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17 23:49



[今天歷史-11월12일]김일성 韓戰 후 방중, 孫文 劉少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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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12일 북한의 김일성이 내각 수상과 원수(元帥)의 자격으로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한국전 종전 3개월 16일 만의 일이다. 중국 공산 세력이 베이징(北京)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때가 1949년 10월 1일이고 그 바로 다음해 6월25일부터 3년간 한국전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공산 정권이 중국에서 수립된 뒤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이때가 처음으로 추정된다.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소속 하급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들어간 이후부터 따지면 거의 10년 만의 중국 방문일 수도 있겟다.

한국전 와중에서 연안파의 김무정과 소련파의 허가이를 숙청하고 휴전 직후 남로당ㅢ 박헌영마저 제거, 최고 지도자의 위치를 확고히 한 그로서는 '금의환중(錦衣還中)'의 감회를 느꼈을 수 잇겟다.

기차 편으로 베이징에 온 김일성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중국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가오강(高崗),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가 베이징 역에 나왔다.

김일성은 13일 인민대회당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회견하고 이날 저녁에는 저우언라이가 회인당(懷仁堂)에서 개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어 14일부터 22일까지 북한과 중국 정부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회담에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12월 31일까지 제공되었거나 제공될 일체의 원조를 무상으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 1954년부터 1957년까지 4년간 8조 위안을 경제부흥을 위해 북한정부에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의 이 같은 환대는 한국전을 겪으면서 소련 스탈린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에 친소 통일 정권을 세우려 한국전 도발을 승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얼마 뒤 가오강이 숙청되는데 이는 동붃 지역, 즉 만주 지역이 친소 기지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얘방 사전 조치였다.

1866년 = 손문(孫文)이 광둥(廣東) 샹산(香山 : 현재 中山으로 개명되었다)의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다. 호와 자는 일신(日新)과 덕명(德明)이었는데 각각 중산(中山)과 일선(逸仙)으로 바꾸었다.

‘중산’이라는 호는 1897년 일본에 체재할 때 사용한 가명 나카야마 쇼(中山樵)에서 비롯됐다.

손문은 국민당으로부터는 ‘국부(國父)’로, 공산당으로부터는 ‘혁명의 선행자’로 기림을 받아왔다.

대만 독립을 추구한 민진당은 집권 기간 고중(高中 : 우리의 고등학교) 역사 교육과정에서 대만사와 중국사를 분리하면서 손문을 중국사에 편입시켜 파문을 불러 일으킨적이 있었다.

또한 2014년 2월 22일에는 대만 독립파 30여 명이 대만 타이난(臺南)
시 공원에 세워져 있던 손문의 동상을 끌어내려 페인트로 훼손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9년 = 중국 공산당 부주석 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지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던 류샤오치(劉少奇)가 카이펑(開封)에서 병사했다. 1898년 생으로 향년 71세였다.

1966년 5월 10일 문화대혁명 발동 이후 실각한 류샤오치는 린뱌오(林彪)와 4인방 세력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1969년 4월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9대)에서는 당에서 제명되고 일체의 공직을 박탈당하는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마오쩌둥의 고향 바로 북쪽에 위치한 후난(湖南)성 닝샹(寧鄕)현 출신으로 후난 창사(長沙) 제1사범을 나왔다. 마오쩌둥과는 동향에 동문이다.

모스크바 동방대학 유학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류샤오치는 마오쩌둥 사상체계 수립에 큰 기여를 한 이론가이며 국민당 지배지역에서 공산당 지하활동을 하며 능력을 발휘하였다.

1939년 옌안(延安)에서 ‘공산당원의 수양에 관해서 논함’이라는 일련의 강의를 진행했고 1948년에 발표한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는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1959년 국가주석 겸 국가 국방위원회 주석이 되고 1965년 재선됨으로써 마오의 후계자의 위치를 굳히는 듯 했으나 다음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에서 당내 실권파의 거두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마오의 사후 덩샤오핑(鄧小平) 체제가 자리를 굳힌 이후인 1980년 제11기 5중전회 결의로 사후 복권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 군정청 사령관을 지낸 존 하지 장군이 사망햇다(1963). 1893년 생으로 향년 70세였다.
하지는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이된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한국 정부가 수립된 1945년 8월 15일까지 3년간 미군 제24 군단장으로서 미군이 괂할하던 한반도의 북위 38선 이남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햇지만 그가 죽엇을 당시 한국인들을 그의부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미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국전이 종전되던 해인 1953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하지에 대한 한국민의 무관심은 다음해에 사망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 대한 한국민의 반응과 극과 극으로 대조된다.

하지는 해방 공간 정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박사와 대립하고 김규식 선생을 내세워 좌우 합작을 추진하엿다. 이는 한국민 의대다수의 지지를 받지도 못햇고 또국제적 현실에 부응하는 것도 아니엇으며 결국 실패했다.

그의정치적 행보는 2차 대전 종전후 인도 대륙 독립 과정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ㄹ 막기위해 거중 조정했던 영국의 마지막 총독 마운트배튼 경과 비슷햇지만 두 사람 사망 당시 인도와 한국의반응은 하늘과 땅처럼 달랏다. 197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당숙이기도 한 마운트배튼 경이북 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창하는 북아일랜드공화군(IRA)의테러로사망햇을 때 인도 정부는읹도 전역의 모든 관공서에 조기를 내걸고 그의 죽음을 애도햇다. 한국민

에게 하지는 한국을 사랑하지도 또 한국을 이해하지도 못햇던 ' 냉정한 또 유능하지도 못햇던'하얀 얼굴의 마지막 총독'으로 뇌리에 자리매김되었으며 그러한 인식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존재이나 너무나 빨리 또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망각 속에 묻어버린 인물'이다.

2017/11/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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