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2/01/17 21:03



[今天歷史-10월24일] 冷戰, 펑더화이 출생

베이징 조약, 장쩌민 아키히토 회견서 "역사를 경계 삼아 미래를 내다보자", 웨이징성 사하로프 인권상 수상,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대공황 예고 뉴욕 주가 대폭락, 폴란드 반소 시위, 폴란드 자유노조 합법화, 조선 총독부 은행령, 동아일보 기자 자유언론 실천 선언, 코리아 게이트 폭로,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 탈북 귀환, 한-칠레 FTA 체결/b>

1948년 10월 24일 미국 대통령 고문이며 유엔 원자력위원회 미국 대표 B 버루크가 ‘냉전(Cold Wa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시사 평론가 W. 리프먼이 논문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실체로서의 냉전은 1946년 W.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을 서곡으로 하여 1947년의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방측은 '봉쇄정책'과 '반격정책' 등에 의거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중앙조약기구(CENTO), 동남아시아방위조약기구(SEATO), 미·일안보조약, 그리고 그 밖의 반공 군사망을 조직했으며, 공산진영은 바르샤바조약기구(WTO), 중·소 우호상호원조조약 등으로 대항하였다. 또한 경제·문화적 교류도 단절되어 동·서 2개의 세계가 형성되었다.

1946년 베를린 위기, 1950∼53년 한국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등을 거쳐 1962년 쿠바위기에 이르러 냉전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의 막다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쿠바위기는 미·소 양국지도자와 세계인들에게 열핵전쟁(熱核戰爭)의 공포를 실감시켰다. 이 때, 미국 지도자는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을 갖춘 소련을 상대로 냉전을 계속할 때의 위험을 깨달아 소련과의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평화 공존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겸 총리인 소련 최고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제창했다.

그리하여 1963년에 부분적으로 핵실험금지조약을 성립시켰으며, 워싱턴∼모스크바의 직통전화 설치는 이러한 정책의 한 표현이었다.

미국은 그 후 공산화된 중국을 상대로 냉전정책을 계속해 왔지만 중국이 강대해지고 세계에서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이 정책도 실패하였으며, 1972년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미국의 공세적 정책으로 가열되었던 1차 냉전기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미-소, 중-소 간의 2중적인 대립에 의한 2차 냉전이 시작되었다. 이 2차 냉전은 1989년 2월 소련의 아프간 철수, 그 해 5월 베이징(北京) 중-소 정상회담, 그 해 12월 몰타 미-소 정상회담에 의해 종식되었다. 2년 뒤인 1991년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냉전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냉전체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1996년 = 중국 반체제 인사 웨이징성(魏京生) 유럽의회로부터 사하로프 인권상 수상. 중국은 이에 대해 악랄한 내정간섭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1992년 =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중국을 방문한 일본 아키히토(明仁) 일본 천황(일왕)과 회견했다.

장 총서기는 “중일관계는 첫째 역사를 경계로 삼고(以史爲戒), 둘째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며(向前看), 셋째 대를 이어 우호를 이어 가야한다(世世代代友好下去)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일중 양국은 과거를 반드시 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해야 한다. 양국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1986년 = 중국 해군 항공부대 조종사 정차이톈(鄭菜田)이 산둥(山東)반도에서 미그 19기를 몰고 한국으로 망명했다.

1898년 = 펑더화이(彭德懷) 탄생.

인민해방군 원수 펑더화이는 1898년10월 24일 마오쩌둥(毛澤東)고향이기도 한 후난(湖南)성 상탄(湘潭)현의 빈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불과 11살에 지주의 소를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마오쩌둥과 후난성 출신인 국가주석을 지낸 류샤오치가 중농 가정 출신의 '은수저'라면 펑더화이는 철저한 '흑수저'였다.

펑더화이는 후난(湖南)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연대장이 되었다. 1928년 6월 후난성 핑장(平江)에서 공산 봉기를 일으켜 12월 정강산(井岡山)에서 주더(朱德), 마오쩌둥과 합류, 1929년 제 5 군장(軍長)이 되어 후난성, 장시(江西)성 경계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7월에는 후난성도 창사(長沙)를 점령하였다.

1931∼34년 장제스(蔣介石)의 5차례에 걸친 포위토벌작전에서는 제 3 군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국공(國共) 2차합작이 되면서 팔로군 부사령이 되고 산시(山西)성 동남부 사령부에서 옌안(延安)에 있는 주더를 대신하여 사실상의 총사령이 되어 1940년의 百團大戰 도 총지휘하였다.

제 2 차 국공내전에서는 서북해방군 사령, 제 1 야전군 사령을 거쳐 인민해방군 부사령이 되었다. 국공내전 말기에 공산군이 인민해방군으로 개편하면서 총사령 주더, 부사령 펑더화이 제1 야전사 사령 허룽, 제2 야전사 사령 류보청(정치위원 덩샤오핑), 제3 야전사 사령 천이와 제 야전사 사령 린뱌오엿다.

1950년부터는 중국인민의용군을 지휘하여 한국전쟁에 참가하였다. 당 초 제4 야전사 사령 린뱌오가 맡았으나 린뱌오가 병을 핑계로 이를 사실상 거부 펑더화이가 대신 맡았다.
1954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자 한국전쟁의 경험으로 군의 근대화에 힘써 1955년 의무병역제, 원수 이하의 계급제를 실시하였다.

1959년 루산(廬山)회의 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대약진정책을 ‘소부르주아적 열광’이라고 비판, 마오쩌둥과의 불화로 실각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4인방에 의해 고초를 겪었으며 1974년 11월 29일 사망했다.

그는 일생동안 비교적 큰 전투만 200여 차례 치렀다. 이 때문에 그는 외국인들로부터 “백전백승의 중국장군”, “기적을 창조하는 영웅”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1860년 = 베이징(北京) 조약 체결.

이 조약은 1857년 이래의 애로전쟁(제2차 아편전쟁)을 종결시킨 조약으로서 영국, 프랑스와 개별적으로 체결됐다.

이 조약은 1858년의 톈진(天津)조약을 확인한 외에도

① 톈진조약에 규정된 배상의 증액(각 800만량)
② 톈진의 개항
③ 중국인 근로자의 모집과 도항의 승인
④ 영국의 주룽사지방(九龍司地方 :주룽반도 남단의시가지 부분)의 할양
⑤ 몰수한 가톨릭교회 재산의 프랑스로의 반환을 승인했다.

보수 강경 세력의 반대로 켼진 조약 이행을 거부하다 영불 연합군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침범 당하고 원명원이 파괴되기에 이르자 더욱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이해 11월 러시아와도 협정을 체결하여 1858년의 아이훈조약에서 국경확정 때까지 양국에서 공유(共有)하기로 한 우수리강 동쪽의 옌하이(沿海)지방을 러시아령으로 할 것, 쿠룬, 카유가르, 장자커우(張家口) 등을 무역지로서 인정할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청나라 왕조는 이 조약 체결을 계기로, 보수 배외파가 궁정정변으로 인하여 후퇴하고 조약체결에 임했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忻) 등이 중심이 되어 외교전문기관인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립하고 대외화친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세계사 속의 오늘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로 유럽의 30년 종교전쟁이 종결되었고(1648), 뉴욕 주가 대폭락으로 세계 경제공항이 시작됐다(1929).

나일론 양말이 미국서 첫 발매됐고(1939), 유엔이 26개 회원국으로 출범하였다(1945).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반소시위를 전개했고(1956), 폴란드 자유노조가 동구권 최초로 합법적 지위를 획득했다(1980).

한국사 속의 오늘

조선총독부가 은행령을 공포하였다(1912).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했고(1974),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박동선이 미 의원들에 불법로비를 펼친 ‘코리아게이트’를 폭로했다(1976).

국군 포로 조창호(趙昌浩) 소위가 북한 억류 43년 만에 탈출 귀환했다(1994).

한국과 칠레 간 자유무역협정(FTA)협상이 타결됐다(2002).

2016/10/2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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