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6월15일] 얄타밀약 통보, 毛인생자평, 好猫論

류샤오치 문집 발간, 인민일보 창간, 남북한 6.15 공동성명, 1차 연평 해전, 카터 북한 방문, 왕건 고려 건국

1945년 6월 15일 미국 주중 대사 헐리가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얄타 협정에서 중국과 관련하여 맺은 비밀협약 내용을 국민정부에 통보하고 소련과 협상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4일∼11일 미국의 F.D. 루스벨트, 영국의 W. 처칠, 소련의 I. 스탈린 등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 얄타에서 전후처리의 기본 방침에 대하여 합의한 회담으로 정식명칭은 크림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는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가 처음 거론되었다.

얄타비밀협정의 중국 관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련은 독일항복 2∼3개월 뒤 다음의 조건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한다.

(1) 외몽골의 현상유지 ;

(2) 사할린 및 쿠릴열도의 소련귀속;

(3)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의 우선권 승인;

(4) 뤼순(旅順)항을 소련군항으로 하는 조차권(租借權) 승인;

(5) 남만주철도, 동중국 철도의 중소합판(中蘇合辦)에 의한 운영;

(6) 소련은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유일한 중국정부로 인정한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이해 8월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 후 얄타 밀약을 수용하는 협정을 소련과 체결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화 후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스탈린과 담판을 통해 1950년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소련의 제정 러시아 특권 상속은 5년 만에 폐기됐다.

대만으로 철수한 장제스의국민정부는 1953년 초에서야 굴욕적인 중소 동맹 조약을 폐기 선언햇다. 국민정부가 이처럼 폐기를늦춘 것은 대륙 진공의 기회가 다시 찾아 올 때 소련의 중립을확보하기 위해서엿다. 그러나 한국전이 종결될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마침내 '와신상담'의 자세로 유지하고 있던 '굴욕'을 내던진 것이다.

1976년 6월 15일 마오쩌둥(毛澤東)은 화궈펑(華國鋒) 등에게 자신의 일생을 총괄하는 말을 남겼다. 마오는 이 해 9월 9일 사망했으니 죽음을 3개월도 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다. 다음은 마오의 말이다.

“인생 칠십은 고래희(古來稀)라고 했는데 나는 80여세가 되었다. 사람이 늙게 되면 훗날을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옛말에 ‘관을 덮은 뒤라야 그 사람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진다(蓋棺定論)’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아직 관을 덮지는 않았으나 나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아닌가 !

나는 일생 중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장제스(蔣介石)와 수십 년간 투쟁하여 그를 몇 개의 섬으로 쫓겨 가게 만들었고 8년간의 항전을 통해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에 이의를 갖는 사람들이 내 귀에다 대고 뭐라고 지껄여댄다 해도 시간을 거꾸로 돌려 나를 대신 그 몇 개의 섬으로 쫓아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신들 모두가 알다시피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것이다.

이 일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두 가지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유산은 다음 세대에 넘겨질 것이다. 어떻게 넘겨질 것인가? 평화적으로 전달되어 혼란이 벌어지는 일이 없을 것인가, 아니면 잘못 전달되어 피바람이 몰아칠 것인가,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

1962년 6월 15일 덩샤오핑(鄧小平)이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덩은 농민청부 생산제인 ‘포산도호(包産到戶)’에 관한 중앙서기처의 토론에 앞서 행한 담화에서 안후이(安徽)성 속담인 이 말을 인용했다. 원래는 ‘황묘흑묘(黃猫黑猫)’였으나 어느 사이 ‘흑묘백묘’라는 보다 강렬한 표현으로 바뀌었다.

덩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시행이 비교적 용이하고 농업생산의 회복과 발전을 빨리 이룩할 수 있는 생산방식이 그 것이 무엇이 되었든 채택해야한다 ;

군중이 채용하기를 원하는 방식이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채택하여야 한다. 비합법적인 것이면 합법화하여야 한다.

‘누른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不管黃猫黑猫捉到老鼠就是好猫).”

1961년부터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농민들의 자발적인 요구에 따라 ‘포산도호’ 방식에 의한 생산이 이루어졌다. 안후이 성 성위는 ‘밭의 산출량을 정하고 그 생산 책임을 농민에 맡긴다(定産到田 責任到人)'이라는 원칙 아래 이러한 추세를 합법화하였다. 덩즈후이(鄧子恢), 천윈(陳雲), 덩샤오핑 등 중앙 지도자들은 이에 찬성했다.

'호묘론(好猫論)‘으로도 불리는 이 주장은 실용주의 노선을 상징하는 말로 문화대혁명 당시 문혁파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포산도호 정책은 문화대혁 명 발동으로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이 실각함으로써 중단됏다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 숙청 이후 완리(萬里)와 자오쯔양(趙紫陽) 등 개혁파지도자들에 의해 안후이성과 쓰촨성에서 다시 시도되었으며1978년 12월 덩샤오핑 권력 장악후 전국적으로 확산됏다.

[今天歷史-5월31일] 덩샤오핑 농촌 승포책임제 확대 촉구

1991년 = 류샤오치(劉少奇)가 생전에 쓴 글을 모은 책이 출간됐다. 중공중앙 문헌연구실과 중공중앙 당교가 공동 편집 발간한 이 책의 제목은 ‘류샤오치의 당건설과 관련한 논문(劉少奇論党的建設)’이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이 책의 표제를 썼다.

이 책은 류샤오치가 1936년부터 1962년까지 쓴 47편의 글이 실려 있으며 총 45만자에 달한다. 류샤오치는 당내 이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1948년 =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창간됐다.

한국사 속의 오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6·15 공동선언 을발표했다(2000). 남북한 간의 정상회담은 1945년 남북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 6월 13일 ~ 15일) 마지막 날 발표한 선언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2000년 ) 8ㆍ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6· 15 남북 공동선언은 북한을평화적으로 개방시키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의 최대 성과였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이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햇는데 이는 한국인 최초의 노밸상 수상이엇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은 북한의 핵 개발을 제어하지 못하고 결국 북한의핵 실험을 막지못햇다. 또한 남북한 간의 평화도 정착되지 못햇다.
남북한 해군 함정이 서해 북방한계선 근해서 교전했다(1999).

남북정상회담 한 해 전에 벌어진 서해에서의 교전(이하 연평1차해전)에 북한 해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우리 측이 손가락 정도가 다친 경상자 몇 명이 나온데 비해 북한 해군은 함정이 침몰하고 수십 명의 수병이 수장됐던 것으로 일본 언론은 전하고 있다.

김일성 사후 대내적으로 선군정치를 제창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이는 치명적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이는 국면전환을 위해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김정일과 북한 군부는 그러나 1999년의 참패를 잊지 않았다. 남북공동선언 발표 일자를 6월 15일로 잡음으로써 1999년의 연평해전(1차 연평해전)이 남북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남북정상회담 후 화해 분위기 하에서 북한은 제주해협 무단 통과 등의 의도적 도발을 하였고 판을 깨지 않으려는 국민의 정부를 의식한 우리 해군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고 국민의 정부는 우리 해군의 이같은 행동을 포상햇으며 후속협상을 통해 북한의 행동을 추인했다. 협상을 통한 북한 선박의 활동 공간을 넓힌 것으로 1차 연평해전 패배로 인한 김정일의 권위손상을 다소나마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군부 내 권위를 상당부분 회복시킨 것은 2002년 6월 29일의 서해교전(2차 연평해전)이다. 당시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출, 전국이 축제분위기였다. 터키와의 4강전을 앞둔 이날 오전 벌어진 서해교전에서 이번에는 한국의 함정이 격침됐고정장을 비롯하여 한국의 수병 여러 명이 전사했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제주해협의 통항권을 확보한데 이어 해전에서도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측은 전투 종료 후 즉각 우발적인 충돌이라고 규정했고 국민의 정부는 우리 측 함정의 정장이 북한 측이 쏜 첫 발에 함정 지휘실이 정확히 피격, 전사햇음에도 불구(북한 측이 주장한대로 우발적 교전이 아니라 사전 철저히 준비된것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이를 수용했다.

한해 뒤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망각의 늪 속에 빠진 1999년의 연평해전, 즉 1차 연평 해전은 2002년 6월 서해교전, 즉 2차 연평 해전을 통해 ‘확인’ 침몰된 셈이다.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북한 해군 충돌은 남북한의 극심한 해군전력 차를 노정시킨 1999년 6월 15일 대신 북한해군이 어느 정도 선전한 2002년 6월 29일이 자리 잡게 되었다.
6.25 이래 견지되어왔던 북한의 대남 군사력 우위의 ‘신화’는 연평해전을 통해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재빨리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고 뒤이은 2차 연평 해전을 통해 이 신화는 불안하게나마 유지될 수 있었다. 또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통해 오히려 이 신화는 더욱 공고화 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청 해전에서 북한 해군은 완패햇으나 핵 실험 실시로 국면 은 되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전환된 상태는 바뀌지 않았다. 이 일련의 행동은 북한의 대남 심리전의 백미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가 나라 잃은 군주가 되는 불행을 면한 것은 이순신의 잇단 해전승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에는 당시 연평대첩이라고 불렸던 1999년의 6월 15일의 해전 승리가 있었다.

1999년 6월 15일 1차 연평해전에 대한 국민의정부와 참여 정부 시기의 의도적 망각은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대우를 연상시킨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1차 연평해전 기념식은 국민의 정부와 창여정부 기간에는 이루어지지 않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서야 치러지기 시작햇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핵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1994).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918).

2016/06/1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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