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3/29 22:03



[今天歷史-10월22일] 쿠바위기, 중국 노령화 위원회

청나라 황녀 출신 일본 여간첩 사형 선고, 덩샤오핑 방일, 예젠잉 사망, 쉬스요우 사망 홍군 주력군 장정 완료, 복사기 발명, 유엔군 한중 국경선 진격,한국 사상 첫 항공파업 ,

1962년 10월 22일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시도한다며 쿠바 해역에 대한 봉쇄를 명령함으로써 쿠바위기가 발생했다.

당시 양대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핵 전쟁 발발 위기까지 몰고 갔던 쿠바 위기는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미국과 중국 간 이견이 양국 간 예상치 못한 심각한 군사적 긴장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점에서 되새김질이 필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북한이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북한의 핵물질 이전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하고 북한 선박을 공해상에서 정선, 검선, 나포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구상( PSI )을 강화할 것을 천명했다.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PSI가 해상봉쇄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미국이 44년 전에 실시한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의 경험을 되살린 것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었다.

쿠바 핵 위기의 원인은 1959년 초 성립된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흔들기에서 비롯됐다. 미국의 이익을 대변해 온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카스트로 정권은 사회주의를 지향했으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반미 친소주의 노선을 지향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네디 정권은 쿠바의 망명 반카스트로 세력을 지원,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 사건을 일으키는 등 쿠바에 대해 지속적인 군사·외교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카스트로 정권은 결국 정권의 생존을 위해 소련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쿠바는 1962년 9월 소련·쿠바무기원조협정을 체결, 소련제 미사일을 도입하였다.

미국은 이해 10월 14일 중거리미사일기지가 쿠바에 건설 중임을 확인하였다. 22일 케네디대통령은 소련제 미사일 추가 반입 방지를 위해 쿠바 해상을 봉쇄한다고 통지하고 소련에게 쿠바에 배치한 미사일의 철거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또한 미주기구의 승인을 얻어 육·해·공·해병대 6개 사단에 동원령을 내리고 쿠바에 해상봉쇄를 실시했다.

미사일을 적재한 소련 선단(船團)이 카리브해상에서 미국 함대와 충돌할 가능성이 커졌다. 소련은 처음에 이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25일 유엔에서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기지 사진을 미국이 공개하자 26일 흐루시초프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을 경우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서한을 케네디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이어 27일 2차 서한을 통하여 쿠바의 소련미사일기지와 터키 내 미국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케네디대통령은 27일의 제안을 무시하고 26일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28일 드디어 흐루시초프는 미사일 철거 및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단 16척의 귀환을 명령함으로써 11월 2일 위기상황은 끝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 회피라는 공통된 과제 아래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고 미·소간 핫라인(긴급통신연락선)을 개설하였다. 또한 쿠바위기 여파로 흐루시초프는 실각하였고 쿠바의 대소 관계는 냉각되었으며 중·소간 대립이 깊어졌다.

1999년 = 중국 노령공작위원회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과 국무원의 비준을 얻어 창설되어 1차 회의를 베이징(北京)에서 개최하였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 겸 부총리인 리란칭(李嵐淸)이 주임을 맡은 이 위원회는 중국이 급속도로 노령화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됐다.

리란칭은 이날 회의에서 중국은 노령인구대국이며 노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라고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비가 긴박하다고 강조했다. 리란칭에 따르면 1999년 10월 1일 현재 중국의 60세 이상 노령 인구는 1억 2,600만 명으로 전 인구의 10%에 달했다. 또한 노령인구 증가율은 연 3%로 전례없이 빠른 속도라고 강조하고 노령화 문제는 전면적이며 전략적으로 중대한 문제이며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라고 말했다.

1947년 = 만주국의 황녀로 태어나 일본 간첩으로 활약한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 : 1906~1948)가 국민정부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다음 해에 총살형으로 처형됐다.

청의 숙친왕 선춘 (肅親王 善春)의 14번째 딸로 본명이 아이신줴뤄 셴위(愛新覺羅 顯玗)우인 그녀는 6세 때인 1912년에 일본의 대륙낭인(川島浪速)의 양녀로 보내졌다. 청조가 멸망하자 숙친왕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몽골, 만주와 일본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나누어 보냈던 것이다.

그녀는 일본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뒤 중국에 돌아 와 일제의 만주침략과 괴뢰국 만주국 수립과정에서 스파이로서 맹활약을 했다. 청의 황실의 피를 받은 그녀는 만주국 수립을 청조의 부흥이라고 여기며 일제에 협조하는 자신을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대표적인 한간(漢奸 :민족반역자)으로 간주하였다. 그녀의 일생은 우리나라의 배정자(裵貞子)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남장을 즐겨하여 ‘남장미인(男裝麗人)’으로, 또 ‘동양의 마타하리’로 불렸다. 그녀의 일생은 1990년 홍콩에서 매염방(梅艶芳)과 유덕화(劉德華)의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사진은 영화 '川島芳子'에서 주인공으로 분한 매염방이다)


배정자(裵貞子) : 1870∼?

민족반역자·일제의 밀정. 경상남도 김해(金海)출신. 본명은 분남(粉南). 1885년 일본으로 건너가 김옥균(金玉均) 등에게 의지하며 지내다가 188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가 되었다.

이름을 정자(貞子)로 바꾸고 사격술·변장술 등 철저한 밀정교육을 받은 뒤, 1894년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뒤로 일제의 주구(走狗)로서 국권피탈의 막후에서 암약하였고, 1910년대에는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에게 협력하였으며, 1920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에는 봉천(奉天 : 지금의 선양 瀋陽)일본총영사관 촉탁으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총독부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의 지시를 받아 간도·상하이(上海) 일대에서 항일투사들을 검거하는 데 앞장섰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 의해 민족반역자로 체포되었다.


1978년 = 국무원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일본 방문.

덩샤오핑 부총리는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을 친선 방문하고 1978년 8월 12일 체결한 중일평화우호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는 의식에 참여하였다.

공산정권 수립 이후 중국의 국가 영도자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덩의 이 방문이 처음이었다.

부인 줘린(卓琳)과 함께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히로히토(裕仁) 일본국왕과 회견하고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와 회담을하였다.

히로히토 일왕은 10월23일 덩샤오핑을 접견한 자리에서 “일중 양국간에 길고 오랜 우호의 역사가 있어 왔으며 비록 일시적으로 불행한 사정이 있었지만 이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말하고 양국간의 친선을 심화하여 장기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1986년 = 예젠잉(葉劍英)원수 베이징(北京)에서 사망.1897년생르로 향년 89세.

예젠잉 은 1976년 10월 4인방을 타도한 주역이었다. 학문적 소양을 풍부하게 갖추어 ‘유장(儒將)’으로 불렸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다음 시귀를 통해 예젠잉을 상찬한 바 있다.

      
諸葛一生唯謹愼 제갈공명은 일생동안 항상 신중했고
呂端大事不糊塗 여단은 큰일을 함에 있어 치밀했다.

이 시귀의 첫 대목은 제갈공명이 ‘전출사표(前出師表)’에서 “선제(先帝)-유비(劉備)를 가르킴-는 나(諸葛孔明)의 조심스러운 성격을 알아보고 돌아가실 무렵에 큰 일을 맡겼다(先帝知臣謹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라고 말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둘째 대목은 북송(北宋)의 대신 여단(呂端)에 대한 송 태종의 인물평을 상기한 것이다. 송 태종은 “작은 일은 소홀함이 있었으나 큰일에는 치밀했다(小事糊塗 大事不糊塗)”라고 평가했다.

여단은 송 태종이 사망한 후 내시 왕계은(王繼恩)이 진종(眞宗)을 폐립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진종을 보호하며 왕계은을 축출했다.

예젠잉 역시 마오의 사후 마오가 지명한 후계자 화궈펑(華國鋒)을 도와 장칭(江靑) 등 4인방을 실각시켰다. 이 때문에 마오의 이 시귀는 예젠잉에 대한 인물평으로 아주 적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예젠잉도 마오처럼 시작을 즐겼다. 『팔십서회(八十書懷)』라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시귀를 지었다.

늙은이가 즐거운 마음으로 황혼송을 짓는데 老夫喜作黃昏頌
둥근 해가 청산에서 낙조를 비추네 滿日靑山夕照明

81세 때 지은 다음 시귀 한 구절은 격언처럼 널리 퍼졌다고 한다.

100년 인생에 80을 살았지만 百年贏得十之八
늙은 천리마는 여전히 만리길을 가려 하네 老驥仍將萬里行

1985년 = 쉬스요우(許世友) 사망. 향년 80세.

1953년 중국 인민지원군 제3병단 사령원(사령관)으로 한국전에 참전했으며 1974년 1월 광저우(廣州) 군구 사령원으로 있으면서 시사(西沙)군도에 주둔 중이던 남부월남군을 패퇴시켰다.

1935년 =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 제1방면군이 산베이(陝北)의 홍군과 합류하면서 홍군 주력군의 장정(長征)이 완료됨. 마오의 홍군 주력과 산베이 홍군관의 합류일자를 이보다 이 보다 사흘 전인 10월 19일로 보는 기록도 있다.

장시(江西) 성을 출발할 당시 9만 명에 달했던 홍군은 국민정부군과의 전투, 장궈다오(張國燾)의 이탈 등으로 인해 불과 3,000명의 인원으로 산베이에 도착했다.

한편 1935년 9월 북상을 거부하고 남하하였던 장궈다오(張國燾) 휘하의 제4방면군과 후난, 스촨성 등지의 혁명근거지의 남아 있던 홍군들로 구성된 제2방면군 역시 1936년 10월 마오쩌둥의 주력군에 합류함으로써 장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 발명가 찰스 칼슨이 세계 최초로 정전식(靜電式) 복사기를 발명했다(1938).

한국사 속의 오늘

유엔군이 북한-만주 국경까지 진격했고(1950), 국내 항공사상 첫 대한항공 파업이 17시간 여만에 타결됐다(2000).

2016/10/22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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