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0/19 12:30



[今天歷史-8월29일] 인민공사, 蔣毛 충칭회담 시작

아편전쟁 종결 남경조약 체결, 독일 비행선 세계일주, 蘇 첫 핵실험 성공, 몽골 고려 1차침공, 일제 대한제국 병탄 발표(경술국치)

1958년 8월 29일 중국 사회생활 및 행정조직의 기초단위로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인민공사는 1958년부터 1982년까지 지속된 중국 농촌의 행정, 경제 단위로 ‘대과반(大鍋飯 : 커다란 솥의 밥을 함께 나누어 먹자)’로 요약되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낭만적인 평등주의 이상이 구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인민공사화 정책은 초기 단계에서 수많은 아사자를 발생시켰으며 중국 경제의 근간인 농촌의 생산력을 저하시켜 결과적으로 중국 경제발전을 지체시켰다.

발전경과는 다음과 같다.

공산정권 수립 후 농업 집단화에 성공한 중국은 1958년 중반 무렵부터 종래의 농업생산협동조합을 합병시키고, 공업·농업·상업·학교·민병의 각 조직을 포함하며, 그때까지 향(鄕)정부가 가지고 있던 행정기능도 아울러 가지는, 인구 수 만 명에 이르는 하나의 커다란 ‘코뮌(自治體)’(코뮌의 중국어 번역이 바로 '公社'이다)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인민공사는 훌륭하다”라고 한 말이 신호탄이 되어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전국에서 99%의 농가가 참가하는 인민공사화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59∼1961년의 자연재해(거기에는 인민공사화가 야기한 人災의 측면도 있었다)와 그에 의한 농업·농민 피폐의 결과 인민공사제도는 재편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이후 최말단 단위인 20∼30호로 이루어진 생산대를 기본단위로 하여, 그들이 토지를 집단 소유함과 동시에 생산·분배의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그 위의 생산대대(生産大隊)가 비교적 대형자본을 소유하며, 나아가 공사가 관개(灌漑)설비와 대형 트랙터 같은 대규모 자본을 소유·관리하는 ‘3급 소유제’가 완성되었다. 또한 인민공사체제 밑에서 농민은 기본적인 의료·교육, 그리고 생활을 보장받았다.

농민은 생산대의 집단경작에 참가하여 각자 노동력의 질과 작업종류에 따라 정해진 노동점수를 기록하여, 그 해의 수익을 각 사람의 노동일(1勞動日은 보통 10점)에 따라 분배받았다.

다만 수확의 변동이 심하고 정부에 의해 농산물가격과 원재료가격이 정해지기 때문에 1노동일에 대한 단가는 낮았으며, 또한 변동이 잦았다. 그것을 보완한 것이 경작지의 5%를 한도로 각 농가에 경영과 생산물 처분을 맡기는 자류지(自留地)에 의한 소득이었다.

기구로서의 공사제도를 보면, 공사의 간부는 상급행정단위인 현에서 임명하며, 또한 중국의 다른 기구와 마찬가지로 공사의 운영은 실질적으로 공사의 당위원회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말단 생산대의 간부는 비교적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

1976년의 4인방 실각 이후, 그때까지의 인민공사제도의 비효율성과 국가에 의한 간섭이 비판을 받자, 개개 농가의 생산의욕을 높이기 위해서 자류지의 확대와 함께 여러 가지의 청부경작제, 특히 농가마다의 청부제 보급이 시도됨으로써 농업의 탈집단화(脫集團化)가 추진되었다.

1982년의 헌법에서 1958년 이전의 향정부제가 부활됨으로써 공사의 행정기능은 사라지고 동시에 인민공사도 해체되었다.



[今天歷史-2월 5일] ‘공업은 다칭(大慶)에서 배우자’, 상하이 人民公社(코뮌)



今天歷史-5월31일] 덩샤오핑 농촌 승포책임제 확대 촉구


1945년 =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蔣介石)측과 옌안에서 국민정부 임시 수도 충칭에 날아 온 공산당 영수 마오쩌둥(毛澤東)측이 회담을 갖고 일본 패망 후의 국가 수립 문제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다.

같은 날 국민정부가 일본 패망에 따라 청일 전쟁 패배로 1895년 이래 일본의 통치 하에 놓여있던 대만 성ㅔ 대한 주권을 회복함에 따라 대만성의 행정장관으로 천이(陳儀)를 임명했다.

1842년 = 청나라와 영국과 아편전쟁 종결을 위한 남경(南京) 조약을 체결했다.

1962년 = 해외로 유실되어 97년간 떠돌던 태평천국의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의 보검을 한 영국인이 구입한 뒤 중국 당국에 반환했다.

1969년 = 중국의 성악가 장청타오(姜成濤)가 프랑스에서 대만으로 망명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고(1949), 독일의 비행선 ‘그라체프펠린’ 호가 세계일주 비행에
성공했다(1929).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한일합방 조약이 발표되었고(1910), 몽골의 제1차 침략이 시작되었다(1231).

[今天歷史-8월 22일] 한일늑약

일본은 병탄후 대한 제국 지배층에 대한 회유책 일환으로 76녕에게 훈작과 함께 합방 은사금이란 이름 아래 거액을 나누어 주었다. "나라를 팔아 먹었다"라는말은이들이 이를감지덕지하며 이 돈을 수령햇기 때문이다. 은사금을밪지 않고 훈작도 거절한 인물은 철종의 사위 박영효 1명 뿐이다. 그는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 정변으을 일으킨 주역으로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뒤 일본에 등을 돌린 김옥균과는 달리 친일적 정치적 행보를 취햇다. 그러나 을사 늑약 이후 친미 친러우ㅢ 자세를 취해오던 이완용이 친일파의 리더로 나서면서 그는 일본 병탄 움직임에 적극적 반대도 그렇다고 미온적 지지도 보내지 않는 처신읋 했을 뿐이다.

재야 역사 학자 이덕일이 조사 한 바에 따르면 왕족 외에 당색이 파악되는 64명 중 노론에 속하는 인사가 56명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소론이 6명, 북인이 2명이었으며 남인은 한 명도 없었다.

노론과 소론은 인조 반정을 일으킨 서인이 분파돈 당파다. 노론은 인조 반정이래 나라가 망할 때까지 정치를 주도해온 당파로서 국권 상실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망국 당시 4색 당파의 역학 구도를 반영한 것이라는 일반적 분석과 함께 노론 당파의 정치 적 몰염치를 비판할 수 있겠다. 또한 일본이 나라를멸망케 한 공적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 그에 비례하여 보상했다는 비아냥 섞인 역설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지배층 인사중 이들과는정반대로 만주로 망명, 병탄에 즉각 저항하는 행동을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회영, 이시영 등 6형제는 가산을 모두 팔아 40만원(현재 시가로 600억 원) 상당)의 자금을 조성한 뒤 가족은물론 주인들과 뜻을 같이한하인과 그 가족들까지 이끌고 국권을상실한 나라를 떠났다.

이회영은 병탄 1년 뒤인 1911년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햇는데 이는 구권을 되찾기 위한 인재 양성을 위해서였다.

이회영형제들은 조선 선조 때의 며명신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항복제자들의다수가 인조 반정에 참여햇으니 이들 형제들은 당색으로 따지면 노론의 핵심에 해당된다.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민정당 원내 총무와 국민의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역임한 이종찬과 더불어 민주당 원내 대표를 역임한 이종걸이 이회영의 손자다.

소론 계통의 강화도의 양명학자들과 충청도 진천의양명학자들 그리고 경상도 안동의 남인 게통의 인사들도 만주로 망명, 이회영 형제들과 함께 국권 회복 활동의 첫발을 디뎟다.

'신부가 못이기는체결혼식에 참여하듯 조선인들이 한일 합병을 받아들였다'는 당시 한 영국 신문의 논평을 반박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지'의 분명한 증거다. 국권 상실 바로 직후에 국권 회복의 씨앗이뿌려진 것이다.

2019/08/2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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