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2월15일]스노...美스파이로 보고도 中共친구로

2월15일은 청나라 말 실권자 이홍장이 태어난 날이고 '중국의 붉은 별' 작가 에드가 스노가 타계한 날이다.

스노의 일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세계에 처음 알린 미국인 저널리스트로 출발, 미국 스파이로 간주되어 중공 선전도구로 활용되다가 중국공산당의 친구로 묻혔다'가 되겠다.

이홍장에 대해서는 '정복 왕조' 만주족의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한인 관료로 그의 능력은 연명하는데 그쳤으며 본의 아니게 정복왕조가 망하는 기초를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스노의 부인 님 웨일즈에의해 우리나라에 알려진 김산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망한 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항일 독립 투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일본 스파이로 몰려 죽었고 사후 중국공산당이 복권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 공로자로 훈장을 추서했다'로 정리할 수 있겠다.<스위프트-버크왈드> '

東北抗日聯軍, 蘇 아프간 철군, 李鴻章

1935년 2월15일 중국 동북지역의 무장역량이 항일연군(抗日聯軍)으로 통합되었음이 선언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한 동북 지역(만주)의 무장세력으로 북한 김일성(金日成)이 참여한 것으로 인해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만주사변(9.18 사변) 후 중국공산당은 인민에게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항일 유격대와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의용군이 포함된 동북 인민혁명군을 조직하도록 했다.

항일연군은 가장 병력이 많았을 때의 수는 5만5000명에 달했다고 중국 기록은 주장하고 있다.

‘1군’부터 ‘7군’까지 편제되었으며 양징위(楊靖宇), 왕더타이(王德泰), 자오상즈(趙尙志), 저우바오중(周保中), 샤윈제(夏雲傑), 그리고 리쉐푸(李學福)이 각각 군장(軍長), 즉 군사령관을 맡았다.

김일성은 초기에 최현(崔賢)과 함께 왕더타이 휘하의 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 사실상 최고 사령관인 양징위가 일본군에 사살됐을 때는 그의 휘하에 있었다.

양징위 전사 뒤에도 김일성은 파르티잔 활동을 전개하다가 최현, 최용건과 김책 등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갔다.

김일성은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으로 지칭했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은 1990년대 말 수십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 시기를 '(제2의) 고난의 행군'으로 명명했다.

현재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김일성의 손자다. 장성택 처형을 전후한 2013년 말부터 한동안 북한 지도부 2인자로 부상하기도 했던 최룡해는 최현의 아들이다.

최룡해는 이후 일종의 숙청인 '혁명화 조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복권,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 부위원장에 뽑혀 다시 2인자의 위치로 복귀했다.

[今天歷史-2월23일] 紅高粱, 楊靖宇, 梁啓超

1989년 2월15일 =소련군의 마지막 부대가 그라모프 중장의 인솔 아래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이는 1988년 4월 체결된‘아프간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협정’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소련의 베트남전’이 되었던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이 완전 손을 떼기로 한 결정은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내려졌다.

중국은 소련에 대해 관계 회복의 전제 조건 하나로 아프간 철군을 주장했으며 소련군의 아프간 철군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해 5월15일 고르바초프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아프간에 대한 소련군 개입의 발단은 1978년 4월 공산 세력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제공했다.

아프간 왕정을 폐지하고 최고 실권자가 된 다우드 대통령 정권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공산당) 내부에서 죽고 죽이는 살벌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1979년 9월 인민민주당 제1총재로 대통령을 맡고 있던 타라키가 총리를 맡고 있던 아민에 의해 피살됐다.

타라키는 친소 성향인 반면 아민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아민은 반공적인 이슬람 세력과의 협상을 모색하려 한 인물로 소련에게는 '아프간의 마오쩌둥'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소련군은 1979년 12월 아프간을 침공, 아민을 처형하고 해외 망명 중이던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이것이 소련의 아프간 전 개입 시작이었다.

소련군이 침공하자 아프간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무자헤딘에 의한 게릴라전이 전개되었고 결국 소련은 막대한 군비 지출과 인명피해를 감당할 수 없어 철군하게 된 것이다.

9년여의 아프간 전쟁으로 100만명이 사상했으며 5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차 철군이 이루어진 1988년 8월15일 당시 아프간 주둔 소련군 병력은 10만명이었다.

1972년 2월15일 중국공산당의 실체를 세계에 처음 알린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Edgar Parks Snow)가 타계했다. 1905년생으로 향년 67세였다.

스노는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출생으로 1925∼26년 미주리대학,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뒤, 1928년 상하이(上海)에 들러 '차이나 위클리 리뷰'의 편집차장이 되었으며, 그 뒤 10여 년에 걸쳐서 중국 보도에 전념하였다.

1932년에는 '극동 전선'을 저술한 외에 미국·영국 각 신문에 통신을 보냈다. 1934∼35년에는 옌징대학(燕京大學) 강사를 지냈고, 1936년 손문(孫文) 미망인 쑹칭링(宋慶齡)의 소개로 서방 측 기자로는 처음으로 중국공산당 해방구에 들어가 1937년 '중국의 붉은별'을 출판했다.

1941년 '아시아 전쟁'으로 중·일 전쟁의 실태를 보도하였고 그 뒤 '새터디 이브닝 포스트'의 특파원으로 소련·중국·인도 등을 방문하고 '우리편 민중(1944)', '소비에트 세력의 형태(1945)'를 썼다. 1946년 미국으로 귀국했다.

1960년에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오늘의 중국(1961)'을 저술하였고 그 뒤에도 중국을 방문하여 수뇌부와 회견하고 독자적인 보도를 하였다.

해리슨 솔즈베리는 '새로은 황제들'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스노를‘미국의 첩자’로 여겼다고 적고 있는데 마오는 그런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의 주장을 미국과 세계에 알리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69년 10월1일 건국절 기념식 때 중국은 스노를 중국의 지도자들과 함께 천안문 망루에 함께 서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는 미국에 대한 화해 제스처였다.

추억...중국외교, 그리고 스노와 키신저 2006/02/15 14:40

이해 3월 소련 국경에서 대규모 군사충돌로 소련의 핵공격에 대한 위기감에 싸여 있던 중국 지도부는 미국과 화해를 모색했고 이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스노를 활용했던 것이다.

스노의 유언에 따라 유해 일부는 베이징(北京) 대학의 웨이밍(未明) 호반에 묻혔다. 그 묘지의 묘비명은 ‘중국 인민의 미국인 친구 에드가 스노의 묘(中國人民的美國朋友埃德加·斯諾之墓)’였다.

스노가 1937년 옌안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 부인인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도 동행했다.

'님 웨일즈'라는 필명의 저널리스트인 그는 여기서 평안북도 용천(龍川) 출생의 조선인 혁명가 김산(金山 : 본명 張志樂, 1905~1938)을 만나 인터뷰하였다.

김산은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했으며 일본, 만주 , 상하이 베이징 광둥(廣東) 등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공산혁명에 참여했고 옌안까지 오게 된 것이다.

김산은 그러나 이 인터뷰가 있은 다음해인 1938년 캉성(康生)이 주도하는 숙청 와중에서‘트로츠키파'로 몰려,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님 웨일즈는 이로부터 3년 뒤인 1941년 김산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Song of Ariran'을 존데이 출판사를 통해 펴냈다.

책은 일본어로 번역되었는데 1950년대 이를 일본 도쿄(東京) 의 한 서점에서 발견하고 국내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당시 외신기자였던 이영희였다.

이 책은 1980년대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대학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83년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시인이며 계보학자이기도 한 님 웨일즈는 이밖에도 여러 권의 저서를 냈으며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 오르기도 했다.

1823년 = 청말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이 태어났다. 이홍장은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출신이다. 전 중국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도 안후이성 출신이다.

태평천국 난 당시 회군(淮軍)을 조직하여 공을 세워 청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다. 1870년 증국번(曾國藩)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직예(直隸) 총독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주도하였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논리에 따라 근본적인 개혁을 거부한 채 서양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군대를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군비를 확충하면서도 서구열강과 대결에서는 양보와 타협을 항상 주장하였는데 이는 후진타오 중반기까지 중국의 외교노선인‘도광향회(韜光養晦)’와 북한 정책기조인‘강성대국(强盛大國) 건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1895) 패배로 그의 양무운동은 파탄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북양함대는 궤멸되었다.

이후 그는 근본적 개혁을 주장한 변법파(變法派)를 탄압하고 민족주의적 성향의 의화단(義和團)을 진압하는 등 서태후(西太后)의 반동적인 정책에 적극 협조했다. 1901년에 타계했다.

2018/02/1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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