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17 23:49



[今天後事-11월6일]習, 鄧 떠나 毛로 유턴 정점과 혼돈

시진핑(習近平)은 19대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향후 미래는 평평한 고원지대의 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한 발은 아득한 골짜기로 향하는 내리막길의 첫 발일 수도 있다.

시진핑은 마오쩌둥(毛澤東)의 길을 선택했다. '독보적', '지존'의 위에 올랐다. 이는 덩샤오핑(鄧小平)이 구축한 권력승계 절차에 대한 심각한 흔들기다.

마오와 덩은 죽을 때까지 똑 같이 최고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다. 그러나 사후는 크게 달랐다.

마오는 사후 2년까지만 미래를 통제했다. 덩은 그 열배 이상인 20년 플러스알파다. 다만 미지수 알파의 값은 아직은 '?'이다.

시진핑은 1953년 생으로 마오가 환갑을 맞던 해에 태어났다. 시가 '시황제'에 오른 2017년 올해는 덩샤오핑의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최고권력은 마오 후반기처럼 공고해졌다. 하지만 덩이 구축하여 안정시켜 놓았던 권력 승계절차는 혼돈이다

시진핑 발아래 권력 피라미드 최상단 삼각뿔 안의 '만인'은 일단 '면종(面從)'하고 '구밀(口蜜)'하고 있다. 시의 시선 머무르는 눈마다 눈꺼풀은 자동적으로 내려간다. 들리는 말마다 꿀맛일 게다.

하지만 그는 접하는 사람마다 그 한길 속에 '나름의 복배(腹背)'와 '복검(腹劍)'이 도사리고 있음을 안다.

급소 추적과 기회 포착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시진핑은 그의 일생 중 최절정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승자의 저주' 속에 '승자의 독배'을 마주하고 있다.

되돌이켜 보면 19대를 앞둔 시진핑의 회심의 승부수는 쑨정차이(孫政才) 숙청이었다.

지난 7월 당중앙 기율검사위 조사를 거쳐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 비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갑작스게 숙청되기 직전까지 54세의 충칭시 서기 쑨정차이는 차기 최고지도자 0순위인 두 사람 중 하나이었다.

마오는 후계자 관련 3전4기였으나 결국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첫 번째 후계자 류사오치(劉少奇)는 문화대혁명이란 초고비용을 들여 쫓아냈다.

류의 치명적 과오는 '내가 틀렸어도 나의 길을 쫓아야 한다'는 마오의 '독선 불문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후계자 린뱌오(林彪)는 마오의 저승사자가 될 수도 있었다. 천우신조가 아니었다면 마오는 권력과 목숨마저 내 놓을 뻔했다.

린뱌오의 반발의 몸짓과 눈빛이 번득였다. 그러나 의심 많은 마오도 배신을 뛰어 넘어 모반이 모락모락 자라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세 번째로 선택한 인물인 젊고 수려한 용모의 왕훙원(王洪文)은 허수아비 역할도 못할 정도로 무능해 차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난한 화궈펑(華國鋒)을 최종 낙점했으나 마오가 세상을 떠난 뒤 2년을 못 버텼다.

덩샤오핑은 2전3기했다. 후야오방(胡曜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은 '1인자를 치받는 2인자'의 위험한 선택을 했기에 내치지 않을 수 없었다.

덩 역시 무난한 장쩌민을 일단 차기 후계자로 지명한 뒤 후계 혼돈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해 고심 끝에 '격대 (格代) 후계 지정' 방식을 고안했다.

차기 최고지도자를 현임 최고지도자가 아닌 전임 최고지도자가 지명하도록 만들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덩샤오핑은 1989년 6월 천안문 유혈 진압 뒤 장쩌민을 총서기로 선출하도록 한 뒤 5개월 지난 11월 13기 5중전회에서 최고 실권자 직위인 군사위 주석 직에서 물러났고 그 직책을 장에게 넘겼다.

자신을 마오에 이은 2세대의 핵심으로 그리고 장쩌민을 3세대의 핵심으로 정리했다. 당시 힘없는 최고 지도자 장쩌민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격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는 격대 지정을 위한 예비포석의 첫 수였다.

덩은 1992년 10월 14대에서 4세대에 속하는 후진타오를 정치국 상무위에 진입시켜 '격대 지정'의 본격적인 실험에 들어갔다.

후계자를 현 최고지도자가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임 최고 지도자가 지명토록 한다는 덩의 복안이 뚜렷해진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3세대 최고 지도자인 장쩌민이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2세대 핵심인 덩샤오핑이 장의 후계자 후진타오를 지명한 것이었다. 이는 당내 파벌 간 권력 교체를 이루어지도록 하여 특정 파벌의 권력 독점을 막자는 취지였다.

장쩌민은 태자당이자 상하이방에 속하고 장의 후계자 후진타오는 공청단파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파벌 간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도록 설계된 것이다.

정치는 살아 있는 동물이기에 이런 설계도가 덩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행될 것인가에 강력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1997년 2월 덩의 사후 2017년 7월 쑨정차이 숙청 때까지 격대 지정 원칙은 살얼음판을 걸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견지되어 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도가 높아졌다.

장쩌민의 뒤를 이어 총서기, 국가 주석 그리고 군사위 주석 등 당정군의 최고 직위는 모두 후계자로 지정된 후진타오에게 넘어갔다,

후진타오의 뒤를 이은 시진핑은 태자당으로 공청단파와 긴장 관계의 파벌이고 그가 후의 뒤를 잇는 데는 장쩌민 세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쩌민에게서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에게 최고 지도자의 승계가 이루어지면서 전임 최고 지도자가 현임 최고지도자를 '패싱'하여 차기 지도자를 지정하는 격대 지정 원칙이 확립됐다.

현 지도자와 차기 지도자의 연령대는 한세대인 10년 차이 이상이 되어야 하고 5년 임기의 총서기에 오르면 연임 할 수 있도록 하는 불문은 확고하게 자리잡는 듯하였다.

2002년 11월 18대에서 시진핑 신임 총서기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6세대의 쑨정차이와 후춘화가 정치국 위원에 선출됐다. 둘 다 공청단파였다.

후와 같은 파벌이고 태자당인 시진핑과는 긴장 관계의 파벌이다.

후진타오가 전임 장쩌민이 후에게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넘겨주면서도 2년간 틀어쥐고 있던 군사위 주석 직 마저 곧바로 시진핑에게 인계한 것은 이처럼 격대지정 시스템이 분명하게 가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쑨정차이는 베이징, 상하이 톈진과 4대 직할 시에 하나로 정치적으로 중요한 충칭시 서기에 선출됐다.

후춘화는 광둥성 서기에 올랐는데 광둥성은 '나라 속의 나라'로 불릴 만큼 중국에서 가장 부강한 성이다.

두 사람이 19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 2022년 시진핑 후임 총서기 자리를 놓고 경쟁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19대에서 쑨정차이는"야심을 품었다는" 이유로 숙청됐고 후춘화는 상무위 진입에 실패하고 광둥성 서기 자리마저 내 놓아야 했다.

이는 시진핑의 쑨정차이 숙청이라는 회심의 승부수와 당 주석제 도입, 시진핑 사상 당장 삽입 시도 등 시진핑 세력의 파상 공세의 결과였다.

현 지도자들과 은퇴 원로 지도자들 간에 허심탄회하게 미래를 논의하는 베이다이허 회의를 앞둔 시점에 쑨정차이 숙청 기습에 반 시진핑 세력과 원로 세력은 방어에 급급하다가 결국 시진핑 세력의 핵심 목표였던 후계체제 혼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진핑은 애드벌룬을 띄운 당주석제 도입 시도를 거둬들였다. 마오처럼 1인독재를 저지하기 위해 반시진핑 원로와 세력은 실질적인 1인체제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 시진핑 주도의 인사안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진핑은 형식상의 파벌 안배 그리고 집단지도 체제의 틀은 유지했다. 그리고 '시진핑 사상'이라는 식으로 명백한 표현 대신 '교언(巧言)'으로 포장하는 선에서 물러났다.

시진핑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처럼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두는 후계 체제의 혼돈을 얻었다.

이는 부메랑이다.

시진핑은 그가 겨눈 목표를 맞춰야 하고 그다음에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부메랑을 피해야 하는 권력의 ‘생사유희’가 시작됐다.

<盲瞰圖子>

2017/11/0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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