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6/19 09:21



[今天歷史-3월13일]인구 자원 환경 좌담...하나→둘 이상

마오쩌둥의 인구정책이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다면 덩샤오핑의 그것은 '하나만 잘기르자'였다.

시진핑의 해법은 '거꾸로 세워진 인구 피라미드 바로세우기'로 요약할 수 있다.

덩샤오핑 시대 이래 꾸준히 추진돼온 '한자녀 정책'은 중국의 인구폭발 재앙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고령화 사회로 진입이 고속화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구구조의 기형화를 초래하여 중국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웟다.

인구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장기적 미래에 불안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최근 이민제한 정책이 시도되기는 하나 이민으로 세워진 미국은 여전히 '이민에 의한 이민을 위한 이민의 나라'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분명하다. 반면 중국에서 이민 허용은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초고령 사회로 이미 접어든 일본은 이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 인구구조를 개선하기가 매우 힘들어 미래가 중국 못지 않게 불안하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첫째 아니면 두 번째의 저출산 국가이기는 하나 이민에 대한 거부감이 그다지 높지 않고 남북통일이라는변수가 있어 중국, 일본에 비해 인구구조의 개선 측면에서는 비교 우위를 갖는다고 분석되고 있다. <盲瞰圖子>

延安 공방전, 영국 공산중국과 대사교환 수교, 천왕성·
명왕성 발견


1999년 3월13일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최로 인구-자원-환경 좌담회가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되었다.

좌담회에서 장쩌민(江澤民)이 담화를 발표하고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리루이환(李瑞環), 후진타오(胡錦濤), 웨이젠싱(尉健行), 리란칭(李嵐淸) 등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 다수 참여하였다.

이날 좌담회는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에 몰두, 환경과 자원 문제 등을 소홀히 했던 중국 지도부가 전통적인 우선 관심사항인 인구 문제와 함께 자원과 환경을 핵심 과제로 올려 놓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장쩌민은“인구는 많고 자원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며 환경오염은 심각하다”는 말로 중국의 상황을 압축하여 설명했다.

인구문제와 관련, 장쩌민은 계획적 생육(生育) 필요성과 인구 증가를 계속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원에 관해서는 보호와 관리가 엄격하고 또 엄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보호하며 개발하고 개발하며 보호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환경보호와 관련, 장쩌민은 2010년까지 환경이 악화하는 상황을 개혁하여 도시와 농촌의 환경상황이 뚜렷하게 개선되게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중국 지도부는 인구억제를 견지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1980년부터 강력히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이 수십년 간 지속하면서 인구구조의 기형화와 이에 비롯한 모순이 현재화하였다.

남녀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과 신생아 저출산에 따른 노동인력의 급격한 감소와 이로 인한 고령화 사회로 이행 가속화 등이었다.

결국 단계적 개선을 거쳐 2016년부터 '한 자녀 정책'을 완전 폐지하고 두 번째 자녀를 전면 개방하였다.

1985년 =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은 ‘과학기술체제개혁에 관한 결정(關于科學技術體制改革的決定)’을 발표했다.

결정은 경제건설이 과학기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 아래 과학기술 공작은 경제건설의 전략방침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과학기술 발전 규율을 존중하여야 하며 중국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과학기술 체제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7년 3월13일= 국공내전 초기 주요 전투인 옌안(延安)공방전이 개시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중재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5년 10월10일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 간 '충칭교섭(重慶交涉)'을 기초로 내전을 피하기 위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하고 이 협정에 근거하여 1946년 1월에 정전(停戰)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같은 해 7월 이후에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옌안 공방전은 압도적 수적, 물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민당군이 공산군에 대해 공세를 가하던 내전 초기의 중요 전투이다.

종전 후 공산군이 장악했던 도시 지역에서 공산군을 몰아낸 국민당군은 공산당의 당정군 중추 지휘부가 소재하고 있는 옌안을 함락시키기 위해 서북(西北) 지구에 34개 여단 25만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 같은 국민당군의 전략에 대응하여 공산군은 적절한 시기에 옌안을 포기한 뒤 옌안 북북 산지지역으로 지휘부를 옮겨 반격의 전기를 마련하고 자신의 근거지에 깊숙이 들어온 국민당군을 단계적으로 격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7년 3월13일 국민당군의 남부전선부대는 이촨(宜川), 뤄촨(洛川) 방면에서 전면 공격을 가했다.

공산군의 서북야전군은 원래 세운 계획대로 한동안 방어한 뒤 퇴각하면서 국민당군에 큰 손실을 입히는 한편 지휘부 중추의 이전을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공산당의 주요기관은 3월18일 이전을 완료했고 하루 뒤인 3월19일 서북야전군의 주력이 옌안에서 철수했다.

옌안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그러나 서북야전군의 지속적인 습격과 반복되는 공방전으로 피로가 누적되었으며 식량 및 연료 등 보급도 차질을 빚어 전력이 크게 약화하였다.

서북야전군은 국민당군이 극도로 약화된 기회를 틈타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국민당군을 각개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공산당이‘옌안 보위전’으로 부르는 옌안공방전에서 공산군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을 대단위로 운용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결국 내전 승리의 전기를 마련했다.

옌안공방전을 지휘한 공산군의 지휘관은 펑더화이(彭德懷)와 시중쉰(習仲勛)이었다. 시중쉰은 현재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최고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의 부친이다.

펑더화이는 1951년 5월 한국전 현리 전투에서 연안 공방전에서 구사한 전략을 재현했다.

펑더화이는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겨냥한 춘계 6차 대공세 과정에서 벌어진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의 선봉을 전선 깊숙이 끌어 들인뒤 전선과 후방을 연결하는 보급로 요충지 오마치 고개를 기습 점령함으로서 한국군 대병력을 포위망에 빠뜨렸다.

전방에 포위된 1만9000명의 한국군은 붕괴되어 무질서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력의 40%만 복귀하였고 무기는 모두 빼앗겼다.

이 패배로 한국군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이 해체되었고 작전 지휘권도 모두 미군 장성에게 부여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1995년 탈북한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는 현리 전투 후퇴 과정에서 포로가 됐다.

그는 현리전투에 앞서 중공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하니 모두 텅 빈 상태여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 증언은 적의 예봉을 끌어들이고 빠른 기동으로 보급로를 차단 포위한 것을 확인해주는 방증으로 연안공방전에서 구사했던 전략이었고 2차대전 당시 독소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썻던 전략이기도 하다.

현리전투는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이 당한 최대 참패다. 우리나라 전사상 정유재란 때 칠천량 패전,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 패배와 함께 3대 패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연안공방전 승리 후 1947년 9월 공산군은 수세에서 총반격으로 전환하였고 1948년 후반기와 1949년 1월에 걸쳐 치러진 랴오선 전투(遼瀋戰役),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핑진전투((平津戰役)
공산군은 세력권 내에서 토지개혁을 실행해 가며 중국 대륙 장악에 성공하였고, 1949년 10월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철수하였다.

옌안공방전은‘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후퇴한다'는 등 마오의 유격전술을 철저히 적용한 것으로 중국공산당은 이 전투에서 성공함으로써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만‘대륙의 딸’의 작가 장룽(張戎)은 영국인 남편 존 핼리데이와 함께 2006년 펴낸‘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에서 이 같은 신화에 도전했다.

그는 국부군이 옌안공방전에서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바라는 미국의 압력으로 공산군과 휴전하는 바람에 공격 기회를 실기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수개월 여의 휴전기간 동안 만주지역에서 공산군은 소련의 전폭적 지원 아래 국부군과 대등할 정도로 무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1차 국공합작 당시(1924 ~ 1927 ) 국민당에 침투한 프락치가 당시 국부군의 최고 지도부에까지 오른 것도 전투에 실패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했다.

이들 부부는 심지어 장제스 양자 장웨이궈(蔣緯國)의 후견인이며 옌안 공격 총사령관인 후쭝난(胡宗南)이 공산군의‘잠복간첩’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마오는 후쭝난으로부터 공격 시점은 물론 그 경로까지 보고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 없이 옌안에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점령 이후에도 후쭝난은 국부군을 사지로 몰아넣는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수차 내렸다는 것이다.

후쭝난은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철수한 뒤에 국가와 군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힌 인물로 탄핵을 받았으나 장제스의 비호로 무사했고 196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이들 부부는 그가 정체를 감춘 채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만일 이들 부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후중난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소련에 알린 독일 언론인으로 위장한 소련 스파이 조르게를 넘어선 20세기 최고의 스파이가 된다.

조르게의 이 정보로 소련은 병력을 유럽 전선에 집중할 수 있었고 이는 유럽 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결국 이는 소련이 대독전에서 승리하고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되는 중요한 전기를 제공했다.

조르게와 "스파이 후중난" 모두 2차대전과 국공내전을 각각 소련과 공산군에 승리를 안겼으나 조르게는 발각되어 처형된 반면 후자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와석종신했고 사후에까지도 스파이 여부가 공론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2년 = 영국이 중국과 대사를 교환하기로 합의하고 타이베이(台北)의 총영사관을 폐쇄했다.

이해 2월 닉슨의 역사적 중국 방문이 촉매작용을 했다. 미국이 대만 때문에 수교에 주저하는 동안 영국은 재빨리 중국으로 말을 갈아탔으며 이해 9월에 일본도 영국의 뒤를 따랐다.

대사를 교환하는 정식 외교관계를 서방국 중 가장 먼저 수립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샤를르 드골의 프랑스는 1964년 1월27일에 중국과 수교했다.

영국은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막을내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지 3개월 4일 만인 1950년 1월5일 공산중국을 서방국 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 승인했다. 식민지 홍콩 때문이었다.

한국전 발발 후 미국과 함께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은 공산중국의 한국전 개입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다 닉슨의 방중 채 보름이 지나기전 대사 교환을 한 것이다.

세계사 속의 오늘

1781년 천왕성이 발견되고 1930년에는 명왕성이 발견됐다.
명왕성은 태양계의 가장 먼 행성으로 간주되었으나 2006년 퇴출되어 소행성으로 분류되고 있다.

퇴출 이유는 중력이 없고 크기가 작으며 원형 궤도의 다른 행성과는 달리 타원형 궤도를 돌고 있다는 점이다.

2018/03/1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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