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18 23:19



[今天歷史-6월12일]鄧小平 유고대통령에 개혁개방 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도 상하이에서 광둥으로 이전. 궈모뤄 사망

1987년 6월12일 덩샤오핑(鄧小平)은 유고연방 대통령을 포함한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개혁의 유래, 과정과 목표를 설명하였다.

덩샤오핑은 우리는 개혁을 주장하며 개혁 없이는 출구가 없다(不改革就沒有出路)고 말했다.

그는 “과거 외국의 방식을 잘못 활용한데다 우리의 착오까지 겹쳐 생산력의 발전에 장애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덩은 1957년부터 추구한 것은 좌(左)였으며 문화대혁명은 ‘극좌’였다고 지적하고 이로 인해 (중국은) 20년 동안 정체 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는 1978년 당 11기3중전회를 계기로 생산력 발전을 위한, 또 ‘4개 현대화’를 일체의 중심에 두는 일련의 정책을 채택하였다고 설명하고 이 정책의 핵심내용은 개혁과 개방이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의 중국'과 '티토의 유고 연방'은 사회주의 질곡으로부터의 '출구'로 시장 경제를 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덩의 이말이 있은지 2년 뒤인 1989년 심각한 정치적 시련을 겪는다. 중국에서는 천안문 민주화 시위였고 유고 연방에서는 동구권 민주화 변혁 도미노였다.

양국이 비슷한 시기에 맞은 이 위기 역시 다른 어떤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보다도 '성공의 저주'라는 측면에서 공통 면적이 넓다.

중국은 이 위기를 극복했으나 유고 연방은 해체되어 공중 분해됐다.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도를 상하이(上海)에서 광둥(廣東)으로 이전.

1978년 = 중국 문학가, 역사학자, 정치가인 궈모뤄(郭沫若)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본명이 궈카이전(郭開貞)인 궈모뤄는 쓰촨(四川)성에서 출생했으며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1고등학교 예과(豫科), 제6고등학교를 거쳐 1918년 규슈(九州) 제국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상하이(上海) 대학 등의 교수를 지냈으나 문학에 뜻을 두었고 5 · 4 운동 이후에는 사회혁명에 동조하면서 혁명문학을 제창했다.

1926년에는 국민혁명의 근거지 광저우(廣州)로 이주, 1927년 북벌혁명군에 참가하였다. 정치부에서 선전활동에 종사했으나 이해 4.12 상하이 쿠데타 전날 밤 장제스(蔣介石)를 비판한 뒤 지하로 잠적했다.

그해 난창(南昌)봉기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1928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37년까지 지바(千葉)현에 살면서 중국고대사, 갑골금문(甲骨金文)을 연구하여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개시 직후 귀국, 대일 항전의 국내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8년에는 공산당의 동북해방구(東北解放區)에 참가, 인민공화국 성립 무렵 무당파(無黨派) 민주인민대표대회 당무위원 등을 지내며, 주로 문화, 학술, 국제교류 등의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격렬한 자기비판을 행하여 주목을 모았으며, 만년에는 과학원 고고연구소(考古硏究所)에서 활동했다.

대만에서 그의 괄목할 문화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권력자에 대한 아첨에 능한 어용문인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는데 이는 문화대혁명 초기의 자아비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학작품으로는 시집 『여신(女神, 1921)』, 역사극『왕소군(王昭君, 1925)』 『굴원(屈原, 1942)』『채문회(蔡文姬, 1959)』 『측천무후(則天武后, 1960)』, 자서전 『유년시대(1928)』 『창조 10년(1931)』, 번역작품인 『파우스트』 등이 있다.

고고, 역사학 저서로는 유물사관에 의한 중국초기 고대연구의 역작(力作) 『중국고대사회연구(1931)』와 30년대의 갑골금문연구서 『십비판서(十批判書)』 등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궈모뤄형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일제 시기 일본 고문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내던 중 광복을 맞이했던 한 인사는 참회하는 마음에 교직에 투신했다.

그는 4·19 혁명 뒤 대학교수로서 이승만 독재 하에서 침묵했던 자신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대학총장까지 올랐던 이 인사는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 기간 중 유신 독재에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역시 처절한 어조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 인사는 5·18 이후 신군부의 강압 통치 기간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권력을 추종하는 인사를 두고 '해바라기성(向日性)' 이라고 비아냥하는데 이 인사를 두고는 옥석 구분 없이 세력을 잡는 집단을 추종하는 '향세성(向勢性)' 인간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기회주의적 '상습 참회 지식인'으로서 전형적인 '궈모뤄형 지식인'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940년 = 일본군 폭격기들, 중국 국민당 정부 수도인 충칭(重慶)을 폭격.

세계사 속의 오늘

나치 독일이 비밀 신병기인 V-1 로켓으로 런던을 첫 공습했으며(1944), 남아공의 인권운동가인 넬슨 만델라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1964).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최초로 국민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1991). 당시 소련 연방이 해체되기 전이었다.

이해 8월 19일 소련 군부가 주동이 된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소련 연방이 급속도로와해하는 가운데 옐친은 같은 해 12월8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시 슬라브계 공화국 대통령과 함께 소련 해체를 선언했고 같은 달 21일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아타에서 발트 3 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러시아 등 소련 11개 공화국이 모여 소 연방 체제를 해체하고 각 공화국이 독립적인 주권을 갖는 독립 국가연합체로 대체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결국 같은 달 25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연방대통령에서 사임함으로서 소련연방이 해체됐다. 옐친이 첫 직선 러시아 대통령에 선출된지 6개월 2주만의 일이었다.

2018/06/1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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