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0/19 12:30



[今天歷史-8월21일] 국민정부 蘇와 불가침협정

중국 대표 UN 창설 논의, 트로츠키 사망, 하와이 미국 50 번째 주로 편입, 아키노 암살, 을사사화 발생, 일본 군함 강화도서 약탈과 살육 자행,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전두환 구가원수 추대 결의

1937년 8월 21일 중국의 국민정부와 소련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에서 불가침협정을 체결했다.

1944년 = 중국대표가 미국, 영국, 소련 대표 등과 함께 워싱턴 교외 덤버튼오크스에서 전후 창설할 세계기구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덤버튼오크스 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유엔헌장의 초안이 마련됐다.

이처럼 유엔 창설 과정에서 산파역을 맡았던 중국의 국민정부는 1949년 공산세력에게 대륙을 내어준 뒤에도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회원국의 위치를 지키다가 1971년 총회에서 축출되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이며 붉은 군대(赤軍)의 창설자인 트로츠키가 멕시코의 망명지에서 숨을 거두었다(1940).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뒤쪽에서 머리 정수리를 등산용 아이스 피켈로 가격 당한 지 하루 만이었다. 1879년 생으로 향년 61세였다. 그의 최대 정적이자 그의 암살을 배후 조종한스탈린과 동갑이다.

당시 2차 대전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때였음에도 그의 암살은 전황기사를 제치고 전 세계 주요 신문의 머리기사를 차지했다.



[外信Essais] 구(舊) 트로츠키와 신(新)트로츠키
2010/10/16 15:46


트로츠키(Lev Davidovich Trotskiy : 1879∼1940)

러시아 혁명가. 남(南)우크라이나 야노프카 출생. 본명 브론시틴(Bronshteyn). 부유한 유대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데사의 성바울로 실업중학교에 입학, 뒤에 니콜라예프로 옮겨가 중등교육을 마쳤다.

이곳에서 <남러시아노동자동맹>을 조직, 1898년 다른 멤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1902년 국외로 탈출해 런던에서 V.I.레닌·G.V.플레하노프 등이 편집하는 러시아사회민주당 기관지 《이스크라》의 기고가가 되었다.

1903년 제 2 회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소수파)에 속하여 직업혁명가 집단의 정당을 지향하는 레닌의 당 조직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우리의 정치적 임무(1904)》를 발표했으나, 조직적으로는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의 중간 입장이었다. 1905년 제 1 혁명 때 귀국, <페테르부르크노동자소비에트>를 지도, 나중에 그 의장이 되었다.

혁명 와중에는 H.바르뷔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발전시켜 《총괄과 전망(1906)》을 간행, 혁명이론을 총괄·체계화하였다. 같은 해 12월 소비에트의 다른 멤버와 함께 체포되어 다시 시베리아로 유형되었으나, 도중에 국외로 탈출해 빈을 거점으로 A.요페 등과 《프라우다》지를 발간하였다.

1914년 제 1 차 세계대전 때는 급진적 반전(反戰) 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켰으며, 1915년 반전파의 국제주의자가 모인 치머발트 회의에 출석해 그 선언서 안을 기초하였다.

1917년 2월혁명 뒤 5월에 귀국, 볼셰비키당의 제 6 회 대회에서 입당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혁명파의 세력확대와 함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어 지하 잠행 중이던 레닌과 함께 10월 혁명을 지도하였다.

10월 혁명 뒤 소비에트정부의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으로서 세계대전의 모든 교전국에 민주적 강화를 제안,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의 대독일 강화교섭 단장을 맡고, 독일 쪽의 최후통첩에 <전쟁도 않고, 강화에도 조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1918년 군사인민위원, 당 정치국원, 코민테른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한편, 1919∼20년 노동에 군대적 규율을 도입하는 노동의 군대화와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장하였으나 당내 논쟁에서 패하였다.

1923년 레닌이 질병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자 트로츠키는 당내에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창당멤버인 G.E. 지노비예프·L.B. 카메네프·I.V. 스탈린 3인조로부터 당 반대파로 비판 받고, 25년 군사인민위원 사임을 강요당하였다. 1926∼27년에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등과 합세 하였으나, 스탈린과 N.I.부하린의 연합에 패하여, 1927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8년 알마아타로 쫓겨났다가 1929년 국외로 추방당하였으며,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1938년 코민테른에 대신하는 제 4 인터내셔널을 창설하였으나,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의 수하에게 얼음 피켈로 정수리를 가격당하여 다음 날 사망했다.

망명 중 저서로 자서전 《나의 생애(1930)》 및 《러시아혁명사(1931∼33)》, 소련사회를 분석·비판한 《배신당한 혁명(1937)》 등을 간행하였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문학과 혁명(1923)》 등이 있다.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망명지인 미국에서 마닐라 공항 도착 직후 괴한에게 피살됐다(1983).

당시 대통령 마르코스 진영에서는 그의 죽음으로 마르코스의 정치적 최대 위협이 제거됐다고 생각했으나 그 것은 착각이었다. 이후 그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반(反) 마르코스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고 1985년 말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마르코스 진영의 부정선거로 코라손은 낙선했지만 필리핀의 ‘피플파워’ 시위로 마르코스 정권이 붕괴하면서 1986년 2월 코라손이 정권을 잡았다. 아키노가 암살된 지 2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2016년 초까지 필리핀 대통령 베니그노노이노이 아키노는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와 코라손 아키노 사이의 아들이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편입됐다(1959).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했으며(1545), 일본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해 약탈, 살육을 자행했다(1875).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결의했다(1980).

2019/08/2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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