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17 23:49



[今天歷史-11월13일] 亂集資, 대약진 운동,파리 IS 테러

아라파트 유엔 연설

1995년 11월 13일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시 중급법원은 고율의 이자를 내세워 거액의 불법자금을 조성한 일당 6명 중 주범인 덩빈(鄧斌)과 야오징이(姚靜漪) 등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고 공범 4명에게도 집행연기부 사형 등 중형을 선고했다.

덩빈 등은 상소했으나 원심이 확정되었고 덩과 야오는 11월 29일 처형됐다.

덩빈은 1989년 8월부터 1994년 7월까지 신싱(新興)공사의 총경리 등으로 있으면서 공범자들과 함께 월 5~10%의 고율의 이자율을 약속하며 12개 성, 시로부터 32억 위안을 모집했다.

이들은 368명의 출자단위와 31명의 개인으로부터 이 같은 막대한 돈을 모집하여 12억 위안의 경제손실을 야기했다. 이들은 이러한 사금융 행위를 위장하기 위해 겉으로는 '일회용 주사기'와 '의료용 라텍스 장갑'에 대한 투자 계약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이들의 모집 금액은 1994년 11월 역시 난집자(亂集資)와 관련하여 처형된 창청 기전공사(長城 機電公司) 총재 선타이푸(沈太福)가 모집한 액수 8억 위안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무려 20만 명으로부터 연 이율 24%를 내세우며 공개적으로 자금을 모집했던 선타이푸 역시 신기술에 대한 일반 투자자들과의 계약 행위라고 주장했었다.

1992년 남순강화 이후 경제가 과열되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뒷감당 못할 사금융 행위가 빈발했다. 중국 당국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를 ‘난집자(亂集資)’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대처하였다.

선타이푸는 이에 대해 당시 인민은행장 리구이셴(李貴鮮)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하는 등 전례없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국외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된 뒤 처형되고야 말았다. 한편 이 같은 금융혼란은 개혃파 주룽지(朱鎔基) 부총리가 인민은행장을 겸임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今天歷史-4월11일] 上海임시정부, 애치슨-맥아더, 沈太福

1957년 =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사론에서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시발로 간주된다.

'대약진'이란 용어는 내부적 으로 ' 7년 안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슬로건 을 내세운데서 비롯됐다.

대약진 운동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로 1958년부터 1960년 초까지 전개되었으며 노동력 집중을 통해 철강 산업 등을 발전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하자는 대중주의 경제 부흥 운동이다.
대약진운동은 인민공사 설치와 함께 수레의 두 바퀴 처럼 함께 추구됐으며 마오의 낭만적인 혁 명주의가 표현된 정책이었다.

대약진 운동을 추진하면서 공업생산의 지표를 과도하게 높였는데 그 결과 급격한 공업노동력 수요로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엿다. 필수품의 공급부족이 일어났으며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농업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잘못된 정책의 과도한 추구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농업생산량의 부족에 설상가상으로 연이은 자연재해와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경제원조 중단등의 외부적 모순이 겹치면서 수천만 명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과다하게 성장시킨 중화학공업은 처음 설정한 경제지표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성장결과를 보이면서 대약진운동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마오는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사임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여 동안의 대약진운동은 농ㆍ경공업의 퇴보와 중화학공업의 과다발전이라는 기형적 결과를 낳으며 중국 전체 경제적ㆍ문화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1948년 = 중국 국민당 원로 천부레이(陳布雷)가 난징(南京)에서 자살했다. 향년 59세였다.
세계사 속의 오늘

프랑스 파리에서 이슬람 국가(IS)에 의한 동시 다발 테러가 발생,ㅔ백32명이 사망했다(2015). 이날은 13일의 금요일이엇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장이 PLO 대표로서 유엔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했다(1974).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에 대해 테러를 감행한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뮌헨 올림픽 테러사건은 1972년 9월 5일 제20회 뮌헨 하계올림픽대회 때 PLO 산하 팔레스타인 게릴라조직의 하나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 숙소로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테러범들은 이스라엘에 억류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 23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2명을 사살, 9명을 인질로 하여 국외로 탈출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서독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인질 전원과 게릴라 5명, 경관 1명, 헬리콥터 조종사 1명이 사망하고, 게릴라 3명이 체포되었다. 사건 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3년 4월 이스라엘 기습부대가 베이루트에서 팔레스타인게릴라 3명을 암살했고, 이후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정보부가 게릴라에 대한 복수에 너무 지나치게 힘을 기울인 결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의 정보활동이 소홀하게 되어, 1973년 10월 전쟁에서 아랍 측의 선제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은 전쟁초기 심각한 위기에 몰렸으나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전세를 가까스로 반전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태 발전은 국제사회가 PLO의 존재를 인정하는 쪽으로 흘러갔으며 아라파트의 유엔 연설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1974년 11월 13일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아라파트는 이 유엔 총회 연설을 “오늘 나는 올리브 가지와 자유투사의 총(freedom-fighter's gun)을 함께 갖고 왔다. 내 손에서 올리브 나뭇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 반복하겠다. 올리브 가지가 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Today I have come bearing an olive branch and a freedom fighter’s gun. Do not let the olive branch fall from my hand. I repeat: do not let the olive branch fall from my hand.)”는 말로 끝맺었다. 국제 테러집단의 수괴에서 피압박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유엔 총회 연설 20년 뒤인 1994년 아라파트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등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1993년 9월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팔레스타인 자치 협정을채결했는데 노벨평화상 수상은 이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아라파트는 노벨 평화상 수상 10년 뒤인 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재직 중 타계했다. 1929년 8월 4일 생으로 향년 75세였다.그의 사망일은 유엔 총회 연설 30 주년을 이틀 앞두고서엿다.

아라파트의 인생 역정은 그가 일생 동안 투쟁한 이스라엘의 대표적 테러리스트 출신 정치가 메나헴 베긴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베긴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다음 해인 1943년 비합법적인 군사조직인 이르군을 조직, 테러 활동을 통해 이스라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총리에 오른 베긴은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9년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을 체결, 이집트와의 긴 전쟁 상태를 종결시켰으며 1978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베긴과 아라파트의 ‘성공 신화’는 정치적 억압을 겪고 있는 소수민족의 지도자들에게 테러리즘에 대한 의존 경향을 심화시켜 테러리즘의 국제화와 대형화를 가져왔다.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국제 테러리즘이 세대교체와 함께 가공할 파괴성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상황이던 2004년 구세대 테러리스트가 무대에서 퇴장, 역사 속으로 밀려들어간 것이다. 그가 유엔 총회에서 연설한 지 30년 뒤이고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지 10년 지난 때였다.

2013년 그의 유혜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돼 그가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됐다는 의혹을 재점화하였다 .
아라파트 말년 이스라엘의 한 장관은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가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않자 아라파트 제거도 문제 해결의 한 옵션이 될 수 잇다고 말한 바 있다.

이스라엘 극우 과격파에 의한 라빈 암살과아라파트 의문사는'다윗'이 '날이갈 수록 '골리앗'으로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아라파트를 뛰어넘은 이슬람 과격파는 알 카에다, 탈레반을 거쳐 이스람 국가(IS)로 보다 악성으로 진화하고 있다. 금도를 넘는 테러 자행과 아라파트와 베긴처럼 정치가로 변신하지 못한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 탈레반의 오마르 그리고 IS의 알바그다디는 제거되거나 추적 중에 죽었고 제거의 표적이 되고 있다.

'올리브 가지는 무가 떨어뜨렷는가'.

샤를르 드골이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됐다(1945). 권력 의지가 강했던 드골은 의원 내각제 하의 의전적 대통령 직에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칩거햇다.

프랑스가 1950년대 말 알제리 사태로 식민주의 청산이라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햇을 때 프랑스 국민은 다시 그를 불렀고 그는 헌법을 대통령제로 바꾸고 그에 걸맞는 대통령으로 돌아온다.

드골의 제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황제'에 버금갈만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패망한 뒤 세워진 비시 정권의 권력 구조와 놀랄 정도로 유사햇다. 비시 정부의 국가 원수에 옹립된 1차 대전의 영웅 페탱 원수는 2차 대전 전야 3공화정 내각제 하에서 좌우파의 대립과 정쟁으로 독일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햇다는 인식하에 국가 원수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였고 또 의회의 권한 과 인신 자유 등에제한을 두었다
페탱은 파시스트가 아니었으나그가 설계한 통치 체제는 나치 독일의 총통제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햇다. 그러나히틀러 체제ㅢ 원조가 나폴레옹 1세의 제1 제정과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이니 패탱 체제의 뿌리는 프랑스전통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드골은 종전 후 자신의 상관이기도 햇던 페탱을 나치에 협력햇다는 죄로 법정에 세워 사형 언도가 내려지게 했다. 그러나 드골은 페탱이 대서양의 외로운 섬에서 유폐 중 사망한 지 불과 몇 년 이 못가 다시 프랑스에 위기가 찾아왓을 때 그의 정치 노선을 부활시킨 셈이다.

드골의 선택은 드골이 사망한 뒤 지금까지 드골 헌법 아래서 우파와 좌파의 사회당이 번갈아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 프랑스에 맞는 것임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하겟다.

2017/11/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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