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22 17:03



[今天歷史-9월12일] 鄧小平 군사위 주석 선출, 林彪사망

존 F 케네디 재클린과 결혼, 미국 베트남 북폭 재개, 한국 신문 윤리위원회 발족.

9월 12일은 린뱌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1948년 9월 12일은 그의 지휘 아래 국공내전 3대 전투의 하나이자 첫 번째 승리인 랴오선 전투가 개시된 날이고 그로부터 꼭 23 년뒤인 1971년 9월 12일은 그의 마오쩌둥에 대한 쿠데타 기도가 실패로 긑나 가족과 함께 항공 편으로 소련으로 망명하다가 몽골 상공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한 날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뒤 바로 같은 날인 1982년 9월 12일 중국 공산당 12기 1중전회에서 당 주석제가 폐지됐다. 이와 함께당 주석에서 밀려나 부주서으로 있던 화궈펑(華國鋒)이 정치국에서 축출되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군사위 주석으로, 당 주석으로 있던 후야오방(胡耀邦)이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당주석제 폐지에 따라 당 총서기가 중국 공산당의 대표, 즉 당수가 됐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 최고 지도자는 당 군사위 주석을 맡은 덩샤오핑이다.

화궈펑은 정계에서 완전 축출되지 않고 당 중앙위 위원 자리는 유지햇다.

당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각기 다른 사람이 따로 맡는 최고 권력의 명실(名實) 분ㅇ리의 '2원 체제'는 1989년 11월에 그보다 5개월 전 천안문 사태로 총서기에 선출된 장쩌민이 덩샤오핑으로부터 군사위 주석 직을 인계 받으면서 종식됐다. 2002년~2004년 장쩌민 군사위 주석-후진타오 총서기 2원 체제가 잠시 부활햇으나 다시 한 사람이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을 함께 보유하는 1원 체제로 돌아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잇다.

덩샤오핑이 군사위 주석 직을 맡아 최고 실력자가 된 이날2인자로서 1인자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스스로 1인자가 되려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소련 망명 시도 중 추락사한 린뱌오의 11주기엿다.

1인자를 꿈꾸었으나 실패한 린뱌오와 성공한 덩샤오핑을 일본의 역사적 인물과 비유한다면 린뱌오가 '울지 않는 종달새는 죽여 버려라'의 '오다 노부나가' 형 인물이라면 덩샤오핑은 '울때까지 기다려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형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천하 통일 직전에 측근에 기습으로 할복자살했고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오다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면종 복배하며 때를 기다리다 200년 동안 지속되는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를 열엇다. 린뱌오는 다름아닌 친딸의 밀고로 사실상 암살 당한 셈이었고 때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 시대'라는 마오 시대와는완전히 구별되는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있는 시대를 열었다. 9월 12일은 공통정으로 1인자가 되려는 강한 야심을 가슴에 품고 있엇던 두 2인자의 흉일이자 길일이엇더다. 또한 전자의 실패는 후자의 성공의 반면 교사임과 동시에 길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今天歷史-3월 22일] 571工程紀要

린뱌오의 사망은 군부 통제의 공백을 불러 일으켜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하여 유배되어 있던 덩샤오핑에게 복권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今天歷史-3월 10일] 鄧小平 2차복권

그러나 린뱌오 사망과 관련,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린뱌오 일행이 베이징(北京)에서 살해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書中一滴] 林彪는 베이징서 암살됐다

또한 린뱌오의 군부 측근으로 그의사망 후 숙청됏던취후이줘(邱會作은 '린뱌오 사건' 40주년 이던 2011년 '린뱌오 쿠데타 기도 사건'은 조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


린뱌오 사망 사건 5년 전인 1966년 8월 31일 린뱌오가 천안문 광장에서 개최된 제2차 홍위병 사열식에서 마오쩌둥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장칭江淸, 세 번째가 저우언라이周恩來이다.

린뱌오는 각급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50만 명의 홍위병들 앞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인도자, 위대한 영수, 위대한 원수, 위대한 조타수 마오주석(偉大的導師,偉大的領袖,偉大的統帥,偉大的舵手毛主席)"이라는 마오에 대한 개인숭배 송사를 낭독했다.


린뱌오는 중일 전쟁 때 국민당의 국민정부군의 리쭝런(李宗仁), 쑨리런(孫立人)과 함게 사단급 이상 규모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킨 드물게 보는 중국인 장군들이다.

린뱌오는 일본 패망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 내전 승리의결정적 전투인 3대 전투 중 첫 번째인 랴오선 전투를 지휘했고 핑진 전투에서도 중심적 역할을했다.

린뱌오는 국공내전 말기 인민해방군 재편성 과정에서 제4야전사 사령원이 되었으며 문화 혁명 기간 중 제4야전사 출신들이 군부 요직을 장악햇다. 이것이 제2야전사 정치위원이었던 덩샤오핑이 그의 사망후 정치적으로 부활한 배경이다.

린뱌오는 공산 정권 수립 후 계급제도 도입 때 10대 원수의 한 명이 되었다.

린뱌오는 중국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이기는 햇으나 정치적 측면에서 마오쩌둥의 한 수 아래엿다. 그의 정치적 책략은 마오쩌둥과 비교하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었던 셈이다. 마오는 한국 전 개입을 결정한 뒤 그를 북한 지원군 사령관으로임명하려 햇으나 그가 병을 핑계로 회피하는 바람에 펑더화이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펑더화이는 미군과의 전투를 통해 현대전을 뼈저리게 경험한 한국전 참전 이후 마오의 인민 중시 게릴라 전술 전략에서 이탈햇고 린뱌오는 마오의 군사 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지, 정치적 입지가 극과 극으로 갈렷다.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린뱌오 역시 결국 마오의 정치적 버린카드가 되어 펑더화의 전철을 밟았다.

세계사 속의 오늘

존 F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이 잡지 사진기자인 재클린 부비에와 결혼했고(1953) 미군이 닉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베트남 북폭을 재개했다(1969).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군부에 의해 폐위됐다(1974).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언론인들의 자율심의기구인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발족되고(1961) 클린턴 미대통령이 스티븐 보스워스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사무총장을 주한 미대사로 임명했다(1997).

2017/09/1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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