였으며, 미국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진주시키고 이어 한국-일본-오키나와-대만-필리핀을 잇는 이른바 반공전선이 형성되었다.

한편 중국은 1950년 10월 의용군이라는 명분으로 군대를 북한에 파견하고 동시에 '항미원조(抗美援朝)'와 '대만 해방'을 슬로건으로 한 전국적인 반미투쟁을 전개했다. 이로써 1971년 미중 접근의 막이 열릴 때까지 미중대결의 원형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결국 미국 민주당 트루먼 정권의 '중국 백서'는 미국 외교의 '가지 않은 길' 이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 길은 1971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정권 하의 헨리 키신저가 밟는 길이 되었다.

1983년 = 중국 여객기, 한국 비행정보 구역 첫 통과.

이는 이해 5월에 있은 중국 민항기의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 6명의 중국인 납치범은 승무원에게 총상을 입히고 조종사를 위협해 항로를 한국으로 돌렸고 춘천에 불시착했다.

이에 중국은 총33명으로 구성된 공식 대표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이는 중국과 한국 간 첫 공식 접촉이었다. 이후 한중 양국은 원만한 협상 과정을 거쳐 항공기와 납치범을 제외한 승객 및 승무원 모두를 중국으로 송환했다.

한편 대만으로 인도된 납치범은 반공의사 대접을 받고 거액의 포상금을 받았으나 이들 중 2명은 나중에 사업가를 납치,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러 극형에 처해졌다.

중국민항기 前납치범 卓長仁-姜洪軍 사형집행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과 베트남이 월남 패망 후 20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1995).
8월 5일은 미국의 여우 마릴린 먼로와 영국의 배우 리처드 버튼의 기일이다.

먼로는 화려했지만 불행한 여인으로, 버튼은 재능을 꽃 피우지 못한 아까운 배우로 생을 마쳤다. 각각 1962년과 1984년에 사망했으며 향년은 먼로가 34세, 버튼이 58세였다.

마릴린 먼로 전 남편인 왕년의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는 먼로의 죽음과 관련, 생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등 케네디 형제에 대한 의구심과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버리지 않았다.

한편 로렌스 올리비에 뒤를 잇는 세익스피어 전문의 뛰어난 연극배우 출신인 버튼과 관련, 마리네 디트리히는 버튼이 돈을 위해 3류 영화에 출연하도록 망쳐놓았다는 이유로 버튼의 전 부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한 바 있다.

버튼은 남편과 딸을 버리고 자신에게 달려온 비비안 리를 버렸던 올리비에와는 달리 엘리자베이스 테일러에 집착함으로써 배우로서 그의 인생을 탕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리즈를 계속 잡아들 수 없었다. 버튼은 리즈와 두번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했다. 리즈는 2011년 향년 79세로 사망했는데 눈을 감기 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리처드 버튼이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떠돌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지 않은 '전설'이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파괴하면서까지 한 여인을 사랑한 불행한 남자에 대한사후에 바쳐진 선물로 파괴되어서는 안될 전설이기 때문이다.

한국사 속의 오늘

한국 46개 언론사 사장단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방북했으며(2000), 판문점에서 포로교환이 시작되었다(1953).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 ‘무궁화’호가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서 발사에 성공했다(1995).

2014/08/0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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