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17 23:49



[今天歷史-11월14일]청러 北京조약, 楊開慧 探病 光緖帝

1860년 11월 14일 청(淸)의 흠차대신(欽差大臣) 혁소(奕訴)와 러시아의 이그나티에프 공사 사이에 베이징(北京)에서 ‘청-러 베이징 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1858년의 아이훈(璦琿)조약에서 국경확정 때까지 양국에서 공유(共有)하기로 한 우수리강 동쪽의 40만 ㎢의 연해(沿海)지역을 러시아령으로 할 것, 쿠룬, 카슈가르, 장자커우(張家口) 등을 무역지로서 인정할 것 등으로 되어 있다.

러시아는 이후 이 조약의 모호한 규정을 근거로 신장(新疆)지역에서 중국이 관할해온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중국은 청조가 ㅐ로우 호 사건에서 발단한 제2차 아편전쟁(1857)과 태평천국의 난(1850~1864) 등 내우외환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는 사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두 약 100여만 ㎢의 영토를 ‘강탈’해 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1930년 = 마오쩌둥(毛澤東)의 처 양카이후이(楊開慧.사진) 국민당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때 나이 29세였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의 두 번째 처이다. 마오쩌둥에게는 고향에서 부모가 짝을 맺어 준 첫 부인이 있었으나 마오쩌둥은 장정후 옌안 시절 에드가 스노와의 회견에서 "관심도 없고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냉정하게 언급했다. 하지만 이 여성은 족보에 마오의 첫 번째 부인으로 올라 있다.

이해 10월 체포된 양카이후이는 당시 8살이던 마오안잉(毛岸英)과 함께 창사(長沙) 경무사령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들은 마오와 이혼하겠다고 발표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양카이후이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오는 양카이후이의 죽음을 전해듣고 “카이후이의 죽음은 백사람으로도 갚지 못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룽(張戎)과 존 할러데이 부부가 2005년 출간한 ≪마오쩌둥-알려지지 않은 이야기(MAO TSE TUNG- The Unknown Story)≫에서는 마오가 양카이후이를 구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의 죽음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장룽은 1952년 태어났으며 문혁을 경험한 뒤 영국에 유학, 존 할러데이와 결혼한 뒤 영국에 정착했다. 1991년에 영문으로 출간한 ≪대륙의 딸(Wild Swans)≫이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양카이후이는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인으로 19살 때인던 1920년 창사 푸샹(福湘)여중에 입학했다. 그해 겨울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아버지 양창지(楊昌濟)의 제자 마오쩌둥과 결혼했다. 1921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마오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는 그녀가 총살된 뒤 두 형과 떠돌아 다니던 중 잃어버려 끝내 찾지 못했다.

1988년 = 중국인이 대만을 첫 ‘문병 방문(探病)’하였다.

주인공은 중국에 거주하는 첸이(錢易)로 그녀는 대만에 있는 아버지 첸무(錢穆)를 병문안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것이다.

1908년= 청의 광서제(光緖帝)가 유폐되어 있던 자금성(紫禁城) 영대(瀛臺)에서 사망했다. 향년 38세. 서태후로 불리는 자희태후(慈禧太后)가 죽기 하루전으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희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광서제는 아편 전쟁 이후 중국황제 중 유일하게 중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인물이다. 1898년 6월 11일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서를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변법(變法)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블과 3개월 10일 뒤인 9월 21일 자희태후(서태후)의 정변으로 실권한 뒤, 죽을 때까지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친 아들 동치제의 4촌아우로 동치제 사망 뒤 서태후의 양자로 입적 되어 3세 때에 후임 황제가 되었다. 서태후의 남편 함풍제의 조카로 생모는 서태후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백일유신’으로 불리는 그의 변법개혁의 좌절로 청조는 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 버렸다. 광서제의 실패 원인으로는 여러 객관적 원인과 함께 그의 과단성의 결여도 지적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오늘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을 철권 통치하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발전을 이룩한 박정희가 태어났다(1917).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5· 16 군사 정변을 통해 1961년 집권뒤 낙후한 농촌 국가 대한민국을 산업 국가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군사 독재 정권을 이끌었다. 인권 탄압과 유신 독재 체제를 수립, 무자비한 독재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스 없다.
그러나 한국전 참혹한 페허 속에서 또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그의 독제는 불가피하였다는 평가도 나름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잇다.

그는 독재 정치로 정치를 강제적으로 안정시킨 배경 아래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성취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으로 재직 중 육사 동기이자 동향인 측근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됏다.. 향년 62세였다.

[今天歷史-10월26일] 박정희 암살과 한국의 핵개발 중단

2017/11/1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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