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5/26 06:30



[어제 오늘 내일] 도미노 이론과 以夷制夷

아시아인에게 딘 애치슨하면 '애치슨 라인'이 생각나고 존 포스터 덜레스하면 '도미노 이론 '이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미국에서 임명직 최고위 공직자 직책인 국무장관을 지냈다.

애치슨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해리 트루먼으로 이어진 20년 간의 민주당 장기 집권 기간 마지막 국무장관이었다.

덜레스는 2차대전 유럽전선에서 승리의 주역인 군사영웅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를 내세워 마침내 20년 야당 시절을 접고 백악관을 차지한 공화당 행정부의 첫 국무장관이었다.

민주당의 1952년 11월 대선 패배는 이미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으로 종결짓기로 1년7개월 전에 결정해놓고도 여전히 마무리짓지 못하는 한국전 상황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전 늪'을 조성한 것은 1950년 1월 발표한 애치슨의 '애치슨 라인'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유럽을 들여다 보는 시각으로 아시아를 바라봤다. 전략적 처방도 서양식이었다.

애치슨은 2차대전 전야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즘의 제3제국 독일과 볼셰비즘의 붉은 제국 소련이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한 전략적 판단 아래 프랑스는 프-독 국경선에 당시 독일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정면 돌파할 수 없는 철벽 방어망, 즉 '마지 노선'을 구축했다.

한편 영국 총리 네빌 쳄벌레인은 뮌헨으로 날아가 히틀러와 회담, 나치 독일의 마지막 영토 요구라는 공언에 독일에 체코의 쥐데텐란트를 넘겨주었다.

프랑스, 영국의 철갑 방패와 '남의 엉덩이살 베어 떼어주기' 합작은 나치의 칼날이 볼세비즘의 심장을 향하도록 이심전심으로 설계된 것이다.

애치슨은 이 전략이 초기 단계에서 대실패이자 대재앙이었으나 결국은 구현되어 영국과 프랑스에 최종 승리를 가져왔다고 높이평가하는 자세였다.

애치슨은 1930년대 유럽에서 시도된 이 전략을 1950년 아시아에 대입했다.

'애치슨 라인'은 농민 혁명가 마오쩌둥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해상 마지노 선'이었다. 대만섬은 '새로운 태평양 전략 구도 하의 쥐데텐란트'였다.

한반도는 전략적 '푸대접'이 아니라 '무대접' 대상이었다. 전략적 심사 숙고가 없었으며 '애치슨 라인" 아시아 전략의 기저에 깔린 전략적 전망은 '소련과 중국은 대립하게 되어 있다 '라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중소의 이해가 얽혀 있는 갈등 관계이니 한반도는 남북한 국지적 분쟁만 관리하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 아래 한반도 아래 바다로 선을 그은 것이다.

애치슨은 동서 양진영의 냉전이 유럽 대륙에서 열전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에서 유고 티토가 스탈린의 뒷통수를 친 사실을 주목했다.

애치슨이 농민 혁명가 마오가 볼셰비키 코스플레를 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감안할 때 '아시아의 티토'가 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2차대전 전야와 마찬가지로 흘러갔다.

'애치슨 라인' 발표 한달 뒤 이루어진 마오의 중국과 스탈린의 소련 간 체결된 중소우호협력 상호원조 조약은 아시아판 독소 불가침 조약이었고 6·25 발발은 아시아 버전의 '폴란드 단치히 회랑 접수 작전'이자 '아르덴느 숲 돌파 작전'이었다.

챔벌레인이 처칠에게 넘겨 주었듯이 미국의 세계전략 설계자는 덜레스로 넘어갔다. '비둘기'에서 '매'로 넘어간 것이다.

덜레스는 동남 아시아에서 한 국가가 공산화하면 이어 한 줄로 이어 세워 노은 도미노패가 연달아 넘어지듯 차례차례 주변국들이 공산화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동북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은 미국의 한국전 개입으로 한반도 허리에서 저지됐지만 서방의 전략적 입지가 약한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며 도미노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덜레스가 이 이론을 발표한 때는 그가 이젠하워 행정부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1953년이었다.

그의발언 꼭 1년 뒤 호찌민이 지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의 공산 게릴라군이 보구엔지압의 지휘 아래 프랑스 식민군을 디엔비엔푸에서 완전하게 굴복시켰다.

동남 아시아에서 첫 도미노패가 넘어진 것으로 덜레스는 간주했다.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은 반(反) 도미노론 전략의 구현이었다.

애치슨 라인의 세계전략은 한국전 발발과 동시에 그 입안자에 의해 폐기됐고 후임자 덜레스 역시 이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한반도 문제와 인도차이나 반도 사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54년 말 제네바 회담이 열렸을 때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이 덜레스에게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을 때 덜레스는 손을 마주 내밀지 않으며 악수를 거절했다.

저우는 허공에 내민 손을 거두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덜레스의 이 비외교적 행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몐쯔가 상한 이 중국인은 이 일을 '각골난망(刻骨難忘)'했다.

냉전 절정기였던 1954년 말에 공산중국의 외교 수장이 미국의 카운터파트로부터 받은 모욕감을 18년 뒤인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화해를 위해 방중했을 때 공개적으로 토로했다.

닉슨은 마오쩌둥과 회담에서 '나는 과거 덜레스와 같은 생각을 지녔지만 이제 달라졌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회적으로 1954년 덜레스의 처신을 사과한 것으도 해석할 수 있겠다.

되돌이켜 보면 제네바에서 저우가 내민 손은 의미심장한 액션이었다.

중국이 미국과 한반도에서 열전을 치룬 뒤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을 통해 미국이 드러낸 세계 전략에 대한 재인식의 단초였다.

한국전을 치루면서 공산중국의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세계전략에 이용당했다는 인식이 움트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지도부는 중국의 대소련 재인식을 포착하지 못했고 덜레스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덜레스는 디엔비엔푸 함락을 보고 자신이 수립한 '도미노 이론'에 확신을 가졌다.

덜레스 역시 유럽을 바라본 시각으로 아시아를 해석했고 유럽에서 대처 방식을 아시아에 대입했다.

덜레스는 나치 독일이 도버 해협에서 저지되어 서진이 막히자 동진하여 소련을 쳤듯이 공산주의 세력이 서유럽 대륙에서 막히자 동진작전에 주력하여 중국 대륙을 적화하고 이어 한반도로 침공한 것으로 해석했다.

동북아에서 전진이 저지되자 취약 지역인 동남아로 방향을 틀었으며 그 전초전을 디엔비엔푸 함락으로 보았던 것이다.

덜레스는 소련이 조종하고 중국이 지원한 한국전은 첫 도미노패 전략 구사였으나 이것이 저지되자 남아시아에서 시도하여 첫 패를 넘어뜨린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1960년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덜레스의 '도미노 이론'은 존 F 케네디 행정부에 의해 인계되었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됐다.

케네디 행정부 때 베트남 군사지원이 적극화하였고 역시 민주당의 린든 존슨 행정부는 대규모 병력 투입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중소 간 핵전쟁을 우려할 정도로 심각, 첨예한 이념 논쟁이 벌어지고 베트남 공산주의자 호찌민의 아시아 공산권이 티토의 면모를 뚜렷히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공산권은 모두 하나인 단일 대오'라는 가설에 집착했다. 미국의 '각주구검(刻舟求劍)'이었다.

소박 단순한 인식과 그에서 비롯한 헛다리 짚기 전략으로 인해 미국은 '베트남전 수렁'에 빠져 들었다.

1968년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은 공화당의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전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마침내 '덜레스의 이론 틀'을 버렸다.

한국전을 계기로 '애치슨 브랜드의 아시아 전략'이 폐기됐듯이 베트남전 수렁으로 인해 '덜레스 전략'이 폐기된 것이다.

그 대안은 헨리 키신저가 19세기 메테르니히를 불러내어 '세력 균형'을 바닥에 깔고 재설계한 '애치슨 전략'의 부활이었다.

마오 중국의 세계전략도 코페르니쿠스적 선회를 하였다.

마오가 수립한 새 전략은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에 '적과의 동침' 전략을 뒤섞은 것이었다.

마오는 베트남 공산화 이후 중국을 방문한 태국 총리에게 아예 드러내 놓고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하는 방법을 조언했다.

베트남 적화 통일에 크게 고무되어 베이징을 방문하여 지원을 요청한 김일성에게 마오의 중국은 분명하게 거부의 뜻을 전달했다.

미국의 베트남 철수로 중-베트남 국경에 배치되었던 군사력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주적 소련에 집중하였다.

중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 중국 대륙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강력한 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막았다.

호찌민이 구상한 베트남 주도의 인도차이나 반도 연방화를 선제 조치로 무산시킨 것이다.

이는 도미노패가 캄보디아, 베트남과 라오스을 넘어뜨린 뒤 더 이상 행진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과 미국 간 윈윈게임 결과였다.

중국은 마오의 사후에도 이 전략 노선을 보다 강화하였다. 통일 공산 베트남이 친중 반베트남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 정권을 무너뜨려 밀림으로 내쫓자 덩샤오핑의 중국은 베트남을 군사침공하기까지 했다.

1972년 2월 말 베이징에서 있은 마오쩌둥과 닉슨의 악수는 마오로서는 '더 큰 오랑캐를 제압하기 위한 손 내밀기'였으며 닉슨으로서는 도미노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잡기위한 손바닥 펼쳐보이기였다

그 1년1개월 전인 1971년 1월 세상을 떠난 애치슨은 하늘 위에서 흐뭇하게 미소지었을 것이다.

마오와 닉슨이 악수한 46년이 지난 2018년 미국은 다시 덜레스를 엿보는 듯 하다. 다만 과거처럼 단순하고 일방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중국은 여전히 이이제이 전략이다. 다만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 등 체인징 파트너 구사가 복잡하고 다채롭다. <스위프트-버크왈드>

2018/05/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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