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0/19 12:30



[今天歷史-8월25일] 국공합작 논의 시작, 국민당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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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 25일 코민테른대표 마린(馬林)이 소련 특사 자격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손문(孫文 :쑨원)과 만나 국민당과 소련 간 협력 및 국공합작 문제에 대하여 논의했다.

마린은 이 자리에서 중국 공산당원을 국민당에 가입하도록 허용하겠다는 코민테른의 방침을 전했다.

그는 국민당이 군사적으로 광저우(廣州)를 회복하는데 머무르지 말 것과 상하이(上海)를 기지로 하여 대중적 선전활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마린은 국민당의 개조를 건의했고 손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는 국민당이 공산당 조직과 비슷한 레닌주의 정당 조직을 갖추게 한 요인이다.

손문은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마린 즉 마링(Maring, Hendrik)은 본명이 헨리쿠스 스니블릿트(Hericus Sneevliet)로 네덜란드인이다. 그는 1921년 코민테른 대표로서 또 다른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Voitinsky)와 함께 중국 공산당 창당을 지도하였고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 등 중국 공산당 초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헨드릭 마링(Hendrik Maring 1883~1942)

네덜란드 사회주의자·혁명가. 사회민주노동당원으로 활약하다가 1913년 식민지 자바로 갔다. 자바에서 사회주의운동에 종사, 1914년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전신인 동인도 사회민주동맹을 결성했다.

1918년 식민지정청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하여 소련으로 건너갔고, 다시 중국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창당을 지도했으며 이어 제1차 국공합작 실현에 일익을 담당했다.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출석하여 식민지 문제 논의에 참여했으나, 후에 코민테른과 대립했다.


1912년 8월25일중국 동맹회(中國同盟會)가 공화당 등과 연합하여 국민당을 결성하고 베이징(北京)에서 창립대회를 가졌다.

1911년 신해(辛亥)혁명으로 청조가 붕괴되자 쑹자오런(宋敎仁)이중심이 되어 손문(孫文: 손문)이 이끌던 동맹회를 정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국민당 전신인 중국동맹회는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 民族·民權·民生)를 지도이념으로 내걸고, 청조 타도(淸朝打倒)를 궁극목표로 삼았던 혁명조직으로 190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성립되었다.

국민당은 곧이어 실시된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쑹자오런이 암살되고 손문의 2차혁명이 실패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손문은 중화혁명당을 결성하였으며 5·4운동을 계기로 대중정당인 국민당을 1919년 10월 창당하기에 이른다.

현 국민당은 창당 연도를 쑹자오런이 창당한 1912년이 아닌 손문이 창당한 1919년으로 잡고 있다.

국민당은 때마침 일어났던 러시아혁명과 민중운동이 제고되는 가운데 ‘연소(連蘇)·용공(容共)·공농부조(工農扶助)’의 정책을 제시했으며 레닌주의적 조직원리를 도입하여 공산당과 유사한 조직구조를 갖추었다.

전국대표대회 밑에 중앙위원회가 있고 성(省)·현(縣)·시(市)·구(區)에 각각 대표대회와 위원회가 있으며 군(軍)·산업·교육 등 각 분야에 당부(黨部)를 설치했다.이런 점 등이 서구 국민정당과 다른 국민당의 레닌주의 정당적 특징이다.

국민당은 1924년 공산당과의 국공합작을 성립시키는 동시에 광둥(廣東)을 중심으로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1925년에 손문이 사망하자 당내에서 좌·우의 대립이 생겼고,1927년 우파의 장제스(蔣介石)는 북벌(北伐) 과정에서 4·12 반공쿠데타를 감행하여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1928년 북벌과 통일을 완성하였다.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하는, 국민당이 집권당인 새로운 중화민국 정부를 세웠다. 이 새 통일 중화민국 정부를 통상 국민정부로 부른다.

국민당은 1937년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으나, 1940년 무렵부터 점차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한편 당내에서는 군사권을 장악한 장제스를 중심으로 파쇼적 독재정치가 자행되는 동시에 관료자본 및 매판적 독점자본(買辦的獨占資本)과의 유착(癒着)이 진행되었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국민당은 다시 공산당과 내전을 시작했으나 토지개혁을 주축으로 해서 광범위하게 농민대중을 결속시킨 공산당에게 참패하고 대만으로 옮겨갔다.

한편 손문 사후 줄곧 비주류로 있었던 당내의 좌파는 1948년 1월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대륙에 잔류하면서 공산당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대표적 인물이 손문의 미망인 쑹칭링(宋慶齡)이다. 공산정권이 수립된 이후 국가부주석에 선출되었으며 1981년 5월에는 명예 국가주석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대만으로 옮겨간 국민당의 국민정부는 장제스-장징궈(蔣經國) 부자의 강력한 독재체제를 확립하였고 미국을 배경으로 동서냉전 때에는 대륙에 대한 무력·반격을 외쳤지만 현실적으로는 한 지방정권에 불과하였다.

1971년 10월25일 중국의 유엔가입에 따른 유엔 모든 기구로부터의 축출, 1972년 2월 미·중 상하이(上海) 공동성명과 1972년 9월 중·일 국교정상화 등으로 인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1980년대에 들어와 공산당이 통일을 위한 평화공세를 강화하자 국민당은 이에 대응한 여러 움직임을 보였다.

[今天歷史-10월 25일] 유엔 중국 대표권 인정 역사결의

1987년 7월, 38년 동안 지속되어온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새로운 정당 결성을 인정하는 등 대만 내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1988년 1월 장징궈의 후임으로 총통에 오른 대만 출신 리덩후이(李登輝)는 국민당의 대만화를 추진하였다.

국민당의 대만화를 통해 입법원과 국민대회를 대륙을 포함한 중국 전역을 대표한다는 '허상 구조'에서 탈피, 대만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구조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리덩후이와 쑹추위(宋楚諭), 쉬수이더(許水德) 등 주류파와 하오바이춘(郝柏村), 린양캉(林洋港), 장웨이궈(蔣緯國) 등 비주류파 간 첨예한 갈등이 빚어졌다.

국민당의 대만화가 여론의 지지아래 진전을 이룩하자 1993년 자오샤오캉(趙少康), 왕젠쉬안(王建瑄) 등 비주류의 젊은 소장파 입법원 위원들이 탈당, 신당(新黨)을 창당했다.

이들은 창당선언에서 리덩후이가 영도하는 국민당은 손문 선생이 창당한 이념을 버렸기 때문에 중국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 중국 국민당의 정신을 이어 받는 신당을 조직한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국민당 원로 쉬리눙(許歷濃)도 '중국 국민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만 국민당'만이 존재할 뿐이라며 국민당을 탈당했다.

국민당의 보다 심각한 분열은 2000년 총통선거 앞두고 벌어졌다. 리덩후이 총통은 자신의 후계자로 국민당의 대만화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고 또 대중적 인기도 높은 쑹추위 대신 롄잔(連戰)을 택하였다.

대만 총통은 대만출신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대만 출신인 롄잔에 본토 출신인 쑹추위가 밀린 것이다.

쑹추위는 이에 반발, 탈당하여 친민당(親民黨 )을 창당했다. 이러한 분열로 말미암아 국민당은 2000년 총통선거에서 패배, 1949년 대만으로 옮겨온 이래 처음으로 권력을 야당(민진당)에 내주어야 했다.

총통선거 이후 분열은 가속화하였다. 총통 선거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던 리덩후이는 2001년 8월 ‘대만단결연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 국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계속된 분열의 결과로 국민당은 2001년 12월 총선에서 제1당의 지위마저 민진당에게 내주었다.

총의석 225석 가운데 민진당이 87석으로 제1당으로 올라선 가운데 국민당은 종전 115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들었다. 친민당은 46석, 대만단결연맹 13석, 신당 1석, 무소속 9석이었다.

국민당은 그러나 반세기 동안 집권해 오면서 방대한 관료체제를 구축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바닥을 치고 나와 대만 정계의 중추 세력으로 위상을 회복했다.

2001년 총선 이후 주요 선거에서 여당인 민진당을 누르고 승리하는 등 인기를 회복했다.

하지만 2004년 총통선거에서 롄잔 국민당 주석이 쑹추위 친민당 주석을 부총통 후보를 맞아들여 천수이볜 총통에 맞섰으나 불과 3만표 미만의 표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해 12월에 있은 입법원 선거에서 국민당과 친민당의 야당연합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국민당을 총통선거 패배를 딛고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국민당은 집권 민진당의 대만 독립노선 추구에 맞서 대륙과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2005년 4월 롄잔 국민당 주석의 중국 방문으로 큰 전기를 맞이했다.

롄잔 주석은 이해 4월 29일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공산당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는데 이는 장제스와 마오쩌둥 1945년 10월 충칭에서 회담을 가진 이래 60년만 양당 최고지도자의 대면이었다.

롄잔은 국민당 명예주석으로 물러난 뒤에도 자신의 2005년 중국방문으로 성사된 3차 국공합작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2007년 4월26일에도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와 3번째 회담을 가졌다.

2005년 7월16일에는 외성인 출신의 마잉주(馬英九) 타이베이 시장이 내성인 출신의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을 누르고 국민당 주석에 선출됐다.

1988년 1월 장징궈가 사망한 이후 17년간 지속돼 온 내성인 주석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마잉주는 이어 2007년 6월 24일 국민당 대회에서 총통 후보로 선출됐으며 2008년 3월 실시된 총통선거에서 당선됐다.

이로써 1988년 리덩후이의 장징궈 승계로 시작된 20년 내성인 총통시대를 마감시켰고 2012년 1월 재선에도 성공했다.

국민당은 2016년 1월 총통 선거에서 패배, 야당 민진당에게 8년 만에 정권을 다시 내주었다.

2019/08/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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