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8/03 22:47



[今天歷史-1월15일] 쭌이 회의, 천두슈의 德선생

1935년 1월 1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구이저우(貴州)성 쭌이(遵義)에서 개최됐다.

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배권이 확립되었고 농촌 중시, 농촌에 의한 도시 포위전략 등 마오의 군사전략이 당 노선으로 채택되었다.

쭌이회의는 쭌이시 피파차오(琵琶橋 : 쯔인루<子尹路>로 고쳐졌다가 다시 훙치루<紅旗路>로 바뀌었음) 동측 87호의 구이저우 군벌 사단장 바이후이장(柏輝章)의 공관에서 열렸다. 이곳은 장정(長征) 길에 오른 홍군이 쭌이를 점령한 이후 중앙 군사위원회 및 홍군 총사령부 본부로 사용해오던 곳이다.

쭌이 회의에 참석한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천윈(陳雲), 장원톈(張聞天 : 뤄푸洛甫), 친방셴(秦邦憲 : 보구博古), 류샤오치(劉少奇), 왕자상(王稼祥), 덩파(鄧發), 허커취안(何克全 : 카이펑凱豊), 중앙비서장 덩샤오핑(鄧小平), 홍군총부 및 각군단 책임자 류보청(劉伯承), 리푸춘(李富春), 녜룽전(聶榮臻), 펑더화이(彭德懷), 양상쿤(楊尙昆), 리줘란(李卓然), 린뱌오(林彪), 코민테른 파견 군사고문 리더(李德 : 독일인 Otto Braun)과 통역 우슈취안(伍修權)이었다.

회의 의제는 ‘반(反) 제5차 (국민당) 포위공세(圍剿) 이래의 경험과 교훈'이었다. 먼저 소련공산당 영향 하의 코민테른이 양성한 28인 볼세비키의 한 사람으로 당 지도권을 장악하던 보구가 총괄 보고를 했고 이어 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저우언라이가 군사부문에 대한 보고를 했다.

보구가 반(反) 5차 포위공세를 지도한 지도부의 노선과 정책에 대해 변호를 한데 반해 지도부 일원이던 저우언라이는 지휘 책임을 물어 보구를 비판했고 독일인 코민테른 파견 군사고문 리더의 전략지도에 착오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리더가 국민당 포위 공격에 진지전 전술로 맞서도록 지도하였고 이는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어 홍군이 장정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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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는 아울러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도 했다. 이어 그는 반 5차 포위공세의 경험에 비추어 마오쩌둥에 군사지도권을 맡길 것을 제안했다. 마오의 전략노선에 따라 홍군을 지도해야만이 홍군에게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장원톈은 좌경(左傾) 군사노선을 비판하는 보고를 통해 보구와 리더를 비판했다. 당시 정치국 위원이며 서기처 서기였던 장원톈의 비판은 군사지도권의 향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원톈의 보고 후 마오쩌둥의 장시간 연설이 있었다. 그는 군사노선 상 좌경 모험주의가 범한 잘못을 비판했다. 그는 4차까지의 반 포위공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보구가 5차 반 포위공세를 변호한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회의 참석자 대다수가 보구와 리더를 비판했다.

정치국 확대회의는 중앙서기처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개편을 결정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오쩌둥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하고 보구와 리더의 최고 군사지휘권을 박탈한다. 장원톈으로 하여금 보구가 맡은 당 중앙 총책임자의 지위를 대신하게 한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군사부문을 담당토록 한다(뒤에 마오를 수장으로 하고 저우언라이와 왕자상이 참여하는 3인 군사지휘 소조가 조직되었다).

쭌이회의는 '28인의 볼세비키의' 최고 지도자인 왕밍(王明)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에 의한 당 중앙 통치를 종식시키고 마오쩌둥이 홍군과 당 중앙의 영도적 지위를 확립한 회의였다.

중국공산당은 쭌이회의가 독립 자주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본원리를 운영하여 자신의 노선을 확립한 첫 번 째 사례라고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노선 전환으로 홍군은 패배를 딛고 승리했으며 2만 5,000리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19년 = 천두슈(陳獨秀)가 ‘신청년(新靑年)’의 <본지죄안첨변서(本志罪案簽辨書)>라는 글에서 ‘덕선생(德先生 : 민주)’과 ‘새선생(賽先生: 과학)’을 중시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덕선생’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공교(孔敎), 예법(禮法), 정절(貞節), 구윤리(舊倫理), 구정치(舊政治)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새선생’ 옹호하기 위해서는 ‘구예술’, ‘구종교’를 배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천두슈는 ‘덕선생’과 ‘새선생’을 옹호하는 길만이 중국을 구원할 구 있다고 강조했다.

이로부터 70년 후인 1989년 천안문 광장 시위 때 학생에 의해 ‘덕선생’을 적은 플래카드가 다시 등장하였다. 그러나 천두슈의 덕선생이 사회주의 민주였다면 천안문 광장의 덕선생은 당시 광장에 세워진 민주여신상이 상징하듯 서구 민주주의였다.

2015/01/15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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