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7월2일]광둥 제2원전, 廬山회의, 亞 금융위기

리이쭝런 전 국민정부 총통 중국 귀국, 존슨 미 대통령 인종 차별 금지 공민법 서명. 프랑스 태평양에서 핵실험 시작, 남북 베트남 공식 통일, 한국 전투사단 맹호부대 베트남에 파병, 독립협회 창설

2002년 7월2일 중국 광둥(廣東)성의 두 번째 핵발전소인 링아오(岭澳) 원전 1호기가 가동에 들어갔다. 링아오 원전은 다야(大亞)만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야 원전에 이어 광둥성에 세워진 두 번째의 상업용 핵발전소이다. 규모는 발전용량 100만kw의 원자로 4기로 구성되어 있다.

1997년 = 태국이 환율제도를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하였다. 태국 통화 바트화의 대폭락을 가져온 이 조치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시발이었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무분별한 금융시장 개방 이후, 부실기업의 양산 취약한 금융구조와 국제적 헤지펀드의 개입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이어 한국이 외환보유의 급격한 감소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에 금융지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와는 달리 실물경제가 튼튼한 편이어서 흑자도산의 성격이 강했다. 한국 등은 IMF 구제금융을 받음에 따라 일련의 금융개방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997년 하반기 이후 수년간 아시아 전역에 먹구름을 드리운 아시아 금융위기는 156년 동안 서양 식민지이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이양된지 바로 하루 뒤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서세동점'을 상징하는 마지막 깃발이 내려진 직후 아시아의 취약 포인트를 향해 서구의 '회심의 반격 칼날'이 치고 들어온 것이라는 비유가 가능하다.

1944년 겨울 이해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 퇴각을 거듭하던 나치 독일이 '발지 전투'를 통해 잠시 동안 전세를 만회한 것을 연상시켰다.

세월이 지난 지금 되돌이켜 보면 아시아 금융위기는 서방 아시아 버전의 발지전투다.

중국은 아시아 금융위기로 아시아 국가들이 잇달아 평가절하를 하는 가운데서도 달러에 고정시킨(PEG) 고정환율제를 무역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유지했다.

중국의 이러한 자세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각국의 경쟁적 평가절하라는 악순환을 방지하는 기능을 해 아시아 국가들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경제적 위상은 크게 격상됐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IMF에 '백기투항'하기 전 일본에 이를 회피하기 위해 일본에 브리지론을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대만이 한국에 일본이 거부한 '백기사' 역을 하겠다고 은밀하게 제안했으나 문민정부는 중국과 문제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이 자국의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고정환율제를 유지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대만의 이런 행보를 의식했을 수 있다.

1959년 = ‘여산회의(廬山會議)’가 장시(江西)성 뤼산(廬山)에서 시작되었다.

이 회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7월2일부터 7월23일까지는 정치국 확대회의였으며 8월2일부터 8월16일까지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8기 8중전회)였다.

마오쩌둥은 7월 10일 ‘대약진(大躍進)’과 ‘인민공사(人民公社)화 운동’에 대해 성과가 ‘9개 손가락’이라면 과오는 ‘한 개 손가락’일뿐 이라며 이를 옹호했다.

이에 펑더화이(彭德懷)는 7월14일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대약진과 인민공사화가 초래한 재난을 설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펑은 후난성 출신으로 마오와 동향이다. 그는 마오가 당내 대다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전 개입을 결정하였을 때 병을 핑계로 지원군 사령관 맡기를 회피한 린뱌오를 대신한 인물이다.

그는 삼국지의 장비와 같은 우직한 무장으로 비유된다.

펑은 충정에서 이 같은 비밀편지를 통해 마오의 정책을 바꾸려 하였으나 마오는 이를 자신의 등에 비수를 꼽는 배신이자 모반으로 간주했다. .

마오쩌둥은 비밀리에 보낸 펑의 편지를 공개 회람시키고 토의에 붙였다. 토의 과정에서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황커청(黃克誠)과 저우샤오저우(周小舟)가 펑더화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나타냈다. 특히 1935년 1월 마오의 당 지도권을 확립한 쭌이회의에서 당 대표인 총서기로 선출된 바 있던 장원톈(張聞天)은 서신에 담긴 펑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처럼 당내 의견이 엇갈린 가운데 마오는 7월 23일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고 펑더화이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그는 펑의 편지는 자산계급이 당을 흔들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경 기회주의의 반당 강령’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해방군이 누구와 함께 갈 것이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이었으며 황커청은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었다.

마오는 "다시 정강산(井崗山)으로 들어가 혁명을 새롭게 시작하겠다"라는 혁명동지의 감성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펑더화이, 황커청, 장원톈, 저우샤오저우는 반당집단으로 몰려 비판받게 되었고 8기 8중전회는‘펑더화이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에 관한 결정’과 ‘당의 총노선을 보위하고 우경 기회주의에 반대한 투쟁’이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후 ‘반우파 투쟁’이 중국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마오는 자신과 정치적 생각이 달라진 동향인 펑더화이를 찍어낸 뒤 자신의 노선에 동조한 후난성 북쪽에 인접한 후베이성 출신인 린뱌오를 중용했다.

이는 우리나라와 비유하자면 과거 최측근인 동향 경북 출신 인사를 찍어내고 자신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경남 출신 인사와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린뱌오가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었듯이 2016년 한국의 4·13 총선을 앞두고 경남 인사는 결정적 순간에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여소야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임기 말년의 이러한 정치 지형도 변화는 박근혜 대통령이 측근 인사의 비리 사건이 터지는 것을 계기로 국회의 탄핵 소추와 헌법재판소의 파면결정을 거쳐 구속 수감과 중형 선고라는 정치적 몰락의 길로 빠져 들어가게 만들었다.

1989년= 중국이 6.4 민주화 시위 유혈진압 후 봉쇄되었던 천안문 광장을 관광객에게 다시 개방했다.

1965년= 국공내전 말기, 공산당과 평화협상을 위해 하야를 선언한 장제스를 대신, 대리 총통을 역임한 바 있는 리쭝런(李宗仁)이 해외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귀국했다.

리쭝런은 1926년 장제스의 북벌군이 출진할 당시 일익을 담당한 주요 사령관이었다.

그는 또 중일전쟁 때에는 일본군과 사단 규모 이상 전투에서 승리한 국부군에서는 드물게 보는 장군 중 하나다.

1931년 =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교외 완바오산(萬寶山) 지역에서 관개수로를 둘러싸고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한국 농민과 토착 중국 농민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사건은 한국 내 화교에 대한 한국인의 습격 및 학살로 이어져 한중 양 국민 간 상호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만보산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의 본질은 만주 내 중국 항일운동 세력과 한국인 민족운동 세력 간 반일 공동전선 투쟁을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음모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만주침략과 대륙침탈의 한 명분으로 삼았으며 국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는데 이용하였다.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일제는 만주 창춘시에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중국인 하오융더(偃永德)를 지배인으로 앉혔다. 1931년 4월16일 하오융더는 완바오산 지방에 있는 샤오한린(蕭翰林) 등 11인의 소유 토지 가운데 미개간지 약 200ha를 해당 지주와 10년 기한으로 조차 계약하였다.

하오융더는 현 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지 않고, 곧바로 이 토지를 한국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10년간 불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승훈은 농민 180여 명을 이 지방에 이주시키고 이퉁허(伊通河) 통하는 관개수로(길이가 약 2,000여리, 폭이 약 3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수로개척과 제방축조가 타인 소유의 부근 농지에 미치는 피해가 많아지자, 부근 토착 중국 농민이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현 당국에 탄원 진정하여 공사 진행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공사 중 땅이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수해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뒤 일본 영사관 경관 6명이 이 공사를 다시 진행시키려 하고 일경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강제로 억압하여, 수로공사는 그 해 6월 말에 준공되었다.

7월1일 중국 농민 약 400명이 봉기하여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튿날인 7월2일 이들 중국 농민과 현장을 지키고 있던 한국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등 200여명 간에 일대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냈으며, 중국 정부 측은 이에 강경하게 대항하였으나 일본은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

일제는 이 사태를 왜곡 발표했으며 이를 믿은 한국 내 각 신문은 "한국 농민 중 사망자가 나왔다"고 과장 보도했다.

이 결과 인천을 필두로 서울 ·원산 ·평양 등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사건은 급기야 평양에서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학살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잔인한 폭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교 142명이 숨지고 546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됐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경찰은 중국인들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는 한동안 사태를 방치하였다.

그러나 이 폭동이 가라앉자 총독부 당국은 단호한 태도로 광범위한 검거를 시작하였다.

이해 9월18일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을 시작했다.

세계사 속 오늘

버몬트 주가 영국의 미국 내 식민지 중 최초로 노예제를 폐지했으며(1777),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남북전쟁 후 1세기만에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공민법에 서명했다(1964).

남북 베트남이 정식으로 통일되었으며 통일 수도는 하노이로 정해졌다(1976).

제정 러시아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항을 건설했다(1860).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해군기지로 건설되었으며 1872년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러시아의 태평양 해군기지가 옮겨온 뒤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1880년에 시가 되었다.

군사항구 기능 때문에 1950년대 초 외국 선박의 출입이 금지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제해상 무역은 대부분 동쪽에 있는 나홋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인 프랑스 비시정부가 앙리 페탱 장군을 국가원수로 선출하고 출범했으며(1940), 헝가리가 탈소 독자노선을 선언했다(1977).

프랑스가 태평양에서 6차례의 핵실험을 시작했고(1966), 프랑스가 최신예 전투기 미라주 2000을 실전 배치했다(1984).

일본 교도(京都)의 금각사(金閣寺)가 방화로 인해 불탔다(1950). 사건은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동명소설 소재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호주 공군이 한국전 참전을 위해 출동했으며(1950), 국무회의가 첫 전투사단인 맹호부대의 월남 파병을 결정했다(1965).

서재필, 윤치호 등 30여명의 조선 지도자들이 한국 최초 근대 정치. 사회단체인 독립협회를 설립했다(1896). 일제가 모든 공문에 메이지(明治) 연호 사용을 지시했다(1910).

2019/07/0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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