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10/26 01:26



[今天歷史-5월20일] 리펑 총리 베이징에 계엄령

마오쩌둥 강경 반미 성명 발표, 국부군 대만에 계엄령, 영국군 포클랜드 상륙, 린드버그 대서양 항공기로 첫 논스톱 횡단 비행, 콜럼버스 사망, 미 국무부 남한서 미군 철수 발표, 한국 국회 프락치 사건, 한국 정부 야간 통금 재개

1989년 5월 20일 리펑(李鵬) 총리가 베이징(北京) 지구 일원에 대해 계엄을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계엄 실시를 반대했던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사실상 이때 실각한 것이다.

이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촉발된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 시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중국 방문기간 격하하였다.

천안문 광장을 장악한 시위대들 때문에 인민대회당의 고르바초프 환영식에 참석했던 중국 지도부는 뒷문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계엄령 선포후 베이징 시내로 진주하는 계엄군에 학생 등 시위대가 인간방패로 맞서 계엄실시를 지체시키자 중국 지도부는 결국 6월 4일 이들을 유혈진압, 비극적인 6 · 4 사태가 벌어졌다.

중국은 이해 3월 7일 중국이 시짱(西藏) 자치구로 부르는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했다.이는 공산 정권 수립 이후 첫 계엄령 발동이었다.

이로부터 만 3개월을 사흘 앞두고 수도 베이징 일원에 대한 계엄령 실시를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티베트에 대한 계엄 선포는 티베트인들의 독립 시위 때문이었고 베이징 일원에 대한 계엄 실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둘다 공산중국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의 계엄령이 가 당정군의 일치된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던 반면 후자는 당정군이 분열한 가운데 이뤄졌다.

리펑은 두 개의 계엄령 실시에 모두 주도적이었다. 그는 공산 혁 명 과정에서 참수 처형으로 생을 마친 중국 공산 혁명 열사 가 생부였고공산 중국 건국 이래 죽을 때까지 총리를 역임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였다. 그는 '태자당'의 '태자당'이었던 셈이다.

리펑은 공산중국이 최대 위기 상황에서 초강경 정면 돌파 대응에 선봉에 섰다.

리펑은 공산 중국이 위기 국면을 벗어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음에도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는 오르지 못햇다. 최고 지도자에게는 '통합'의 이미지를 갖출 것이 요구되는 데 리펑은 이를 결여한 것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리펑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아래서 '실세 총리'로 군림했으나 권력 서열 2위의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1949년= 대만성 주석 겸 경비총사령관 천청(陳誠)이 대만 전성에 대한 계엄을 선포했다. 국공 내전 패배가 확실시 되는 가운데 시작된 이 계엄은 장기간 지속되었다.

역사상 전례없이 장기간 지속한 대만의 계엄은 1987년 7월 장징궈(蔣經國) 총통에 의해 38년 2개월 만에 해제되었다.

1970년 = 마오쩌둥(毛澤東)이 ‘전세계 인민들이 단결하여 미국 침략자 및 그 주구들을 타도하자’라는 제목의 강경한 반미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이해 4월 30일 미국과 남부 베트남 군 7만 명이 북부 베트남군의 남부 베트남 침입 루트로 활용돼온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북폭을 재개한데 대한 반응이었다.

당시 캄보디아 공격을 명령한 닉슨 미 대통령의 목적은 북 베트남이 군사적 승리의 기대를 접고 평화협상에 진지하게 임하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 성명에서 “무수한 역사적 사실은 명분을 얻으면 많은 도움을 받고 명분을 잃으면 도움을 적게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약한 나라도 강국을 능히 패퇴시킬 수 있으며 작은 국가도 대국을 패배시킬 수 있다. 작은 나라의 인민이 투쟁에 나서 무기를 집어 들고 자신의 국가의 운명을 지키려 든다면 반드시 대국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의 법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닉슨과 마오는 이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72년 2월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해후를 하고 미중 화해를 통한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의 물꼬를 텄다.

미중 화해 가 본격화하는 배경 아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미군은 완전 철수했다. 이를 두고 당시 서벙 언론은 미군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라고 표현했다.

닉슨 방중 3년 뒤 캄보디아에 이어 남부베트남이 ‘도미노가 쓰러지듯’ 공산군의 공격에 잇달아 무너졌다. 마오의 반미 성명이 나온 지 채 5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오의 성명 발표 다음 날 베이징에서는 5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미군과 남 베트남군의 침공에 호응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론놀 장군에 의해 축출된 캄보디아 국가원수 시아누크 공도 참석했다.

>새걔사 속의 오늘영국군이 포클랜드(아르헨티나 명치은 말비나스)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했다(1982). 이해 4월 2일 발발한 포클랜드 전쟁이 끝내기 수순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포클렌드 전쟁은 이해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영국 대처 총리의 정권이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고 아르헨 군사 정권은 붕괴됐다. 쿠바가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 공화국으로 독립했다(1902).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망했으며(1451-1506),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파리 간 대서양을 논스톱 단독 비행하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1927).

한국사 속의 오늘 : 미 국무부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으며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김약수(金若水), 이문원(李文源) 의원이 구속됐다(1949). 이해6월 미군은 한국에서 모두철수했고 그 1년 뒤 북한의 남한 침공, 즉 6.25 사변이 일어났다.

정부가 야간통행금지를 부활했다(1962).

2015/05/2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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