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0:47



[今天歷史-3월12일]孫文 사망...유촉 거부, 혁명 배반

한중수교에 따른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 방문 취재를 위해 1992년 9월 말 베이징을 방문했다가 중국이 건국절로 기리는 국경절 기간 베이징에 머무르게 됐다.

10월 첫 주 어느날 천안문 광장을 들렀다가 손문의 대형 초상화가 전시된 것을 보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공산중국에서도 신해혁명 발발일인 쌍십절을기념한다는 사실은 중국에 오기 전에 10월10일을 전후 관련 외신 전송사진 통해 접해 왔기에 이미 알고있었다.

필자가 외신부에서 근무할 때인 1991년 10월10일 베이징발 외신사진 한 장은 손문의 초상화를 뒤에 걸어 두고 양상쿤 국가주석 등 중국 정부 고위 인사들이 신해혁명 기념 좌담회에 여는 장면이었다.

공산중국에서도 자유중국의 국부로 추앙되는 손문의 업적을 기린다는 사실에 대해 이처럼 사전 지식을 갖고 있었으나 천안문 광장에서 접한 초상화가 생각보다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몰론 천안문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의 초대형 초상화에는 훨씬 못미치기는 하였으나 광장을 찾는 사람의 시선을 확 빨아들일 정도의 아주 큰 초상화였다.

평양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에 이승만 박사의 초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천안문 광장의 손문 초상화를 바라볼 때 평양에서는 이승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의 초상화는 물론 광복 전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의 초상화조차도 결코 전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접점 제로라는 생각에 씁쓸함에 젖다가 남북한이 공동으로 기리는 역사적 인물이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라는이야기를 들은 기억을 이끌어냈다. '발가락이 닮았다' 식이다.

멸만 흥한을 깉치를 내건 손문은 신해혁명을 계기로 정복 왕조 이민족 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는 서세동점 이래 외세의 경제적 수탈과 모욕을 받아온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손문은 그 방법으로 소련과 연합과 공산당과 합작을 채택했고 후계자들이 받들기를 바랫다.

손문의 뒤를 이은 최고 지도자들은 이를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이어받았고 따랐다. '절반의 수용과 절반의 거부 또는 배반'이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베제하는데 성공했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손문이 전략적으로 손을 잡았던 소련의 영향력을 지워내 손문의 꿈을 확대 성취했다.

그러나 손문은 공산당과 공존이었지 공산체제로 징검다리 역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혁명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바는 중국 버전의 미국 합중국이었을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가 망명 중 이오시프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 소련 을 지켜보며 ' 배반당한 혁명'을 썼듯이 하늘의 손문은 '거부된 유촉'이요 '배반당한 혁명'이라고 되내고 있지 않을까. <스위프트-버크왈드>

王震 사망, 冷戰의 시작

1925년 3월12일 오전 9시30분 중국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손문(孫文 : 쑨원)이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손문은 양안 모두에게 존경을 받아온 민족 지도자다. 공산정권은 10월10일 신해혁명 기념일에 천안문 광장에 그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대만에서는 총통은 취임에 앞서 단상 뒤에 걸린 그의 대형 초상화로 돌아서서 오른손을 들어짚은 채 선서한다.

대만독립을 강령으로 삼는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도 2차례의 취임식에서 이러한 관행을 밟았다.

민진당 집권 기간 수도 타이베이의 인근 국제공항을 '장제스 공항'에서 '타오위안 공항'으로 개칭하는 등 일련의 장제스 격하 조치를 취했으나 손문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다.

하지만 대만독립 강경파들을 중심으로 '손문 신화'에 도전하는 행동이 점증하고 있다. 2014년 2월22일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 수호 국민투표 연맹' 회원 30여명은 타이난시 공원에 세워져 있는 3m 높이의 손문의 동상을 끌어내려 페이트로 훼손 양안 국민에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정부가 직접 나서 손문에 대한 예우를 격상하고 있다. 동상 훼손 사태가 발생한 직후 중국 정부가 비난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 한 예다.

손문은 1866년 광둥(廣東)성 샹산(香山)(현재 이름은 중산中山)에서 태어났다. 자는 일선(逸仙)이며 중산(中山)은 호이다.

그는 유촉에서“민중을 각성시켜 연합하게 하여 세계 무대에서 우리 민족이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공동으로 분투 노력하라”고 촉구했다.

손문은“앎은 어렵지만 행동은 쉽다(知難行易)"라는 주장을 펴며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만이 어렵다(知之非艱 行之惟艱)"라는 전통적 사상을 비판했다.

중국공산당은 그를 '위대한 혁명 선행자(先行者)'로 표현하고 있다.

손문은 가난한 농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형 손미(孫眉 쑨메이)에게로 건너갔다. 기독교 계통 의학교에서 공부하고, 서양문화를 체득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의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 수령인 정사량(鄭士良)과 만났다.

1887∼92년 홍콩에서 서의서원(西醫書院) 재학 중 혁명에 뜻을 두고, 1892년 마카오·광저우에서 개업하였으며, 동시에 반청운동(反淸運動)을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형 손미 등의 지원 아래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화교(華僑)·회당(會黨)과도 제휴하고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최초의 거병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청(淸)나라 공사관에게 체포되었으나, 서의서원 재학시의 옛 스승 등에 의해 구출되어 '런던피난기'를 영문으로 발행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체류 중에 견문을 넓히고, 유럽 선진국의 사회적 모순에 눈을 떠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착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 및 필리핀 독립 원조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1900년에 제2차 거병(惠州事件)을 꾀하였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

손문이 두번째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 일본에 유학한 학생이 증가하여, 그 혁명화가 진척되었는데, 중국 국내에서도 광복회(光復會)와 화흥회(華興會) 등의 혁명조직이 생겼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도쿄에서 여러 혁명세력을 규합하여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하고 삼민주의와 혁명방략(革命方略)을 정하였다.

그 뒤 1911년 10월 신해혁명(辛亥革命) 발발 때까지 중국 중·남부 각 지방에서는 10회가 넘는 반청 무장봉기(反淸武裝蜂起)가 되풀이되었다.

이 동안 손문은 제3, 제4의 세계여행을 하였는데, 11년 10월 군자금 모집을 위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여, 서유럽을 순회하고 귀국하였다.

남방 혁명세력들에 의해 임시총통으로 추대되어 1912년 1월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뒤 남북화의에 의하여 청조 멸망을 조건으로 정권을 원세개(袁世凱 :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일선정치에서 거리를 두고 사회개혁 운동에 주력하였으나 1913년 3월 쑹자오런(宋敎仁 : 암살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에 실패하고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였다. 쑹칭링(宋慶齡 : 송경령)과 재혼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16년 원세개가 사망한 뒤 군벌혼전(軍閥混戰) 상태 아래서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일으켰으며, 세 번째로 광저우를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썼다.

1924년 1월 중국국민당을 개편한 뒤 중국공산당과 제휴(國共合作)하고, 노동자·농민의 결속을 도모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1월 북상선언(北上宣言)을 하고,북상의 길에 올랐으며 도중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였고, 국민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베이징〔北京〕에 들어갔으나, "혁명은 아직도 이룩되지 않았다"고 하는 유촉(遺囑)을 남긴 채 25년 3월 베이징에서 죽었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베이징 근교의 시산(西山)에서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으로 이장되었다.

손문의 정치사상은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 자연과학(진화론), 프랑스 혁명사상(인민주권설), 영국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등)을 도입하여, 중국 현실에 적합하게 한 것이며, 민족독립과 인권존중 및 사회평등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시켰는데 마오쩌둥(毛澤東) 등이 신민주주의 기본이념으로 이어받았다.


1993년 = 중국 국가부주석을 지낸 왕전(王震)이 광저우(廣州)에서 사망했다. 향년 85세. 그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강경파 중 강경파였다.

1782년 = 四庫全書 편찬 완료.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 H.S. 트루먼 대통령이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냉전의 막을 올린 것으로 평가되는 '대외정책에 관한 일반원칙'을 밝혔다.(1947)

이 선언에서 트루먼은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라고 비판하고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소련의 침략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이들 국가에 대한 억 달러의 긴급 원조자금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이날 선언을‘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렀으며 미소 냉전의 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 외교정책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소련을 동맹국으로 호칭했으며 다만 구체적 문제에 관해서만 소련을 공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날 트루먼은 공식적으로 소련이 미국의 주요 적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한해 앞선 1946년 3월 5일 총리직에서 물러나 있던 처칠은 트루먼과 함께 미주리 주의 플턴 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소련을‘철의 장막’이라고 지칭했다.

‘철의 장막’이란 용어는 나치 독일의 선전상 괴벨스가 패전 직전에 작성한 한 논문에서 처음 쓴 용어인데 처칠이 이를 차용한 것이다.

영국은 그리스와 터키 정부가 공산세력의 준동을 진압하도록 군사원조를 지원해 왔으나 1947년에 이르러서는 이를 계속할 여력이 없게 됐다.

영국 외무부는 1947년 2월 21일 미 국무부에 3월 말 이후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 경제원조가 중단된다고 통보하고 미국이 자신들을 대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미국이 이런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트루먼 독트린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2018/03/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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