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7월6일] 南京, 朱德, 달라이, 北蘇 조약

몽골 인민혁명정부 수립, 달라이 라마 14세 탄생, IPU 서울 총회 중국 회원국 가입 제안, 소련 연방헌법 제정, 미국서 첫 발성 영화 제작, 미국 주한미군 감축 통보

1929년 7월6일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새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결정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는 1928년 6월 베이징(北京)에서 군벌세력을 몰아내고 같은 해 12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이 투항함에 따라 1916년 위안스카이(袁世凱) 사후 13년간 지속된 군벌혼란 시대를 일단 종결짓고 통일국가로서 형식적 면모를 갖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징의 통일국가 수도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난징이 수도로 정해짐에 따라 원, 명, 청 시대와 중화민국 초기까지 수도이던 베이징(北京)은 베이핑(北平)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시대 오나라 수도로 개발된 난징은 남북조 등 중국 분열시기에 남부지역에서 명멸한 왕조의 수도였으며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처음으로 통일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조카 건문제(建文帝)를 타도한 3대 영락제(永樂帝) 주체(朱棣)가 1421년 자신의 세력기반인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함으로써 난징이 통일왕조 수도로 지속된 기간은 불과 53년이었다.

1949년 8월13일 국공내전 승리를 목전에 두던 공산세력이 다시 베이징을 수도로 정함에 따라 난징의 통일국가 수도 시대는 명나라 때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0년 1개월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금릉(金陵), 건업(建業), 건강(建康), 백하(白下), 강녕(康寧), 상원(上元) 등 역사상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명 태조 당시에는 응천부(應天府), 태평천국난 때에는 천경(天京)으로 불렀다.

1976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시자이며 전인대(全人大) 상무위원장인 주더(朱德)가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이틀이 모자라는 반년 전인 이해 1월8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사망에 이은 주더의 죽음은 중국공산당 제1세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결국 주더의 사망한지 2개월 3일 뒤인 9월9일 1세대의 핵심 마오쩌둥(毛澤東)마저 동지곁으로 떠남으로써 1세대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주더는 마오가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자 “모두가 한 솥밥을 먹던 사이가 아닌가”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의 반골정신을 드러내 주는 한 사례로 마오와 주더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950년대 장정(長征) 간부들의 공적을 다룬 연극 ‘만수천산(萬水千山)’이 마오와 주더가 포함된 당 간부들 앞에서 공연되었다.

연극이 병사들이 “마오(毛)위원 만세”를 제창하는 것으로 끝을 맺자 덩샤오핑은 큰소리로 “한 가지가 빠졌지 않은가. ‘마오 위원 만세’ 뒤에 ‘주(朱) 총사령 만세’도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역사다”라고 말했다. 주더는 쓰촨성 출신으로 덩샤오핑은 그와 동향이다.

다음은 주더의 약전이다.

중국 군인·정치가. 1886년 쓰촨(四川)성 이룽 출생. 1909년 윈난(雲南) 강무학당(講武學堂)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했고 신해혁명(辛亥革命) 때에는 차이어 (蔡鍔)군의 보병 중대장으로 참가했다.

차이어가 죽은 뒤에는 군벌 간 전쟁에 휩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22년 상하이(上海)에서 쑨원(孫文)을 만나게 되어 그때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독일에 건너갔다.

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만났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괴팅겐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했고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추방당했다.

소련을 경유하여 1926년 귀국, 북벌에 참가했다. 1927년 왕자오밍의 국민정부 우한(武漢)정부의 난창(南昌) 군관학교 교장 겸 공안국장에 취임했다.

우한 정부가 왕자오밍이 장제스의 난징 정부에 동조하여 공산당을 배척하여 분열된 뒤인 그해 7월 저우언라이·허룽(賀龍) 등과 함께 난창(南昌)봉기를 꾀했으나 실패하자 장시(江西)·푸젠(福建)·광둥(廣東) 등으로 옮겨가면서 전투를 했다.

천이(陳毅 :1901~1972)와 함께 추수폭동 실패 후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간 마오쩌둥의 군대와 합류했고 1928년 5월 루이진(瑞金)의 중화(中華)소비에트 임시정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홍군 제4군을 조직, 총사령(總司令)이 되었다가 1930년 홍군총사령이 되었다. 1931년 중화소비에트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마오쩌둥과 함께 리리싼(李立三)의 좌경노선에 반대하여 창사(長沙)와 우한에 대한 진공작전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또 장제스(蔣介石)의 토벌군을 여러 차례 게릴라전으로 격파했다.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했고 1935년 1월 쭌이(遵義)회의에서 왕밍(王明)의 좌경노선을 비판하고 마오쩌둥이 당의 주도권을 잡는 것에 찬성했다.

도중에 북상항일(北上抗日)에 반대한 장궈타오(張國燾)와 함께 한때 남하했지만 뒤에 합류했다.

항일전쟁 중에는 팔로군의 총사령으로 화베이(華北)에서 전투를 했고, 항일근거지를 건설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한편 국민당에 의한 산간닝(陝甘寧: 陝西·甘肅·寧夏) 변두리 지역의 봉쇄에 대해서는 생산운동으로 극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이 되었고 랴오선(遼沈)·화이하이(淮海)·핑진(平津) 등의 3대 전투에서 국부군(國府軍: 국민당군)을 괴멸시켜 공산당이 승리하는 전기를 이루었다.

1949년 공산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국가부주석·국방위원회 부주임·당부주석·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위원장이 되어 군사면의 최고지도자이자 당·정부의 장로(長老)로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마오쩌둥을 도와 신중국 건설에 공헌했다.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아 한때 격하되었지만 린뱌오(林彪) 실각 후 1973년 10대(十大)와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복권되었다.

1921년 =몽골 인민혁명정부가 수립됐다.

1935년 = 티베트 14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났다. 본명이 텐진 가초(Tenzin Gyatso)인 14대 달라이 라마의 출생지는 동북 티베트의 탁처 지방이다.

달라이 라마 13세가 죽고서 2년 뒤에 태어났으며 출생한지 11개월 뒤인 1936년 6월2일 달라이 라마 13세의 환생으로 인정되어 라싸에 모셔지고 그 4년 뒤인 1940년 달라이 라마의 14세로 즉위하였다.

1911년 청군이 철수하고 1951년 인민해방군이 티베트 전역에 진주(사실상 점령)하기까지 40년 동안 티베트는 독립을 향유할 수 있었다.

1959년 3월 중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무력 독립항쟁이 실패하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로 망명하였고 망명생활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3년 = 국제의원연맹(IPU) 서울회의가 중국에 회원가입을 제안했다.

세계사 속 오늘

소련연방이 연방헌법을 제정했다(1923).

미국 워너브러더스사가 세계 최초 발성영화 `뉴욕의 등'을 제작했고(1928), 프랑스 세균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사상 최초로 인체에 광견병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1885).

영국 인문주의 사상가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머스 모어가 반역죄로 런던탑에 감금됐다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1535).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계획을 한국에 정식으로 통보했다(1970).
이승만. 윤병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미국 대통령을 예방하고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1905).

이때는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이 일본 연합함대가 1905년 5월27일 러시아 발트함대를 현해탄 대마도 해협에서 격파,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크게 기운 상황이었다.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등은 밀사 역할로 미국으로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아갔으나 대통령과의 직접 면담은 하지 못하고 청원서를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의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들의 청원서가 제출된지 23일 뒤인 7월29일 육군장관 태프트를 도쿄로 파견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필리핀과 한국의 지배권을 맞교환하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게 했다.

태프트는 루즈벨트 후임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대통령 퇴임 뒤 대법원장에도 임명됐다. 그는 또 현직 대통령으로 재임에 성공하지 못한 첫번째 대통령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패배는 루즈벨트가 진보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어 대선에 뛰어들어 공화당 지지세력의 표가 분산되어 민주당 우드로 윌슨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조약을 맺도록 주선했다. 루즈벨트는 이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 저명한 언론인 존 오버더프는 저서 '두개의 코리아'에서 미국이 조선과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튼 뒤 수호조약에서 조선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한국(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을 배신한 첫 번째로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를 하도록 길을 터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지적하고 있다.

오버더프가 지적한 다른 두 번의 배신은 1919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일으킨 삼일운동을 외면한 것과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2차대전 종결 직전 얄타밀약을 통해 한국을 소련과 분할하기로 합의한 것을 지적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배신 때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었다.

북한과 소련이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1961). 이로부터 5일 뒤인 7월11일 북한과 중국 간에도 같은 성격의 조약이 체결됐다. 중소 이념분쟁의 와중에서 북한은 톡톡히 실리를 챙긴 것이다.



2019/07/06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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