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1/20 21:20



[今天歷史-8월12일] 중일 평화우호조약, 2차 영일동맹

대만 단결연맹 창당, 미국 전면 핵실험 중단 선언, NAFTA 창설,미국 첫통신위성 발사, PC 탄생, 미국 한국승인, 제2공화국 출범, 박정희 의장 민정 이양 약속, 금융 실명제 전격 실시, 대한 적십자사 남북 이산가족 찾기 제의, 북한 자주 노선추구 발표
1978년 8월 12일 중국과 일본이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총리가 베이징(北京)을 방문, 중국과 일본간의 국교수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평화우호조약 체결까지는 다시 6년을 기다려야 했다.

미중간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이 1972년 2월 미중 상하이(上海) 공동성명 이후 7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 대만 문제 때문이었다면 중국과 일본 간의 평화우호협정 체결이 늦어진 것은 소련 문제 때문이었다.

일본은 1972년 9월 공동성명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하고 대만이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 하며 이를 “존중”한다고 밝혀 미국과는 달리 대만 문제를 일찌감치 매듭지었다.

중일 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대만은 즉각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반면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하나의 중국.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One China, but not now)'라는 기존의 원칙을 견지했다.

1974년부터 시작된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교섭 과정에서 중국은 반패권 조항에 소련의 이름을 명문화하자고 주장했다.

중일 수교 공동성명의 반패권 조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바라지 않으며 어떤 나라 또는 집단에 의한 패권확립 시도에도 반대한다”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좀더 구체화하자는 것이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교섭 중단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 양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포함한 전 지역을 대상으로 어떤 국가의 패권 시도도 반대한다”는 내용으로 반패권 조항을 합의. 조약체결을 성사시켰다.

이 조약은 체결국과 제3국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규정하여 일본의 전방위외교(全方位外交)가 인정되었다.

조약은 1978년 10월 18일 비준, 승인되었다.

당시 중국 총리는 화궈펑(華國鋒)이었고 일본 총리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였다.
1905년= 일본과 영국이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1차 동맹은 전쟁시 양국이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한 방어동맹이었으나 러일 전쟁 종결을 한달 앞두고 갱신된 2차 영일동맹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우월성, 한국(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을 상호 인정한 공수동맹(攻守同盟)이었다.

남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격돌한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시작되어 1905년 9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선으로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종결되었다.

1911년 7월 13일에 갱신된 3차 영일동맹은 독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체결되었다. 영일동맹은 제1차 세계대전 뒤인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 폐기되었다.

영일동맹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대립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중국 분할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은 중국의 문호 개방과 영토 보전 및 기회 균등을 선언하였다. 중국 이권분할 후발참여국으로서 중국에 대한 열강들의 배타적, 독점적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를 중심으로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동청(東淸)철도 부설권 획득과 뤼순(旅順)·다롄(大連)조차를 통해 남만주를 지배함과 동시에 한국에도 진출하여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두고 남해안의 마산 항까지 조차를 꾀했다.

이 같은 러시아의 적극적인 동방정책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 독점 지배를 획책하던 일본과 마찰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력상 열세인 일본은 1896~98년 사이에 러시아와 타협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1900년 산둥(山東)성에서 의화단(義和團)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가 만주까지 파급하자 러시아는 만주에 있는 자국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군대를 파견했고 사건이 해결된 뒤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동학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출병, 청일전쟁을 야기했던 일본의 행태를 만주에서 러시아가 한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의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중국에 대한 제국 주의적 기득권과 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러시아의 만주 독점에 반대하는 미국에 접근, 1902년 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국은 앞서 체결된 프랑스-러시아동맹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영광스러운 고립정책'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영일동맹은 만주와 한국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해양 제국주의 블록이 대치하는 국면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은2차 영일 동맹 체결에 앞서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협정으로 미국으로부터 한국지배 승인을 얻었다.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한국에서의 우월권과 랴오둥(遼東)반도 조차권·둥칭철도 남만지선(南滿支線) 부설권·남사할린·연해주 어업권 등을 얻어 한국과 남만주를 독점했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햇는데어떠한 국제적 반발과 제지도 없었다. 당시 영국의 한 언론은 한국은 신부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못이기는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한일 합방'을 받아들였다고 실상을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하는 비유를 하기까지 했다. 일본이 이처럼 국제적 무관심 속에 한국을 병탄할 수 잇었던 것은 사전에 서방의 양대 해양세력인 미국과 영국의 한국 지배에 대한 동의를 받아두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만주에서도 1906년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다음 해 러일협약으로 남만주를 세력 범위에 집어넣었다.일본의 한반도 지배 단계적 추진을 지켜보기만 하였던 서방의 해양 세력은만주와 괂련해서는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만주 지배가 가속화하자 러일 전쟁 후 만주의 문호 개방을 기대했던 미국과 영국은 만주철도 매수와 그 중립화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고, 북만주는 러시아가, 남만주는 일본이 각각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 진전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해양 제국주의 세력인 영국, 미국과 일본 간의 균열을 야기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러일 전쟁 패배로 아시아로 진출이 저지된 러시아는 발칸정책을 강화하여 영-프-러 협정을 맺음으로써 대독(對獨) 포위진을 형성하였다.

유럽에서는 해양 대 대륙의 대립구도가 대륙 세력 대 대륙의 대립세력 관계로 질적 변화를 일으켰으며 이는 결국 1914년 1차대전의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 = 대만 타이베이(台北)에서 대만 단결연맹이 창당했다. 대만 단결연맹은 대만에서 1989년 1월 복수정당이 허용된 이래 95번째로 창당된 정당이었으며 주석으로 황주원(黃主文)이 선출되었다.

이 정당의 사실상의 오너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며 대만 독립 문제에 관해 민진당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이 전면 핵실험 중단을 선언했다(1995).

미국이 세계최초의 통신위성 `에코 1호'를 발사했고(1960), IBM PC가 최초 로 등장했다(1981).

'아버지 부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 캐나다. 멕시코를 연결하는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창설 협상 타결을 발표했다(1992).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침몰, 승무원 118명 전원이 사망했다(2000).

영국서 청교도 혁명이 발발했다(1642). 전쟁포로, 전시 민간인에 대한 대우 등을 규정한 제네바 협약이 조인(1949)되었다.

한국사 속의 오늘

대한 적십자사가 북한적십자사에 납북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1971). 김영삼 대통령이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다고 선언했다(1993).

미국이 한국정부를 승인하고, 존 무쵸를 초대 대사로 파견하였다(1948).

한일회담이 속개되었으며(1957),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61명이 한일협정 조인에 반대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1965).

제 5대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이 피선되어 제 2공화국이 출범했고(1960),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이 1963년 여름 민정이양을 약속했다(1961).

북한이 로동신문 사설을 통해 중소 노선으로부터 탈피하는 자주노선을 추구한다고 선언했으며(1966), 서울에서 제 7차 남북장관급회담이 개최되었다(2002).


2016/08/1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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