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6월29일] 제2 연평해전, 청나라군 인천 상륙

주한미군 한국서 전면 철군, 덩샤오핑 군사위 주석 선출, 일본군 겨자탄 사용, 한국전 참전 중공군 반공포로 장제스에 탄원, 일본 중일전쟁 약탈 다이아몬드 대만 반환, 미군 북베트남 하노이 폭격, 한국 노태우 대통령 후보 6.29 선언, 한국 삼풍백화점 붕괴

6월29일은 한반도의 명운과 관련이 깊은 사건이 유난히 많이 발생한 날이다.

1882년 6월 29일 청나라 군대가 임오군란을 당한 조선의 도움 요청에 따라 인천에 상륙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출병한 이래 290년 만에 중국의 군대가 조선의 요청에 의해 한반도에 다시 들어 온 것이다. 청나라 군대는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배후 조종자로 지목, 그를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또한 2년 뒤 1884년일본의 힘을 빌려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을 좌절시켰다.

청나라는 일본과의 합의에 따라 1885년 군대를 철병했으나 원세개를조선에 남겨 둔 디 그를 통해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청나라의 대(對)조선 영향력은 청일전쟁 패전으로 1895년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중 양국관계는 의전적이며 내정불간섭적인 전통적 '조공과 책봉'관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조선은 이 때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청의 유사 보호국 신세나 다름없었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다시 개입한 것은 1895년 청일 전쟁 패배로부터 55년 뒤인 1950년 한국전 발발이 계기가 됐다.

1949년 6월 29일 주한미군이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전면 철수했다. 이로부터 채 1년이 안되어 북한군의 남침이 이루어졌고 다시 이로부터 1년 뒤인 1951년 6월 29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에 한국전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우리의 운명은 또 다시 외세의 결정과 역학 관계에 의해 좌지우지되게 됐다.

1987년 6월 29일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시국관련 구속자석방 등 8개항의 시국수습안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했다.

마치 폭발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형국이었던 한국의 정국은 이 선언으로 단번에 유화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 분기점이 된 이 선언은 노태우의 고독한 결단이 아니었다. 기획하고 연기를 압박한 연출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었다.

이 정치 이벤트는 집권 민정당에게 정권 재창출이라는 초대박을 가져왔지만 그 이익배분은 공평하지 않았다. 뛰어난 연기를 펼친 노태우가 수혜를 독점했고 기획자 전두환은 도리어 정치적으로 파산당하고 말았다.

1995년 6월 29일서울 강남의 서초구의 고급 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여 501 명이 사망하고 6 명이 실종했으며 937 명이 부상당했다. 이는 1년 전 발생한 성수대교의 붕괴와 함께 한국의 압축성장의 비극적 측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방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무단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 해군 고속정 참수리정 357호를 기습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됐으며 19명이 부상했다. 실종한 1명은 한 달 가까운 수색 작업 후에 침몰한 선체에서 발견되고 부상자 중 1명이 추가로 사망, 전사자는 총 6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정장(艇長)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이다.

북한은 전투가 발생한 당일에 그것도 전툳가 종료한 직후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도 이를 받아들여 남북 간의 긴장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날은 한국이 월드컵 3, 4위전을 갖는 날이었다.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한국 축구팀의 선전에 남한 전역이 축제분위기에 빠져 있던 날에 벌어진 이 전투는 54년 전 일요일에 이루어진 6.25 기습남침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발발원인이 어디에 있건 결과적으로 북한 해군은 이 전투에서 3년 14일 전인 1999년 6월 15일에 치러진 제1 연평해전에서의 참패를 설욕했다고 자위할 수 있는 전과를 거두었다.

1999년 6월 15일 역시 NLL 무단 침범으로 야기된 제1 연평해전에서 북한 측은 함정 4~5척이 침몰, 대파되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상한 반면 한국 측은 손가락 부상 등 경상자 몇 명만이 발생했을 뿐이었다(한 일본 언론은 북한군의 전사상자가 무려 70~80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연평대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당시 첨단화한 한국의 경비정에 대해 북한은 무모하게 정면으로 해상 인해전술을 감행하다 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한 해 뒤인 2000년 역사적인 남북 공동성명의 발표일자는 공교롭게도 6월 15일, 제1 연평해전 1주년이었다. 남북한의 화해 무드가 고조되면서 우리 해군의 대승은 잊혀져야만했다.

그리고 다시 2년 14일 뒤 북한군은 "우발적" 기습 공격을 통해 남한 측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제2 연평해전이 북한의 공식적인 설명처럼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작위적인 것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북한해군은 수상 해군 전력 면에서 압도적인 전력상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화해 분위기를 최대한도로 이용, 상대방을 방심하게 한 뒤 기습적으로 급소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우발적" 첫 1격이 정장 윤영하 소령을 겨냥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 첫 가격이 윤영하 소령을 단번에 절명케 할 정도로 정확한 조준 사격이었다는 점, 부근 또 다른 참수리 함정으로부터의 집중적인 반격을 받으면서도 이에 대응하지 않고 타격을 받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은 참수리1호 만을 공격한 사실은 북한 측의 주장을 무색케 하는 정황증거이다.

제2 연평해전에서도 북한 측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윤영하 소령의 참수리1호는 침몰하고 말았다. 3년 전의 제1 연평해전과 비교해 보면 우리 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지휘관을 잃은 참수리 1호에 대한 북한 함정의 집중 공격 행태를 두고 "나는 죽어도 한 놈만 패겠다는 식이었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상황에서 취해질 수 있는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사전의 작심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로써 남한 국민들의 기억 속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당한 제1 '연평해전'은 깨끗이 지워지고 남북한이 서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북한 측이 내부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주장하기에 충분한 제2 연평해전('한동안 제2 연평해전은 제1과 구별하기 위해 서해교전'으로 명명되기도 했다)이 심어 졌다. 제2 연평 해전이 작위적인 것이라면 북한은 심리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북한은 제2 연평해전을 통해 남한 국민들 사이에 서제1 연평해전 대승으로 은연중 자리 잡기 시작은 "북한 별 것 아니네"를 "기습공격해오면 크게 당할 수 있다"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제2 연평해전 이후 서해상에서의 북한의 군사적 도발은 참여 정부임기 말까지 없었다. 집권당 정치 지도자의 대북 인식과는 별도로 해군이 해상 도발을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대신 제2 연평해전 프리미엄을 철저히 활용하며 대남 NLL 공세를 취했다. NLL을 북한에 유리하게 재설정해야 한다는 북한의 드라이브는 상당히 먹혀들었다.

2007년 10월 4일 10.4 제2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김정일이 제2 연평해전의 프리미엄을 충분히 누린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또 다시 대청도 부근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더 이상 해상 도발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결국 북한은 2010년 3월말 잠수정 공격으로 우리 해군의 천안함을 폭침시키는 해저 도발을 감행했다. 비대칭적 전력을 동원, 심리전 차원에서 대남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천안함 폭침은 장거리 로켓 및 실험 도발의 '해저 버전'인 셈이다.

제2 연평해전이 벌어진 날 한국 축구팀은 한일 월드컵 3-4위 전에서 터키에 2:3으로 져 4위를 차지했다. 이날 한국팀이 먹은 첫 골은 수비진이 방심한 가운데 어이없게 허용한 것이었다.

1944년 = 중국과 일본군이 헝양(衡陽)에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헝양 공략 과정에서 겨자탄을 사용하였다.

1953년 = 부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중공군 반공포로 1만4000명이 장제스(蔣介石) 총통에게 혈서로 대만이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최근 가려진 기록에 따르면 1952년 합의한 한국전 종전이 포로 교환 문제로 1년 가까이 늦춰진 이유 중 하나는 마오쩌둥이 중공군 포로의 상당수가 대만으로 철수한 국민정부 쪽을 선택할 것을 크게 우려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미군의 공습을 이유로 들어 한국전 종전을 빨리 타결할 것을 요구했으나 마오는 일축했다고 한다.

1954년 = 일본이 중일전쟁 기간 중국에서 약탈한 1735개의 다이아몬드(368.17 캐럿)가 대만에 반환됐다.

2001년 = 탈북한 장길수 일가족 7명이 서울에 도착했다.

1981년 =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가 후야오방(胡耀邦)을 당 중앙위원회 주석(당주석)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당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1963년 = 소련이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관 직원 3명의 소환을 중국측에 요구해 중소관계가 악화되었다.

>세계사 속 오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었고(BC. 48),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여자황제에 즉위했다(1762).

미국 여객기 ‘딕시 클리퍼’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안착해 미-유럽 첫 상업 항공노선을 개통했다(1939).

영국 당국이 이스라엘 건국을 2년 앞두고 팔레스타인 내 테러 활동 중지를 위해 팔레스타인 유대인 시온주의자 2700여 명을 검거했고(1946), 6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여년 동안 분리되어 있던 예루살렘시를 통합했다(1967).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악명높은 인종분리 정책인‘아파르트헤이트’ 시행에 들어갔다(1949).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최초로 공수부대를 투입했으며(1965), 최초로 월맹 수도 하노이와 하이퐁항을 폭격했다(1966).

'어린 왕자' 작가 프랑스의 안트완 생텍쥐페리가 태어났다(1900 ).

2019/06/29 08:10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