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1/20 21:20



[今天歷史-7월7일] 두 명의 다나카와 蘆溝橋 사건

장제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중국공산당 토지개혁 선언, 노무현 한중 정상 베이징서 회담, 페리 미 해군제독 일본에 개항 요구, 한국군 유엔군에 편입,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박세리 US 오픈 우승

7월7일은 중일관계에 있어 특별한 날이다.

1927년 7월7일

일본 총리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일본 천황(국왕)에게 군부 집권 이전까지 일본의 대중침략 정책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대지나 정책강령(對支那政策綱領)’을 비밀리에 상주했다-支那는 일본이 에도(江戶)시대(도쿠가와 바쿠후 시대) 중기 이후 2차대전 이전까지 중국을 총칭하여 일컫던 말. 이는 China를 한자어로 음사한 것으로 이는 일본이 변방이 아니라는 자의식과 함께 한족의 중국과 만주, 몽골, 그리고 티베트 등 다른 소수민족 지역과 구별하려는 의식에서 비롯된 용어로 생각된다.)

이후 다나카는 국민당의 중국 지배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 대가로 중국 본토에서 일본의 조약, 기득권 보호를 요청했으며 만주를 국민당의 지배밖에 두려는 정책을 취했다.

다나카의 강령 상주 10년 뒤인 1937년 7월7일에는 베이징 근교 노구교에서 일본군이 중국군을 고의적으로 도발하는 이른바 노구교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다시 이로부터 35년 뒤인 1972년 7월7일일본에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1918~1993)가 총리에 당선됐다.

만 54세의 젊은 신임 다나카 총리는 당선 후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조속히 실현하겠다고 말했고 중국은 이에 화답, 12일 다나카의 중국 방문을 초청했다.

이는 결국 이해 9월29일 다나카가 베이징을 방문한 가운데 중국과 일본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나카가 총리에 당선 된 뒤 불과 81일 만의 일이었다.

앞서 미국은 이해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지만 대만 문제로 인해 수교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원칙을 수용하는 결단을 내린 다나카를 높이 평가했다. 중국은 중일수교 20주년을 한달 앞둔 1992년 8월 27일 정계에서 은퇴한 다나카를 중국에 초청했다.

록히드 사건(이는 일본 다나카 정권의 대중 과속 접근에 대한 미국의 '괘씸죄'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음모설도 있다. 또 다른 음모설로는 4차 중동전에 따른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 지지로 선회하고 중동 지역 이외에서 석유를 수입하려는 석유 수입선 다변화로 인해 미국 석유 업계가 침체되어 '세븐 시스터스'로 요약되는 미국 석유 메이저들과 미국 정재계와 언론문화 부문 '빅브라더'의 역할을 하고 있는 유대계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 계기다.)

총리직에서 불명예 퇴진한 뒤 실형을 선고받기까지 했던 다나카는 당시 뇌경색 후유증으로 말도 못하는 처지였다. 중국 당국은 이 불우한 외국 노정객을 국빈급으로 각별하게 예우했다.

다나카의 희망에 따라 승용차를 20년 전에 그가 탔던 홍기(紅旗)를 배정했고 방중 외국 국가수반이 묵는 조어대에 묵게 했다.

또한 다나카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리펑(李鵬) 총리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와 회견자리도 주선했다.

8월28일 오후 중일우호협회 명예회장인 왕전(王震) 부주석과 회견했을 때 다나카와 왕전은 서로 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고 한다.

죽음을 앞 둔 두 노인이 그들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한 때를 회상케 하는 상대방을 만나 감격에 겨웠던 것이다.

다나카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애썼으나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단지 “우우...우우...” 하는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고 당시 홍콩 언론은 전했다.

왕전은 다음해인 1993년 3월12일 향년 85세로 타계했으며 왕전 보다 10세 연하인 다나카는 왕전 사망 9개월 뒤인 이해 12월16일 세상을 떠났다.

1937년= 베이징(北京: 당시는 베이핑 北平) 서남쪽 교외 부근인 허베이(河北)성 완핑(宛平)현 루커우차오(蘆溝橋 : 노구교)부근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하던 일본군이 사병 한 명이 실종됐다는 이유로 고의적으로 중국군을 도발, 전투가 벌어짐.

결국 중국 국민정부는 대일항전을 선언. 중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이 사건을 중국은 ‘7. 7사변’으로 일본에서는 ‘노구교사건’으로 부른다.

[今天歷史 -4월 24일] 1192년 노구교 완공

1956년 =미국 부통령 닉슨 대만 방문. 이로부터 15년 7 개월 뒤인 1972년 2월 닉슨은 대통령으로서 대만 너머의 공산중국을 방문한다.

1977년=중국 공군 중대장 미그 19기를 몰고 대만 타이난(台南) 공군기지로 망명.

1995년=미국 29명의 상원의원 장제스(蔣介石) 미망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를 위해 연회를 열고 쑹 여사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중미관계 증진에 기여한 바를 표창함.

2003년 = 노무현 대통령이 베이징(北京)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26년 = 장제스(蔣介石)가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1947년 = 중국공산당이 민주연합 정부를 수립함과 함께 토지개혁 실시를 선언했다.

세계사 속 오늘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 우라가(浦賀)항에 기항한 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통해 일왕(천황)에게 국서를 제출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1853).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 1794∼1858)

로드아일랜드 주 사우스킹스턴 출생으로 1809년 해군에 들어가 1812년 영미전쟁에 참가한 뒤 1833∼41년 해군교육 개혁과 해군의 근대화를 강력하게 주창하였으며, 1837년 미국 최초 증기군함 풀턴 2세의 함장이 되었다.

1852년 동인도 함대사령관으로서 일본원정을 명령받고 기함 미시시피호 외 3척을 거느리고 류큐(琉球), 오가사하라(小笠原)제도에 기항하여 1853년 7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에 미국 대통령 필모어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단 물러갔다.

1854년 2월 재차 도항하여 교섭한 결과, 3월31일 가나가와(神奈川)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에서는 시모다(下田), 하코다테(箱節)의 개항, 신탄(薪炭)의 공급, 조난선원의 보호, 영사 주재의 약속 등을 인정하였으나 통상조약은 포함되지 않았다.

1855년 귀국 후 태평양 지배를 노리는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 확장 및 투쟁을 경고하였다.

저서 '원정기(1856)'에는 일본의 경제대국화와 미일통상 경쟁을 예언하는등 일본인의 특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겨있다.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하였다(1898).

미국이 컬러 TV 방송을 시작했다(1950).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

조선과 러시아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1884).

주한 유엔군 사령부 창설과 함께 한국군이 유엔군에 편입됐고 영국군 함대가 한국전에 참전했다(1950).

경부고속도로 428㎞ 구간이 전면 개통됐다(1970).

프로골퍼 박세리 선수가 '98 US 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1998).



2019/07/0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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