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17 23:49



[今天歷史-11월9일] 중국 역사기원 1,200년 끌어올려

대만 대륙거주 중국인 문병, 장례식 참석 등 대만 방문 제한적 허용, 베를린 장벽 붕괴

2000년 11월 9일 중국의 역사기원을 1,200년 끌어 올린 ‘하상주 연표(夏商周年表)’를 발표했다.

이전까지는 서주(西周) 말의 공화원년(共和元年)인 기원전 841년을 역사기년(歷史紀年)으로 삼았다.

200여명이 전문학자들이 5년 동안 참여하여 만든 이 연표는 하(夏)왕조 시작 연도를 기원전 2070년, 하왕조와 상(商)왕조의 교체 시기를 기원전 1600년, 반경(盘庚)이 은약(殷約)으로 천도한 때를 기원전 1300년, 상주(商周)교체기를 기원전 1046년으로 잡았다. 또한 상대 후반기 반경으로부터 제신(帝辛 : 紂왕)까지 12대 왕의 재위년을 확정했다.

<盲瞰圖子 주> ‘굴기중국(崛起中國)의 부정적 현상 중의 하나는 ‘역사 부풀리기’와 오늘의 기준에 의한 ‘역사 수정’ 내지는‘변조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킨 것이
후자의 대표적 예라면 중국 역사의 기년(紀年)을 끌어 올린 것은 전자의 대표적 예일 것이다. 물론 ’기년 끌어 올리기‘가 그간의 고고학 및 역사 연구의 소산일 수 있다. 하지만
단번에 1200년을 끌어 올린데서 과장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어느나라든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지나칠 정도다. ‘주(周)의 동천(東遷)’은 북방 유목 민족에 쫓겨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무미건조한 기술 또는 엉뚱한 표현을 통해 불리한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려는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근세에 들어 와서도 이런 태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잇다.

1900년 8개 연합군에 베이징(北京)을 함락당하고 서태후와 광서제가 몽골로 도주한 것을 두고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고 기술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이 자랑해마지 안는 ‘장정(長征)’(1934~1936)은 문자 그대로는 ‘긴 장기간의
원정’이라는 뜻이지만 실상은 ‘기나긴 패주’가 정확한 표현이다. 중국 역사기술의 ‘자존(自尊)’은 무시·폄하할 수는 없겟으나 ㅔ‘망대(妄大)’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

1988년 = 대만 행정원이 대륙공작회를 열고 중국 인사가 대만의 친지를 문병하거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비정부 성격을 지닌 국제조직이 중국에서 개최하는 학술, 체육, 문화활동에 대해 대만인이 단체 혹은 개인적으로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계사 속의 오늘

동서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붕괴됏다(1989)

독일 통일과 동구권의 눈사태 몰락 그리고 소련 해체라는 '역(逆) 도미노 현상'의 첫 도미노 패가 된 베를린 장벽 붕괴는 조급함에서 비롯한 말 실수와 희망과 기대감이 유발한 과장 보도가 촉발시켰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 동베를린 시 서기는 지도부가 개편된 새 동독 공산당(사회주의 통일당) 중앙위원회의 선전담당 서기 자격으로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 중앙위원회가 동독인들에 대한 여행 자유화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햇다고 발표했다. 그는 " 중앙 위원회는 동독 국민의 자유로운 해외 여행을 보장하였다. 여행에 필요한 여권과 비자 발급은 최소한의 간편한 행정 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처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샤보프스키는 메모지를 들고 황급한 태도로 또 흥분한 ㅓ조로 발표했다. 그를 둘러싼 각국 기자들은 술렁거렸다.

당시 동독인들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영향으로 자유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국경선이 느슨해진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등을 통해 서독으로 대거 망명하고 있었다. 이같은 동독인들의 우회 이탈 사태는훈족에 쫓겨 로마 제국 영내로 몰려든 게르만 민족 대이동 사태처럼 동구권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서독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구권과 소련 등 공산 국가 전체의현안이 되었다.

이해 동독 정부 수립 기념일에 동독을 찯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에게강력하게 개혁을 촉구했다. 이런 국내외의 압력에 밀린 호네커는 이해 10월 18일 사임했고 후임에는 '황태자'로 불리어 온 '준비된 지도자' 젊은 에곤 크렌츠가 선출됏다. 새 동독 지도부는 여행 자유화 조치를 통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탈 사태를 진정시키려했던 것이다.

발표 직후 기자들이 술렁대며 어수선한 가운데 "언제부터냐"라는 영어 질문이 이탈리아 기자로부터 던져졌고 샤보프스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내가 알기로는...... 지체없이 지금부터(As far as I know ...... effective immediately, without delay)”라고 답했다. 여행 자유화 조치의 구체적 절차는 기관을 설치해 여행 비자를 심사한뒤 발급받은 사람에 한하여 허가 하는 것이었다.

샤보프스키는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다가 메모에 '즉시'라는 문귀를 보고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 문제의 메모 문귀는 '지금 즉시 발표하라'는 뜻이엇다고 한다.

샤보프스키는 당 중앙의 결정의 발효 시점이 '지금 즉시'라고 살짝앞질러 나가자는 생각에 이같이 말했으나 그는 산 정상의 조그만 눈덩이가 아래로 내려갈 수록 커지고 속도도 빨라지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기자의 질문은 동독인들의 우회 엑소더스로 더욱 철저하게 봉쇄된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서 언제부터 다시 왕래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것이엇다. "이에 "지체없이 지금부터"라는 답변이 돌아오자회견장의 각국의 기자들의 흥분에 기름을 끼얹었다. 기자들은 이 답변을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 대한 즉각적인 전면 개방'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보도되는 과정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로 순싟간에 수렴됏다.이는 다시 동독 국민들에게 부메랑처럼 전해졋다.

이에 동베를린 시민들은눈사태나듯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동독 경비병들은 몰려든 인파에 어리둥절하다가 결국 길을 터주었고 시민들은 베를린 담벽위로 올라갔다/ 이들은 담 위에서 망치 등으로 장벽을 부서뜨리는 퍼포먼스를 국제사회에 알렷다. 실수와 과장이 엄청난 역사를 만든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의 모멘텀인'바스티유 점령' 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파리 민중들이대규모 정치범 수용소라는 선동에 바스티유를 점령했으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잡범 몇 명뿐이엇다. 그러나 혁명은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더 거세게 폭발했다. .

동베를린 주민의서베를린 탈주를 막기위해 1961년 세워졋던 벨를린 장벽은 28년 만인 1989년 11월 9일 사실상 무너졌다. 그 물리적 실체의 완전 제거는 독일 통일 뒤를 기다려야 했지만 말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계기를 지칭하는 "샤보프스키 모멘텀'이란 말이 생겨났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의 불을 댕긴 샤보프스키는 장벽 붕괴 26 주년을 8일 앞둔 2015년 11월 1일타계했다.

베를린붕괴 뒤 그의 여생은 한마디로 '새옹지마엿다. '냉전의 신전'을 무너뜨린 '삼손'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은 잠시뿐이엇다. 독일 통일 7년 뒤인 1997년동독 시기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동독인을 사살하도록 지시한 사실이드러나 수감 생활을 해야햇다. 그는 몇해 동안 투병을 하다 베를린의 한 요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샤보프스키는 생전에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고 사과햇으며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숙하는 태토를 견지했다.

자신의 말 실수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데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 기념일을 8일 앞두고 생을 마친 것을 보면 그날은 그에게 회한의 날이었던 듯 싶다.

지체없이 지금부터'라는 샤보프스키의 말이 베를린 장벽 붕괴의 대장정의 '남상'이었다면 그대단원은 "환상의 종말이자 눈물없는작별"이 아닐까. 이는동독의 마지막 총리 토마스 드메지에르가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던날 베를린 장벽이 지키고자 했던 동독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한 말이다.

2017/11/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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