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고독 이한응 '한국사 속의 오늘' 5월12일자 대목을 업데이트하면서 1905년 영국에서 순국한 이한응(李漢應) 열사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필자가 이한응 열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문학 종합 월간지 '문학사상'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잡지는 책 첫 머리의 사진 화보에서 영국 공사로 있던 시기 그의 근영을 싣고 외교권 상실에 비분강개하여 순국했다는 내용의 설명을 붙였던 것 같다. 이후 이한영 열사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않아 지금까지 을사늑약 직후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의 뒤를 따라 순국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에 관한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그는 1905년 을사 순국열사 중 가장 먼저 순국한 이였다는 사실과 함께 러일전쟁 기간 영국에서 2차 영일동맹 저지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했던 상세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이한응 순국 110주년이 되는 지난해에는 그에 관한 학술 세미나가 열려 묻힌 많은 일화와 자료가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상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이한응의 자결 뉴스를 전하면서 당시 영국 한 신문사는 "명예로운 고독" 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한응의 존재를 처음 내게 알려준 '문학사상'은 그 무렵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의 한반도 현실을 생각해보면 이한응의 그 '명예로운 고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대국의 권력 다툼 속에 당당하고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인 이한응의 '영광스런 고독'을 상세히 살펴보자. 1905년 5월 16일자 영국 일간지 던디 이브닝포스트 5면에 ‘창가의 얼굴-한 외교관의 비극적이고 명예로운 고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매일같이 공관 위층 창가 커튼 뒤에 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조국을 생각하며 몇 시간씩 그 자리를 지켰다.” -중앙일보 2015년 8월12일 자 111년 전 인 1905년 5월12일 영국 수도 런던에서 극동 약소국의 한 젊은 외교관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런던은 신흥 독일 제국의 거센 도전과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전통 대륙 강국 러시아 제국의 압박을 받고 있으나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세를 지키고 있는 대영 제국의 수도였다. 세계 중심이었다. 젊은 외교관은 망국의 카운트다운이 시작한 대한제국의 주영 서리 공사 이한응(李漢應) 이었다. 1874년 10월 30일 생이니 만 30세였다. 그로서는 필연적으로 맞게 될 것으로 예상한 조국의 망국 운명을 앞두고 차마 무력하게 이를 지켜 볼 수 없어 창창한 미래를 버린 순국이었다. 그의 유서 다음 대목은 '순국' 결단의 심정을 피를 토하듯 드러낸다.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 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영국이 자국의 인도 지배권과 한국 지배권을 맞바꾸는 2차 영일(英日)동맹에 관해 일본과 합의하고 그 초안을 5월 10일 교환한 사실을 알게 된 이한응은 대한제국 대표로서 영국 외상에게 11일에 면담할 것을 요청했으나 회답이 없자 목욕 재계를 하고 '국가와 민족에 고하는 유서'와 '고국의 큰형과 부인에게 남기는 '유언장'를 작성한 뒤 독을 마시고 자결한 것이다. 총성 없는 전쟁인 외교전에서 국운이 걸린 싸움을 패배한 것이 분명해지자 중과부적과 세불리를 변명하지 않고 최전선의 수장으로서 죽음으로써 책임을 진 것이다. 선비의 기개와 장수의 자세를 함께 보였다 하겠다. 이한응은 '죽는 날까지 아니 죽음의 순간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외교전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이한응은 영국과 일본 간 2차 영일동맹 초안을 교환한 당일 그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죽기 직전 암호로 된 전문을 파기했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에게 알려준 2차 영일동맹 초안 내용일 것으로 추정한다. 초안에는 '일본이 한국에서의 정치, 경제, 군사상 지도감독 및 보호 등 조치를 취하는 권리를 영국은 인정한다' 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한응은 이 같은 내용을 본국으로 즉시 발송함과 함께 이를 항의하기 위해 영국 외상에게 면담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한 것이다. 2차 영일동맹 조약은 이해 8월12일 체결됐는데 이는 이한응의 순국 3개월 뒤 일이다. 이한응은 주재국의 최고급 기밀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이처럼 '딥스로트'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이에 바탕한 비전 그리고 불요불굴한 외교 활동으로 영국 외무성 내에 우군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외무성 관리 외에도 이한응의 영국인 후원자 중에는 '푸른 옷소매 환상곡'의 작곡자 랠프 본 윌리엄스( 1872~1958) 도 있었다. 영국 근대 국민 작곡가로 꼽히는 그의 집안은 이한응을 비롯한 주영 한국 공사관원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을 보살펴 주었으며 이한응이 승산없는 외교전으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졌을 때 그의 저택에서 요양할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이한응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에서 2년간(1889~1891) 재학하며 영어를 배웠다. 영어를 익힌 뒤인 1894년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그는 전통학문과 근대 지식을 두루 섭렵했으며 한문과 영어에 두루 능통한 당시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만큼 드문 인재 중 한 사람이었다. 이완용(1828~1926), 윤치호(1865~1945)와 이승만(1875~1965)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한응은 순국 4년 전인 1901년 영국과 벨기에 2개국 공사관의 역할을 하는 런던 공사관에 3등 참사관으로 부임하여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다. 27세 때였다. 영국 및 벨기에 겸임 공사는 민씨 척족인 민영돈(1863~1918)이었다, 그는 앞서 미국 주재 공사를 역임하고 이해 런던에 부임했다. 이한응이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의 영어 실력이 발군이었던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는 육영공원이 문을 닫은 뒤 설립된 한성 영어 학교의 교관으로 1899년부터 2년간 영어를 가르치다가 주영 공사관 참사관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이한응은 런던에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런던 부임 2년 뒤인 1903년 10월에 정3품 통정대부로 특별가자(승진)되었는데 이는 국정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당상관이 되었다는 의미다. 다음해 1월 초 귀국한 민영돈의 후임으로 서리 공사가 되었던 것도 그가 '낭중지추(囊中之錐)'였음을 뒷받침한다. 불과 '이립(而立)'을 막 지난 나이에 세계 최강국의 수도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공사에 올랐지만 이는 광영이 아니라 독배였다. 1년 4개월 뒤 영국 외상 면담 기회마저 막힌 다음날 곧바로 독을 마시고 자결한 것을 보면 그는 품에 독을 지니고 '사즉생'의 각오로 외교전에 임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한응이 영국 서리 공사가 된 때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가 8년간의 외교대립을 벌여온 끝에 언제라도 열전을 벌일 단계에 진입한 즈음이었다. 이한응은 지체 없이 공사로서의 활동을 개시했다. 러일전쟁 발발 채 1개월을 남겨 두지 않은 시점인 1904년 1월13일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분석에 관한 10쪽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극동정세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일전쟁은 다음달 초인 2월8일 일본 연합함대가 중국 청나라 뤼순 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됐으나 당사국인 러시아는 물론 서구 어느 열강도 이 시점에서 그처럼 빨리 전쟁이 터지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한응은 영국 정부가 극동,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망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이한응은 약소국의 외교관으로서 강대국에 도와줄 것을 애원하는 '걸사(乞師)'의 자세는 아니었다. 　 영국 외무성 에 보관 되어 있는 메모 사본에서 이한응은 세계정세를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를 네 꼭짓점으로 하는 사각형 구도로 묘사했다. 이런 국제 정세 분석 바탕 위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힘을 합쳐 러시아와 일본을 상호 견제하는 안정된 3각 구도를 만들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 보장은 필수다.”라고 강조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아시아 팽창에 중국에서 영국의 이권과 인도 지배이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고 판단, 1902년 일본과 손을 잡았다. 영국이 전통적인 '영광스런 고립정책'을 포기한 것이다. 1차 영일동맹이었다. 그러나 전쟁 시 상호중립을 지킨다는 것으로 영국 입장에서는 아직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이한응은 영국의 이 선택이 한국의 지정학적 입지를 불안하게 할뿐만 아니라 영국의 장기적 이익에도 배치된다는 논리를 펴기 위해 일본과 러시아 간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자신의 국제 전략적 구상을 영국 외무성을 통해 영국 최고 의사결정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변방 소국, 그것도 약소국의 신참 젊은 서리 공사였기에 아마도 상대방은 바둑으로 치면 좌우변 수싸움의 형세 판단 조언 정도를 기대했을 수 있다. 그런데 판 중앙을 겨냥한 우주류의 포석을 내놓으니 일단 괄목상대했을 것이다. 외교 무대에 발을 들여 놓은지 불과 수년 만에 국제 정세에 대한 예리한 분석에 그치지 않고 미래지향적 새로운 국제 질서 패러다임에 부응하는 독자적이고 참신한 외교 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조선책략'의 중국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을 연상시킨다. 조선책략은 1880년 일본에 온 조선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에게 중국 청나라 주일 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이 작성하여 귀국하기 전에 건넨 소책자로 이 책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 일본, 청나라가 펼쳐야 할 외교를 포괄적으로 언급한 다음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連美)’였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등거리 자세를 갖추고 독자적으로 이것이 힘에 부치니 미국과 연계하라는 구상으로 요약된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중화적 질서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동북아 역학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새로운 국제 정세에 부응한 새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구상이었다. 1877년에 일본에 부임한 황준헌은 3년 동안 국제 정세를 면밀히 살핀 뒤 이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동북아 질서 구상과 조선이 취해야 할 자세를 내놓은 것이다. 그때 황준헌의 나이는 32세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자적인 외교 구상이 없었기에 김홍집이 받아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은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서 외교정책 화두가 되었다. 그로부터 24년 뒤 나이, 외교관 경력과 직책 등 여러모로 황준헌을 연상하게 하는 이한응은 '조선책략' 보다 더 거시적이고 발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상을 대한제국의 대표로서 영국에 당당하게 제시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황준헌은 이한응과 같은 해에 죽었다. 그는 이한응이 순국하기 1개월 2주전인 3월28일에 향년 57세로 타계했다). 이한응의 다원적 세력균형 구상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세력 균형전략과 맥이 닿으며 후대 미국 헨리 키신저의 다극화 전략과 연결된다. 여기에 약소국 대한제국을 균형추로 부각시킨 점에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 주의 씨앗이 어른거린다. 이한응의 이니셔티브에 부족한 것은 그 설계자가 대표한 나라가 소국인데다 국력이 약하다는 점뿐이었다. 그러니 이한응 구상은 묵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의 선택은 '영광스런 고립' 탈피와 아시아 국가 일본과의 동맹이라는 점에서 일단 이중의 '코페르니쿠스적 변신'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는 제국주의적 합종연횡의 패러다임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대로까지 거슬러 갈 수 있는 '파워 폴리틱' 게임 논리에 바탕을 둔 영국의 선택은 단기적 이익을 지키는 데 유효하였다. 그러나 이한응의 구상은 강국과 약소국이 조화롭게 상호 의존하는 다원적 세력균형 구상으로 영국이 1차 대전을 통해 혹독한 대가를 치룬 뒤 밟아나가야 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의 길을 시대를 앞질러 제시한 현대 국제 사회가 추구해나가고 있는 미래 비전이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후 이한응은 가시밭길 속에서 나 홀로 고난의 행군과 총성 없는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의 강한 압력으로 동료 외교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철수, '1인 공관원'의 신세가 된 그는 수모와 때로는 굴욕을 감내한 외롭고 울분에 싸인 외교 투쟁을 그러나 집요하게 전개했다. 러일전쟁 발발 뒤 일본이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듭하면서 이한응의 구상은 약소국 젊은 외교관의 주제 모르는 과대망상의 이상주의적 구상으로 간주 되어 휴지장처럼 취급됐다. 이한응은 이러한 불리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낙심하지도 주눅들지도 않았고 카운터파트의 무관심 대응에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당시 그의 카운터파트는 영국 외무성 동아시아국 담당차관보 프랜시스 캠벨과 동아시아국 서기관 내지 참사관급의 실무 담당자 월터 랭글리였다 1904년 1월13일 면담에서 그의 제안이 묵살당한 뒤에도 이한응은 거듭 면담을 신청했다. 일본이 연전연승하고 있음에도 이한응은 물러서지 않았다. 읍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 국익을 위한 구상이라고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서면으로 접수하라는 냉랭한 반응만이 돌아왔다. 영국 외무성 담당자는 그의 끊임없이 쏟아지는 면담 요구 편지에 "세상 물정 모른다"는 낙서까지 끄적거려 놓기까지 하였다. 1904년 8월22일 일본의 강압으로 1차 한일협약이 체결됐는데 이는 우리의 국제적 외교 활동 공간을 제약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제물포 항에 정박하던 러시아의 바랴그호 등 군함 2척을 격침하고 서울에 진입한 일본군은 한국 조정을 압박, 2월23일 한일의정서를 통해 강제적인 한일 공수동맹을 맺어 국외 중립 선언을 무력화하였다. 한반도를 징검다리 삼아 만주로 진입한 일본 지상군이 만주의 러시아군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체결된 1차 한일협약은 한국 정부가 일본이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두어 이들과 협의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외교 활동을 제약한 것으로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의 전 단계 조치다. 을사늑약은 2차 한일협약이다. 사실상 독립 외교권을 박탈당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이한응은 재외사절의 공동대책토의 계획을 세우고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호응하는 이가 없어 허사가 되었다. '영국의 외로운 1인' 이한응은 해외 공관원 중에서도 동지 하나 찾을 수 없는 '사고무친'의 외로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1904년 말 일본이 대한제국의 해외공관 인원을 줄이려 하는 행동에 나서자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에 “‘한국이 런던에 전권공사를 파견해주길 바란다’는 전문을 고종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캠벨은 “이 작은 음모는 한국 대표부를 강화하려는 기도”라며 코웃음 치며 일축했다. 1905년 2~3월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았으나 러시아 견제를 위해 정보 제공과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영국과 미국이 썰물처럼 물러나 관망 자세로 표변하자 완승을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이 평화조약 체결 논의에 들어갔다. 이한응은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할 것을 우려해 영국에 이를 막아달라는 각서를 전달했다. 최악이라도 피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국 외무성은 “당사국 간 교섭”이라며 거절했다. 서리공사로서 첫 업무를 시작한 1904년 1월13일부터 순국한 1905년 5월 12일까지 이한응의 행적 기록을 더듬다 보면 '시지프스의 도로(徒勞)'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한응이 영국에서 이처럼 굴러 떨어지기를 거듭하면서도 불퇴전의 자세로 시지프스의 바위 밀어올리기를 하는 동안 이한응과 마찬가지로 예리한 안목으로 세밀하게 국재정세를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이완용이었다. 1905년 두 사람이 순국과 매국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까지 둘이 걸었던 길은 너무도 유사다. 출생 지역과 가정 환경 그리고 공부한 내용까지 같다. 이한응은 경기도 용인 출생이고 이완용이 태어난 곳은 바로 용인 북쪽에 붙어 있는 경기도 광주다. 우봉이씨인 이완용은 친척에 양자가 되었고 전의이씨 이한응도 당숙에게 양자로 갓다. 이완용 24세 때에 대과에 합격했고 이한응은 20세 때에 소과에 합격했다. 둘 다 당시로서는 드물게최고 수준의 영어 교육을 받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두 사람 전통 학문과 신학문 모두에서 톱클래스의 수준에 올랐고 둘 다 외국 공사관 근무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고 특별한 경력을 지냈다. 이완용의 주재국은 20세기 초강대국을 예비하고 있던 미국이었고 이한응 주재국은 당시 최대 강국 영국이었다. 이완용의 이력을 살펴보자 1858년생으로 이한응보다 16세 연상인 이완용은 이한응의 육영공원 3년 선배였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이 설립된 해인 1886년에 첫 학생으로 선발된 관리 중 한 사람으로 영어 학습 능력이 동료 중에서 가장 출중했다고 그들을 가르친 미국 선교사 헐버트가 기록을 남겼다. 이완용은 1887년 주미 공사관에 참사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병이 들어 다음해 귀국했다. 그러나 고종의 특명으로 1888년 다시 워싱턴의 주미 공사관에 파견되어 1890년까지 체재했다 이 기간 중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을 키웠을 것이다. 귀국 뒤 이완용은 주미 공사관 근무자들의 모임인 정동 구락부에 가입, 친미파인 정동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청일전쟁을 전후 친청 수구파와 친일 개화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친러파와 손잡고 이들을 견제했다. 내무대신과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완용은 청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돌아 간 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던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8일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 직후 친일 세력의 적으로 간주되어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친일내각이 성립되면서 대신직에서 해임됐다. 이완용은 미국 공사관에서 일본과 친일 세력에 의해 사실상 감금된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빼내오려는 충생문 사건이 실패하자 친러파와 합세하여 1896년 2월11일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케하는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일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켰다. 김홍집은 고종의 환궁을 주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종로 저자 거리에서 명성황후의 시해에 분노한 민중에 의해 맞아 죽었다. 이완용은 친러 내각에서 외부대신·학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정계의 실세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무리한 이권 요구와 이에 반대하는 자신이 깊숙이 간여하여 친미 성향이 강한 독립협회의 급진적 개혁 요구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안팎곱사등 신세가 되어 1897년 말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됐다. 다음해 전북 관찰사로 전임되었으나 곧바로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독립협회에는 친미파뿐만 아니라 반러 친일 개화파 인사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된 서재필이 친일개화 세력의 권유로 귀국한 때는 아관파천이 이루어지기 2개월 전인 1895년 12월이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한 날은 그 다음해 1896년 4월7일이었다. 파천 이전이나 이후에도 조선은 진정한 '독립' 국가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자주를 상징하는 독립문을 짓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런 취지에서 독립협회가 설립됐다. 여기에서 독립은 과거 종주국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의미와 러시아와 일본 모두로부터 간섭을 배제하자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과 2대 회장을 지냈으며 초기 운영 모금액 중 5분의 1을 사재를 내놓을 정도로 독립 협회 설립과 그 운영에 아주 깊숙이 관여하였다. 독립문의 한문 현판 글씨도 이완용이 쓴 것이다. 훗날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의 매국 행 동 때문에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지만 여러 정황적 사실을 들추어 보면 부정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쪽에 무게가 실린다. 물론 강력하게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독립협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3·1 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라는 주장이 그의 며느리 회고록을 통해 주장된 바 있다. 그러나 이완용은 조선이 진정한 자주 독립국이 되겠다며 칭제 건원의 황제국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한 1897년 10월 직후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완용이 중앙 정계에 복귀한 때는 1904년 러일전쟁 직후였다. 고종이 그를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종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905년 미 공사관으로 피신하려 하였으나 미국의 거부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한다. 무엇이 '뼈 속까지 친미파'로서 심지어 친러파와 손을 잡고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그가 친일파를 넘어 부일 매국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이완용은 고종과 미국 공사관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미국의 속내를 어느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1905년 8월12일 2차 영일동맹 공식 체결 2주 전인 7월29일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과 미국의 필리핀 군도 지배권을 맞교환했다. 이한응이 보내온 영국 동향과 그의 외교 활동 내용 보고를 접했을 그는 영국의 속셈도 가장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1905년 대한제국 인사로서 국제 정세와 세계 최강대국의 위치를 교대하게 되는 영국과 미국의 세계 전략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인물은 이한응과 이완용이었다. 이한응은 그러한 상황인식에서 순국을 이완용은 매국노의 길을 선택했다 이완용은 놀랍게도 1926년 죽을 때까지 일본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후 일본 고위 관리와의 면담에서 영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고 있는 일본인도 극히 제한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한 데서 비롯한 부일 매국이었으니 일찌감치 일본과 교류하고 일본인과 친교를 맺으면서 친일파가 되고 더 나아가 부일파가된 매국노보다도 더 악질적이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친미파인 정동파의 수장, 아관파천의 주역, 독립협회 회장이라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그를 총리대신으로 추천하여 임명하게 한 것도 그의 대세 순응 자세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이토의 기대 이상으로 부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을 위협 강제 퇴위시켰고 1907년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입법권과 행정권 및 치안권을 일본에 넘겨줬다. 1909년에는 일본이 조급해하지도 않는 가운데 사법권도 일본에 바쳤다. 이 조치가 이완용의 '원맨쇼'인 것은 그 근거가 조약도 아닌 각서(기유각서)라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주도한 이도 총리대신 이완용이었다. 그 후 이완용에게 일본의 백작 작위가 주어졌다. 이완용이 '만고불후'의 매국노의 자리를 굳힌 것은 3·1 운동과 그 후 행적이었다. 독립 만세 시위 전야 손병희 선생이 이완용을 찾아 독립 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22년 전인 1897년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쓸 때의 초심으로 돌아 갈 기회를 준 것이리라. 이 일화는 1898년 9월 중국 청나라 무술정변 때 일화를 연상하게 한다. 변법파 담사동은 서태후의 밀지를 받고 변법파를 체포하려는 위안스카이(원세개 군영에 대담하게 들어갔다. 담사동은 나라의 미래를 위해 서태후가 아닌 무술변법을 추진하고 이는 광서제를 선택하라고 설득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담사동 면전에서 가타부타 입장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선택은 서태후였다. 담사동은 체포되어 저자 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완용은 조금도 주저 없이 손병희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리고 만세 시위 후 우리 민족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질타하는 '매국본색'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그것도 3차례씩이나. 만세 시위 직후 발표한 첫 번째 경고문은 친일 매국노에 대한 면종복배 여부를 면밀히 살피는 일본의 매서운 눈초리에 바짝 엎드리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후 경고문은 미국조차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배척하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이로써 일제의 이완용에 대한 '매국 진정성 검증'은 '분명하고 되돌이킬 수 없는 경지'의 단계를 통과했다. 일제는 1920년 그의 작위를 후작으로 올려주었고 아들에게 까지 남작의 작위를 주었다. 이완용은 6년 뒤인 1926년에 죽었는데 임종을 앞두고 아들에게 국제 정세를 살펴보니 미국이 장차 1등 강국이 될 것 같으니 친미파가 되라고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일생에서 조국과 민족족은 그저 허울이었으며 오직 개인과 가문의 부귀와 영달뿐이었다. 이한응 영구는 고종의 특명으로 해로를 통해 고국으로 운구 됐으며 장충단에도 배향됐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시지푸스의 바윗돌 밀어올리기'는 계속됐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밀사 사건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우리 민중의 3·1 운동 시위 등은 이한응과 마찬가지의 '시지푸스의 바위굴리기'였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동양 평화론'을 쓴 사실을 주목하면 이 또한 이한응의 외교 구상과 맥이 이어지는 평화 이니셔티브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한응이 순국한 뒤 48년 뒤인 1953년 5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충격에 빠뜨렸다. 면도를 하던 처칠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소식을 보고 받고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을 베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한응 보다 한살 아래인 1875년생이고 처칠은 이한응과 동갑이다. 처칠은 1905년 영국과 마찬가지로 '파워 폴리틱'의 세계 전략 논리에 따라 극동 약소국 대한민국을 버리는 카드로 미국을 설득했다. 당시 유엔에서 활약하던 임병직은 처칠의 뒤를 이어 영국 총리가 되는 앤토니 이든이 유엔 무대에서 '처칠의 아바타' 역할을 밉살맞게 전개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런 와중에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이한응이 1904년 1월 대한제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구현한 것이다. 1953년 미국은 1905년의 미국과 달랐다. 영국이 아닌 한국을 선택했다. 3년 뒤 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조치가 취해졌을 때에도 미국은 영국 편이 아니었다. 이든은 영국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영국은 1905년 러시아 발트함대를 싸우기 전에 기진맥진하게 만든 '무위의 세계전략 카드 '인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돌려주어야 했다. 이한응의 1904년 1월 영국 외무성에서 펼쳤던 약소국 중시의 미래 전략이 구현된 셈이다. 그러나 이한응의 순국 111주년을 맞은 오늘도 한반도는 강대국에 의해 이루어진 분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한응의 '명예로운 고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로고는 2003년 중국 허난성에서 발견된 눈(目) 모양의 글자로 지금까지 발견된 문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기사 보기

▶ 2016/05/22 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