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4/20 07:45



[今天歷史-2월11일] 다이지타오의 자살과 정여창의 자결

한자병음방안, 얄타 협정 체결, 아관파천

1949년 2월 11일= 국민당 원로 다이지타오(戴季陶)가 광저우(廣州)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국공내전의 승패를사실상 가른 3대 전투 중 마지막 전투인 핑진 전투가 1월 31일 공산군의베이핑 입성으완전 결말이 난지 열하루 뒤였다. 1890년 생으로 향년 59세였다.

다이지타오는 1915년 일본 유학중 중국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신해혁명 후 상하이(上海)에서 민권보(民權報) 창간에 참여하는 등 손문(孫文 : 쑨원)을 도왔다.

이후 천궈푸(陳果夫)와 함께 ‘헝타이하오(恒泰號)’라는 증권회사를 차려 투기활동을 하기도 한 그는 1925년 손문 사망 이후 ‘국민혁명과 중국 국민당’, ‘손문주의 철학기초’등의 논문을 통해 손문의 연소(聯蘇 혹은 聯俄), 연공(聯共), 부조농공(扶助農工)의 3대 정책을 반대하였다. 또한 계급투쟁과 노동자-농민 운동을 공격, 훗날 천두슈(陳獨秀)에 이어 공산당 당수가 되는 취츄바이(瞿秋白)의 비난을 받았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4 · 12 쿠데타 이후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위원, 고시원 원장을 역임하며 장제스의 책사로서 활동했다.

1931년 9 · 18 사변(만주사변) 이후 대일문제 전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외세를 배격하기에 앞서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攘外必先安內) ’ 정책을 주창하였다.

1948년 말 난징 정부와 함께 광저우에 왔으나 정세악화에 절망감을 느끼고 자살한 것이다.

1895년 = 청나라 북양(北洋)해군의 최고 지휘관 정여창(丁汝昌)이 진중에서 자결했다.

청나라 북양해군은 중국이 갑오전쟁(甲午戰爭)으로 부르는 청일전쟁 발발 후압록강 하구 해역에서 벌어진 황해(서해)해전에서 일본군에 패해 기지인 산둥 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항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북양해군을 육성한 이홍장(李鴻章)은 남은 함선이라도 보존하기위하여 북양함대에 출진하지 말 것을 지시, 웨이하이 웨이 항에 계속 대기하고 있던 중 일본 육군과 해군함대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며 저항을 계속하던 정여창은 2월 10일 전 함대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던가 자침(自沈)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기동력을 상실한 기함 정원(定遠)호만이 자침하였을 뿐 대부분의 부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2월 11일 다시 남은 함선을 폭파할 것을 명령했으나 부하들이 반대하며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정여창은 결국 이날 밤 자결하고 만다.

정여창의 자결 뒤인 12일 새벽 부하 지휘관들은 정여창의 명의를 도용하여 투항서를 작성. 일본군에 항복했다. 잔여 함선 11척과 유공도(劉公島)의 포대 및 각종 군수물자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이홍장이 거금을 들여 육성하였던 북양해군은 이처럼 치욕적으로 완전 궤멸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자결한 정여창을 적장의 예우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나 중국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북양 함대를 스스로 괴멸시킨 정여창의 장수로서의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그의 관을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상당 기간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

1958년 2월 11일 한자병음방안이 전인대에 의해 채택되었다.

한자병음방안은 한자의 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와 함께 전인대는 한자의 간체화를 계속 추진하고 푸퉁화(普通話)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한자병음방안을 한자 학습에 활용하도록 했다.

한자병음방안을 수립하고 한자의 간체화를 추진한 사람은 중국 문자개혁위원회 주임 우위장(吳玉章)이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b>
루스벨트미국 댗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 원수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갖고 2차대전 전쟁 완수와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1945).

이 협정은 둘로 구성됐다.

1. ‘크리미아 회의의 의사(議事)에 관한 의정서’는 세계기구(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 대서양헌장 제원칙의 재확인,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 4개국에 의한 독일의 분할
점령, 배상 위원회의 설치, 전쟁범죄인의 조사, 폴란드ㆍ유고슬라비아의 처리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에 관한 합의’에서는 소련은 몽골인민 공화국의 현상유지, 남사할린의 반환,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에 의한 우선 이용, 뤄순(旅順) 군항(軍港)의 조차(租借), 남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경영, 만주에서의 중국의 주권 유지, 사할린(樺太), 치시마열도(千島列島)의 할양 등을 대가로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 참전할 것, 중국국민 정부와 우호 동맹
조약을 체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이 밖에 미국과 소련 간에 한반도 군사 분할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양군의 경계선으로 38선이 설정됐으며 이는 2차 대전 종전 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남북 분단을초래하는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조선 국왕 고종이 왕세자( 훗날 순종)와 함께 비밀리에 경복궁을 떠나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엿다( 1896). 이를 '아관 파천' 이라고 부른다.
일국의 군주가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신변의 안전을 보호받으려는 이러한 초유의 사태는 청일 전쟁(1894 ~ 1895) 승리뒤 러시아에 접근 일본을 견제하려는 왕비 명성황후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 낭인들을 동원 잔인하게 살해한 을미사변(1895년 10월)에 대한 대응 조치엿다.

이로써 갑오경장을 추진중이던 친일 김홍집 내각은 붕괴하고 이범진과 이완용 드으이 친러 내각이 수립됏다. 1897년 궁성으로 복귀한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과 대등한 국가라는 점을 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러일 전쟁( 1904 ~ 1905 때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 아래 대한제국은 독자적인 광무 개혁을 실시하며 독립적 위치를 유지하려 애썻다.

2019/02/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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