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0/21 07:43



[19대 인물]‘굴기중국의 시황제’ 시진핑(習近平)<1>

시진핑 황태자 책봉의 마지막 관문 군사위 부주석에 오르다

오는 18일 개막하는 중국공산당 19차 전국대표 대회(전당대회: 약칭 19대)의 핵심 관전 포인트는 시진핑 총서기 체제 2기를 이끌고 나갈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중심 포커스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 주석 겸 군사위 주석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화궈펑이 될지 모른다는 '약체'라는 전망이 대세인 가운데 집권 1기를 시작한 시진핑은 5년 만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넘어 마오쩌둥(毛澤東)과 대등한 막강한 권력자의 위치에 오를지의 여부가 관심사가 될 정도가 됐다.

부드러운 인상의 그는 '솜 속의 가시'로 괄목상대하게 만들었다. 권력 세계에서 그는 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냉혹하고 비정하며 과단성 있는 승부사였다.

또한 '굴기 중국'의 지도자로서 대륙 국가 중국을 대양 국가로 전환시키고 군의 질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보여준 돌파력도 볼 만했다.

그러나 공산중국의 미래를 어디로 끌고 갈지에 대한 노선과 경제 개혁 방향은 여전히 모호하다.

다음은 그의 황태자 시절에 작성해 둔 평전의 초고를 정리한 것이다. 그가 지난 5년 동안의 성취로 압도적 비중을 갖고 추가될 부분을 작성하기에 앞서 이를 다시 살펴본다. 하늘로 비상 할 때를 준비하던 그의 잠룡 시절을 엿보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징시빈관(京西賓館), 비밀 화원이자 역사의 산실

2010년 10월18일 세계 주요 언론의 시선은 중국 베이징(北京) 서부의 한 호텔에 쏠려 있었다. 천안문(天安門) 앞을 가로 지르는 베이징 중앙로인 창안대로(長安大路)의 서쪽편인 시창안로(西長安路) 변에 위치한 13층의 징시빈관(京西賓館)이었다.

천안문으로부터 5km 정도 떨어졌다.베이징 서쪽은 ‘동경서관남숙북학(東經西官南宿北學)’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관청 및 공공기관 건물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징시빈관은 중화세기단(中華世紀壇), CCTV 사옥, 군사박물관과 도로 사이에 두고 마주한 채 이들과 더불어 베이징 서부 지역 랜드마크를 구성하고 있다.

이름은 지극히 평범하다. ‘베이징 서쪽의 호텔’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곳은 명칭처럼 평범한 곳이 아니다.

호텔이 문을 연 1964년 이래 중국의 역사 흐름을 바꾸는 사건이 이곳을 무대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숲과 철책으로 둘러싸인 ‘비밀의 화원(花園)’이자 ‘역사의 산실’이다.

징시빈관은 11기 3중전회라고 약칭하여 부르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가 열린 곳이다.

1978년 12월18일부터 22일까지 징시빈관에서 개최된 11기 3중전회는 마오쩌둥 시대의 관(棺)에 못질을 하고 덩샤오핑 시대의 닻을 올렸다.

폐쇄와 개방의 분기점이며 교조주의에서 실용주의로 선회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이었다.

1949년 이후 공산중국 역사를 둘로 가른다면 11기 3중전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야 한다.

11기 3중전회가 폐막된 이후에도 마오가 지명한 후계자 화궈펑(華國鋒)은 최고지도자의 직책을 유지했으나 11기 3중전회 기간에 노선투쟁에서 덩샤오핑에게 패해, 정치적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래 가장 의미 있는 ‘질적 변화’가 바로 이곳 징시빈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문화대혁명 때도 이곳은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문혁 초기인 1967년 1월 19일, 20일 양일간 예전잉(葉劍英), 쉬샹첸(徐向前), 녜룽전(聶榮臻) 등 군(軍) 원로들과 문혁소조(文革小組)의 장칭(江靑), 천보다(陳伯達)가 조반(造反) 운동을 인민해방군 내부로 확산시키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앙군사위 확대회의가 열린 곳도 바로 징시빈관이었다.

확대회의는 홍위병들이 난징(南京) 군구의 위병을 폭행하고 병영 안으로 들어와 부사령원을 폭행하는 등 이른바 조반활동을 벌이는데 대한 처리 지침을 요구하면서 소집됐다.

장칭은 4대(四大)를 주장했다. 즉 인민해방군 병영 내에서도 학생과 노동자로 조직된 홍위병들에게 대명(大鳴)), 대방(大放), 대자보(大字報), 그리고 대변론(大辯論)을 허용하여 탈권(奪權) 운동을 벌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 원로들은 군대에는 기율이 필요하고 이것이 무너질 경우, 대란이 일어난다며 단호하게 물리쳤다.

이는 마오의 개입으로 군원로의 일시 실각을 가져왔지만 마오는 군부의 반발이 내전을 유발할 수도 있음을 직감하고 대학생 등 극좌파를 축출함으로써 조반활동이 군 내부로 침범해 들어가는 것을 차단했다.

장칭이 ‘징시빈관 대소란 사건(大閙京西賓館)’으로 명명한 이 사건은 인민해방군을 문혁의 소용돌이에서 거리를 둠으로써 마오의 사후 덩샤오핑의 집권의 길을 터 준 중요한 역사의 계기를 마련했다.

마오는 문혁 과정에서 자신이 보호하고자 하는 인물들을 피신시켜 보호하였는데 군 기지와 함께 피신처로 활용된 곳이 징시빈관이었다. 마오 자신도 속속들이 컨트롤 할 수 없는 문혁의 소용돌이로부터 탈권 뒤 써먹음직한 인사들을 보호해두자는 생각이었다.

마오의 목표는 류사오치(劉少奇) 등 당권파로부터 권력을 회수하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 자신이 세운 인민공화국을 전복할 수는 없었다.

베이징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징시빈관이다. 원래 인민해방군 간부들의 숙박시설로 지어져 총참모부가 관리, 연대급 병력이 배치되어 있어 어느 곳보다 안전했기 때문이다.

문혁기간 병력이 배로 증강되어 징시빈관은 문혁시절의 소도(蘇塗)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마오의 뜻을 쫒아 이를 수행한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징시빈관은 오늘날 ‘가장 안전한 빈관(最安全的賓館)’과 ‘회의장 중의 으뜸(會場之冠)’으로 불린다. 이러한 과거 이력 때문이다.

17기 5중전회 차기 최고지도자 결정여부로 주목 끌어

2010년 10월18일, 이날 세계 언론이 징시빈관을 주목했던 이유는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 회의가 바로 이곳서 열렸기 때문이다.

사흘 전 15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 즉 17기 5중전회가 폐막하는 날이었다.

나흘간 비밀회의의 결론을 담은 '공보(公報)‘를 기다렸던 것이다. 공보는 미래의 장기적 정책 방향과 함께 차기 중국 최고지도자와 관련한 중요 조치가 담길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천안문 광장의 인민대회당을 놔두고 왜 이곳에서 그처럼 중요회의를 여는 것일까.

그것은 창당 후 집권 때까지 28년 동안 지하당으로 활동해온 전력 때문인지 모른다.

11기 3중전회가 철저한 비밀이었듯이 17기 5중전회도 마찬가지였다. 개혁과 개방으로 공산중국은 무섭게 변했고 많은 것이 개방되었다.

의회에 해당되는 전인대와 중국공산당의 전당대회인 전국대표대회의 개, 폐회식이 내외 언론에 개방되고 회의 진행이 관영 언론에 의해 부분적으로 공개된 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당 대회와 당 대회 사이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는 중앙위 전체회(중전회)의 비밀 관행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이점에서 있어서만큼은 11기 3중전회는 과거와 미래의 단절이 아닌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1기 3중전회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격렬한 노선투쟁이 비밀리에 전개됐기 때문이다.

17기 5중전회 개막 후 징시빈관은 중국 정치의 ’블랙홀‘이 되었다. 서방언론도 이에 길들어져 있었고 중국 최고지도부의 숨소리마저 기록한다는 홍콩 언론도 사실보도는 ’징시빈관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전인대, 당 대회, 정협회의가 열릴 때면 징시빈관은 ’빈관’이라는 명칭 그대로 지방에서 올라 온 지방 당정 간부와 군 간부의 숙소 역할을 한다.

회의는 천안문 광장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다. 하지만 중앙위전체회의 때면 징시빈관은 밀봉 회의장이 된다. 회의에 참가해야 하는 이들은 그들이 거주지가 베이징이라도 모두 징시빈관에 투숙해야 한다.

징시빈관은 현재 동루(東樓)와 서루(西樓) 그리고 회의루(會議樓) 등 3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서루는 13층이지만 실제는 20층 높이다.

러시아식으로 각 층의 높이가 요즈음 지어지는 건물 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완공 당시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회의루가 별도 건물로 세워져 있지만 상하이 진장반점(錦江飯店)의 구조를 본 떠 만들었다는 서루는 건물을 떠나지 않고도 숙식과 회의 일체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들었다.

1층은 회의장이며 2층부터 12충까지는 객실, 그리고 13층에는 주방과 함께 식당이다. '밀봉 회의'를 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인 것이다.

지하당 시설의 비밀회의 관행 중전회에서 철저히 지켜져 중전회가 징시빈관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홍콩 언론에 의해 보도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 사실마저 부정된다.

확인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뻔히 열리고 있음에도 공식적으로는 회의 개최가 부정된다는 얘기다.

중전회를 통해 확고하게 견지되는 ‘밀봉회의’ 관행은 1921년 창당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상하이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여학교에서 열려던 창당대회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저장(浙江)성 남호(南湖)에 배를 띄우고 개최했다.

마오쩌둥을 포함한 13명이 참석한 이 창당대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다.

우선 창당 일자부터가 오락가락한다. 중국공산당은 창당 기념일을 7월1일로 정했는데 실제 창당일은 7월20일설이 유력한 가운데 여러 설이 분분하다.

중국공산당 역사의 한 이정표인 1935년 쭌이(遵義)회의 역시 베일에 싸여 있다.

국민당 토벌군에 쫓겨 장정(長征)길에 올랐던 1935년 1월15일 구이저우(貴州) 성 쭌이에서 열린 이 회의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彭德懷), 린바오(林彪),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참석한 정치국 확대회의였다.

11기3중전회가 철저한 비밀이었듯이 17기5중전회도 마찬가지였다. 개혁과 개방으로 공산중국은 무섭게 변했고 많은 것이 개방되었다.

의회에 해당되는 전인대와 중국 공산당의 전당대회인 전국대표대회의 개, 폐회식이 내외 언론에 개방되고 회의 진행이 관영 언론에 의해 부분적으로 공개된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당 대회와 당대회 사이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는 중앙위 전체회(중전회)의 비밀 관행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이점에서 있어서 만큼은 11기 3중전회는 과거와 미래의 단절이 아닌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1기 3중전회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격렬한 노선투쟁이 비밀리에 전개됐기 때문이다.

17기 5중전회가 개막한 뒤 징시빈관은 중국 정치의 ’블랙홀‘이 되었다. 서방 언론도 이에 길들어져 있었고 중국 최고 지도부의 숨소리마저 기록한다는 홍콩 언론들도 사실보도는 ’징시빈관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전인대, 당대회, 정협회의가 열릴 때면 징시빈관은 ’빈관’이라는 명칭 그대로 지방에서 올라 온 지방 당정 간부와 군 간부의 숙소 역할을 한다,

회의는 천안문 광장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다. 하지만 중앙위전체회의 때면 징시빈관은 밀봉회의장이 된다.

회의에 참가해야 하는 이들은 그들이 거주지가 베이징이라도 모두 징시빈관에 투숙해야 한다.

징시빈관은 현재 동루(東樓)와 서루(西樓) 그리고 회의루(會議樓) 등 3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서루는 13층이지만 실제는 20층 높이다.

러시아 식으로 각 층의 높이가 요즈음 지어지는 건물 보다 훠씬 높기 때문이다. 완공 당시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회의루가 별도 건물로 세워져 있지만 상하이 진장반점(錦江飯店)의 구조를 본 떠 만들었다는 서루는 건물을 떠나지 않고도 숙식과 회의 일체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1층은 회의장이며 2층부터 12충까지는 객실, 그리고 13층에는 주방과 함깨 식당이다. ’밀봉 회의‘를 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인 것이다.

지하당 시설의 비밀회의 관행 중전회(中全會)에서 철저히 지켜져

중전회가 징시빈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홍콩 언론에 의해 보도되지만 공식적으로는 그 사실마저 부정된다. 확인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뻔히 열리고 있음에도 공식적으로는 회의 개최가 부정된다는 얘기다.

중전회를 통해 확고하게 견지되는 ‘밀봉회의’ 관행은 1921년 창당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상하이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여학교에서 열리려던 창당대회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저장(浙江)성의 남호(南湖)에 배를 띄우고 열었다.

마오쩌둥을 포함한 13명이 참석한 이 창당대회의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다.

우선 창당일자부터가 오락가락한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기념일을 7월 1일로 정하고 기리고 있으나 실제 창당일은 7월20일설이 유력한 가운데 여러 설이 분분하다.

중국공산당 역사의 한 이정표인 1935년 쭌이(遵義)회의 역시 베일에 싸여 있다.국민당 토벌군에 쫓겨 장정(長征)길에 올랐던 1935년 1월15일 구이저우(貴州) 성 쭌이 시에서 열린 이 회의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펑더화이(彭德懷), 린바오(林彪),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참석한 정치국 확대회의였다.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지배권이 확립되었고 농촌 중시, 농촌에 의한 도시 포위 전략 등 마오의 정치 및 군사전략이 당의 노선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지도부 개편이 이루어져 당 대표인 총서기는 보구(博古, 친방셴<秦邦憲>)에서 장원톈(張聞天)으로 바뀌었고 마오는 군사지휘 소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마오가 당 주석에 오른 것은 10년 뒤인 1945년의 일이지만 쭌이회의를 마오의 지도권 확립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바로 군사지휘 소조 우두머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군권(軍權) 장악 여부가 진정한 최고 지도자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 것은 바로 이 쭌이회의로부터이다. 그러나 이 회의의 내용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알려졌다.

1949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대륙을 장악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당원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전당대회에 참여하는 대표의 수가 증가하면서 당 대회를 더 이상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비밀회의가 가능한 중앙위 전체회의가 당의 노선과 방침을 정하는 핵심 기능을 했다. ‘당이 결정하면 전인대는 도장을 찍고 정협은 박수를 친다’는 말이 있는데 고무도장과 박수의 추인이 필요한 당의 중대한 결정은 당대회가 아닌 중전회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산지 휴양지로 외부와 격리된 장쑤(江蘇)성 루산(廬山 : 여산)에서 3차례 중전회가 열린 것은 보안문제 때문이었다.

대약진 운동을 비판한 펑더화의의 실각을 몰고 온 1959년 8기 8중전회가 열린 곳도 바로 루산이었다. 그러나 지도부가 장기간 수도 베이징을 오랫동안 비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많았다.

지도부가 베이징을 떠나지 않고 중앙위원들이 참석한 중전회를 비밀리에 열 수 있는 장소로 지목된 곳이 바로 징시빈관이었다.

징시빈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민해방군 고위 간부가 베이징을 방문할 때 묵을 숙소로 만들어졌다.

착공에 들어가면서 붙인 이름도 ‘팔일빈관(八一賓館)’이었다. 이 명칭은 인민해방군 창설일 8월1일에서 따왔다.

첫 삽을 뜬 때는 1959년 말이었으나 경비 문제로 인해 두 차례 중단했다가 1964년 1월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 그해 9월14일 개관했다.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건물이니만큼 군이 경비를 하게 되었으니 도심 내의 군 병영처럼 보안을 철저히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베이징을 떠나지 않고도 밀봉회의를 유지할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1964년부터 2004년까지 40년 동안 징시빈관은 29차례의 전인대, 44차례의 당대회와 중전회의 대표를 맞이하였다.

전당대회와 전인대 때는 군 대표 및 지방 대표의 숙소로만 활용되지만 중전회 때는 바로 이곳에서 ‘밀봉회의’가 열렸다.

17기 5중전회 공보 마지막 대목서 시진핑 군사위부주석 보임 밝혀

다시 2010년 10월18일로 돌아가자. 이날 저녁 7시 무렵 17기 5중전회의 공보(公報)가 발표되었다. 3일간 밀봉회의의 결정 내용을 밝힌 것이다.

공보는 양식에 따라 첫 머리에서 중앙위원 202명, 후보위원 163명이 참석하고 중앙기율검사위 상무위원, 관련 부문의 책임자급 인사, 당 대회의 일부 기층(基層 )대표와 전문학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정치국 주재로 회의가 진행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중전회의 논의 내용과 결정사항을 서술해나가가 있었지만 기자들의 눈은 이를 건너 뛰었다. 그리고 공보 마지막 부문에 멈추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전회(全會)는 시진핑을 증설한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보임하였다(全會決定, 增補習近平爲中央軍事委員會副主席)”

공보를 기다리고 있던 내외신 기자는 서둘러 현 국가부주석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확정되었다고 타전했다.

이 구절은 전 세계 언론에 홍수처럼 쏟아진 ‘황태자 시진핑’에 관한 기사의 남상(濫觴)이었다.

2017/10/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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