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18 08:39



[凸透镜]중국 역사와 뫼, 물그리고 쓰리 왕(三王)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말을 '역사는 뫼(산)과 물(江, 海)에서 만들어진다고 바꿀 수 있다.

시간을 중국 공산주의 운동 출발 이후로 좁혀 보면 '아주 아주' 적절해 보인다.

마오쩌둥의 '권력을 향한 총구' 첫걸음은 1927년 징강산에서 였다. 또 마오가 '흐루시초프'가 되지 않고 '스탈린'으로 죽을 수 있던 결정적 전기도 1959년 뤼산(廬山 : 여산 (廬山, 뤼산)
에서 마련됐다.

마오쩌둥이 '현대의 시황제' 자리를 굳히는 문화대혁명의 가장 상징적인 정치 이벤트는 '장강 수영 도하'이다. 고희를 훌쩍 넘긴 최고 지도자의 건강과 권력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젊은 수영 베테랑들을 인간 그물로 삼아 연출한 이 정치 이벤트는 '쇼통'의 원조다.

마오를 동화 속 '슬픈 왕자' 동상으로 만들어 버린 덩샤오핑이지만 '물가에서 역사 만들기는 이어 받았다. 아니 열술 더 떠 이를 연례화하였다.

매년 여름 휴가 기간에는 총서기를 비롯한 현직 지도부를 비롯 전임 지도자와 실세 전문가가 베이징을 떠나 서해에 면한 허베이성 바닷가의 휴양지 베이다이허에 모인다.

피서를 겸하면서 다음 베이다이허 회의 때까지 이루어나갈 역사의 틀을 짠다. 올해도 베이다이허 회의는 어김없이 열렸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가 지난해와 달랐다.

관례적으로 베이다이허 회의 개막을 비공식적으로 알려온 전문가 회의는 권력 서열 5위의 이데올로기와 선전 부문 담당 상무위원이 주재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9차 중국공산당 전당대회(19대)에서 그 자리에 오른 왕후닝이 4일 베다이허에서 열린 전문가 회의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대신 회의를 주재한 이는 정치국위원 겸 당 중앙조직부장 천시였고 정치국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 후춘화가 동석했다.

왕후닝은 6월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앞서 열린 당 중앙 외사공작위원회에 참석했고 싱가포를 회담 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북중 정상회담에도 참석하여 매서운 눈길로 김정은을 쏘아 보는 장면이 중국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외사공작위원회는 중국의 대외전략과 중요 외교정책 방향을 결정해온 당 중앙 외사영도소조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당 중앙 대외 연락부를 흡수하고 국무원 외교부와 당정의 기타 외교 부문 조직과 인원을 통폐합하여 올해 3월 전인대 개막에 맞추어 신설했다.

당 중앙총서기를 주임으로 하고 국무원 총리를 부주임으로 한, 당정의 최고 수장을 수석과 차석으로 한 기구는 북미 싱가포르 정상 회담을 앞두고 첫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위원 명단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은 왕후닝도 참석했다.

이처럼 중국 중요 정치행사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던 왕후닝이 7월 중순 이후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질병 등 신변 이상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직책 상 그가 주재하지 않을 수 없는 베이다이허 개막 전문가 회의에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

이를 두고 일부 중화권 언론에서는 시진핑 '시황디( 習皇帝) 만들기'의 최고 설계자가 예상치 못한 거세고 심각한 역풍에 '속죄양'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를 주장하는 중화권 언론은 시진핑 1기에서 기율검사위 서기 로서 사정 업무를 총괄한 전 상무위원 왕치산이 올해 3월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어 스포트라이트의 초점이 되었으나 '시황디 시대'의 핵심은 왕후닝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장쩌민 집권 시기 '3개 대표론'과 후진타오 집권 시기 '과학적 발전관'을 입안한 왕후닝은 '신시대의 시진핑 사상'이라는 '시황디 시대' 맞춤형 이데올로기 뼈대를 만든 핵심 중 핵심이라는 것이다.

장쩌민, 후진타오 시절에는 당중앙 정책실 주임으로 '음지에서 일하는 막후 실세 중 하나였으나 시진핑 집권 2기에서는 중국공산당 이데올로기 부문 최고 책임자가 되어 '양지 지향'을 넘어 햇빛 한복판에 섰다.

장쩌민 시기 '반골 상무위원' 리루이환과 후진타오 시기 리창춘의 위상을 뛰어넘어 옛소련 브레즈네프 시기 이데올로기 담당 정치국원으로 브레즈네프 머리 꼭대기 위에 있있다는 수슬로프를 연상케하는 부상이었다.

수슬로프는 1968년 브레즈네프에게 체코슬로바키아에 소련군을 앞세운 바르샤바 동맹군의 진주를 결단하게 하여 '프라하의 봄'을 압살하게 하였다.

케코 공산당 개혁파 리더인 두브체크 당시 당서기장의 민주화 개혁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서방 자본주의와는 거리를 두었고 탈소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련 최고의 이데올로그 수슬로프는 이를 댐을 무너뜨릴 균열로 보았다.

수슬로프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한 '제한 주권을 입안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왕후닝의 정치적 위상을 장쩌민을 항상 긴장시켰던 '대안 제시 상무위원' 리루이환과 '소리 없는 실세 상무위원' 리창춘 등 전임 이데올로기 담당을 넘어 '브레즈네프의 멘토'였던 수슬로프 수준까지 격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왕후닝이 서기처 상무(수석) 서기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 중앙서기처는 당의 정책 집행을 관장하는 기구로 수장이 당을 대표하는 총서기이고 일상 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은 상무서기이다.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으로 '황태자' 시기 이 직책을 맡았다. 시진핑 집권 2기가 열리면서 '시황디 체제'가 구축되고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왕후닝이 그 자리에 앉은 것이다.

연령 제한 규정에 따라 왕치산이 상무위원에 연임되지 못하고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속에서 왕후닝이 그 자리를 차지하자 일반적인 권력 서열과는 별도로 왕후닝이 실질적인 2인자가 되는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다.

물론 왕치산이 올 3월 전인대에서 국가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그러한 분석은 상당히 힘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왕후닝이 '떠오르는 2인자'일 가능성은 여전히 유지됐다.

그렇지만 '시황디시대' 1년부터 시진핑의 지위마저 흔드는 무서운 역풍에 맞닥뜨리자 새 체제 구축 최고 설계자를 '속죄양'으 로만드는 초강수 맞불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지나치게 성급한 분석이긴 하다. 다만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시진핑 사진에 먹물을 투척하는 장면이 실린 동영상이 떠돌고 미국 방송사와 전화 인터뷰하던 중국 대학교수가 인터뷰 중에 공안요원에 체포되는 사태가 실시간 생중계되는 일도 터졌다.

이런 장면들이 공개되기는 1989년 중국공산당이 최대 위기 상황에 빠져 있었던 천안문 시위 때 이후 처음이다.

1989년 당시에는 '죽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에 페인트가 날아갔고 공안요원에 의해 취재활동이 저지되는 상대는 미국 기자였다. 집권 지도부의 위기의식은 그때 못지 않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시진핑 집권 1기 때 전임 최고 지도자는 건드리지 않았으나 저우융캉과 링지화 등 실세 2인자들은 확실하고 철저하게 제거했다. '창업' 때 그랬던 것처럼 '수성'에서도' 실세 2인자'를 제물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왕후닝 제물설의 주창자들은 왕후닝의 취약한 정치적 입지를 지적하고 있다.

왕후닝은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실세로 핵심 실세 세력에게는 설사 제거되더라도 실질적 타격은 적은 반면 그 효과는 충분하다는 논리다.

왕후닝은 중국 정계에서 드물게 보는 대학교수 출신이다. 따라서 능력은 출중하나 추종자와 후원자가 거의없는 외롭고 고단한 처지다.

장쩌민이 발탁하고 후진타오의 왼팔이었으며 시진핑도 중용하여 '3대(代) 지낭(智囊)'이란 별명을 들었다.

즉 '3대에 걸친 꾀주머니' 또는 '권력이 바뀌어도 항상 자리를 지키는 브레인'이었으나 파벌적으로 굳이 따지면 상하이방에 속한다.

장쩌민 전 총서기를 우두머리로 하는 상하이방은 범태자당을 아우르는 시진핑 직계그룹과 공청단 간부 출신의 단파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어서 이를 거중 조정할 수 있는 위치다.

범태자당 세력은 현재 명실상부한 현재 권력이며 시진핑 1기 집권 기간 동안 대대적이며 철저한 반대파 숙청에 힘입어 장기집권을 도모하고 있다.

단파는 '세불리'로 판단하여 일단 뒤로 물러섰으나 권력 교대와 집단 지도체제 등 덩샤오핑이 설계한 권력체제가 잘 가동되어왔고 그에 바탕한 미래 개혁 비전으로 명분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은인자중한 가운데 여전히 '미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왕후닝은 차도중앙선을 걷는 처지다. 전방만을 주시하다 후방에서 오는 차에 치일 수 있고 뒤를 돌아보다 앞차에 깔릴 수도있다.

베이다이허 회의 개막을 알리는 전문가 회의에서 왕후닝의 역할을 대신한 천시 조직부장은 시진핑 직계이고 후춘화는 단파의 황태자격인 인물이다.

왕후닝의 부재를 시진핑 직계 세와 단파 황태자가 그 자리를 메꾼 사실은 뒤쪽에서든 앞쪽에서든 왕후닝이 이미 권력의 차도 중앙선에서 치인 것은 아닐까.

공산당의 양대 축은 조직과 선전-선동 부문이다. 따라서 범태자당파의 황태자 당 중앙 조직부장을 맡은 천시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살펴 볼 수 있다. 금 '시황디 시대' 1년의 최고의 위기는 미중 간 세계전략 차원의 큰 싸움이다.

무역전쟁을 중 전략적 대립의 1개 중심에 두고 한반도의 북핵 사태 리고 남중국해 문제를 양개 기본점으로 삼고 다.

도널드 트럼프의 선제에서 비롯한 이 대결에서 미국 내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듯이 중국 지도부 내에서도 주전파와 화평파가 있다.

상하이 푸단대학 출신으로 모교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냈으며 미국에서 방문 교수로 지낸 왕후닝은 단연 건파다. 지피지기의 입장에서 미국에 맞서는 쪽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갈등을 세밀한 관리를 통해 중국의 전략적 경제적 실리를 도모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장쩌민 시기 민주당의 빌 클린턴과의 '바다를 넘어선 악수와 조지 W 부시 때 군용기 충돌 사건과 9.11 테러 이후 미중관계 신속한 회복 등에서 왕후닝의 보이지 않는 손이 어른거린다.

또한 시진핑 1기 초기 버락 오바마 정부를 상대하면서 '대국 관계'를 설정하는데서도 왕후닝의 영향력이 짙게 배어 있다.

올해 3월과 6월 김정은과 시진핑 간 두차례 베이징 회담에 배석한 왕후닝의 시선은 결코 북한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간의 대북한 중국 외교의 기조는 무모한 핵개발로 중국의 전략적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전략적 불량자산'으로 북한을 인식했다.

애니콜 응답처럼 3월 이후 김정은이 중국에 려 왔으나 적어도 왕후닝의 대북 인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경제 특히 금융부문에서 미국과 오랫동안 협상해온 역시 미국을 잘아는 왕치산은 상대적으로 대미 강경파의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북한 문제와 관련,국가부주석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한 발언을 살펴 보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전략적 포즈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왕치산은 북한 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중국의 판도로 해석할 수 있는 입장을 표명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여전히 주장하면서도 중국 방파제로서의 한반도 북부 유지라는 인식을 앞세웠다.

시진핑은 최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2차대전 때인 1941년 나치 독일이 1939년 8월 2차대전 발발 전야에 체결한 독소 불가침조약을 폐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였을 때 스탈린이 '슬라브 민족이여 단결하라'고 호소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시진핑은 현시점에서는 왕후닝보다는 왕치산의 입장쪽으로 기운듯하다.

때문에 베이다이허 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모임에서 왕후닝이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왕후닝이 국내 정치적 파워게임에서 밀렸다기 보다는 대미 온건파로 치열한 선전전을 위해 일단 자리를 비켜 준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뒤집어 보면 대미 주화파로서 존재감을 왕후닝이 선명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바로 다음해 950년 암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진군하는 미군을 상대하는 문제로 외로운 처지에 놓였다.

미국과의 전쟁 불가피론을 강력하게 폈으나 당내에서 동조자는 극히 적었다.

국공내전 승리의 주역 중 주역 린뱌오에게 압록강 도하를 명령했으나 린뱌오는 병을 핑계로 사실상 마오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래서 대타로 선택한 인물이 동향의 펑더화이다.

하지만 그 직한 펑더화이는 1959년 뤼산 회의에서 마오의 생각으로는 '반역'을 도모했다.

미국에 대한 인식이 마오와 전혀 달라진 것도 한 이유였다. 미군의 진면목을 피부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중국 내전을 글로벌화하는 시각에서 전쟁 불가피론을 견지했으나 펑은 이를 마오의 비현실적 과대망상으로 치부했다.

펑은 마오에 대해 여전히 충성스럽고 공손했으나 마오는 그 내심의 변화를 정확하게 꿰똟고 있었다.

린뱌오가 마오의 문화대혁명에 총구 역할을 했으나 그도 결국 미국을 대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마오와 대립 '반역'을 시도하다 죽었다.

펑더화이가 대미 인식에서 마오에 크게 앞질러 나갔다면 린뱌오는 마오의 대미 전략적 인식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한 것을 라가지 못했다.

미국을 상대하는 대전략을 둘러싸고 시진핑을 꼭지점으로 한 왕후닝과 왕치산의 3각 관계는 일단 왕치산과 강경파 쪽으로 기울었으나 최종 결론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제로섬'이 아닌 '샴 쌍둥이' 관계이니 더 시간을 두고 지켜 보아야 한다.

1980년대에 중국 정계에 '쓰리후(三胡)'가 있었듯이 2010년대 후반기에는 '스리 왕(三王)'이 주목을 끈다.

왕후닝과 왕치산 외의 다른 한사람은 왕이다.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인 그는 2일부터 4일까지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안보 포럼에서 미국과의 첨예한 대립각을 사사건건 세웠다.

미국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가 일본 열도와 아세안 국가과 인도를 꿰는 합종의 전략을 펼친 '서태평양의 소진' 이었다면 왕이는 아세안 국가를 상대로 한 촘촘한 연형 전략을 편 '남중국해의 장의'였다.

왕이는 싱가포르 외교전에서 막상막하의 종횡 전략 게임의 주역이었다.

왕이는 왕치산과 같은 입장이다. 그는 공산혁명 지도자급 인사를 장인으로 두고있다. 이른바 '금거북족'으로 출신 배경도 비슷하다.

쓰리후 중 후야오방과 후진타오는 총서기까지 올랐으나 후야오방은 실각하고 급사했다.

13대에서 5인 상우무위의 한 자리를 차지했고 장래 총서기 감으로 지목됐던 후치리는 천안문 사태 와중에서 덩샤오핑의 유혈진압 지시에 반대했다가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앞으로 쓰리왕의 미래가 어떠한 부침을 보일지를 지켜 보자.

중국은 이제 '굴기' 노선의 지속이냐 아니면 덩샤오핑이 유훈으로 제시했던 '도광양회' 전략으로 일단 후퇴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전자는 매력적이나 후자는 실리적이다. 전자는 마오쩌둥적이고 후자는 덩샤오핑적이다.

후자는 '몸 낮춘 대가의 실리'이고 전자는 '상처 깊은 영광'이었다. 시진핑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스위프트-버크왈드>

2018/08/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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