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0/19 12:30



[今天歷史-9월1일]中 蘇공산당 해체 사회주의 고수 천명

베이징-홍콩 주룽철로 전 구간 운항, 청나라 입헌 군주제 준비 조칙, 티베트 자치구 선포, 2차 세계대전 발발, 일본 간토 대지진, 대한항공 여객기 소련 전투기에 피격 추락, 일본 자위대 군함 광복 후 첫 부산입항

1991년 9월1일중국 리펑(李鵬) 총리가 소련공산당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사회주의를 고수할 것임을 천명했다.

선언 바로 앞선 이해 8월19일 소련에서는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3일천하로 끝난 뒤 8월24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소련공산당 탈당에 이어 8월29일 의회의 소련공산당 해체 결의가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을 해체하면서까지 소련 연방체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같은 해 12월 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주도한 소련 해체 선언으로 고르바초프의 노력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벨라루시 대통령 등 3개 슬라브계 공화국 수뇌들은 소련 해체 대안으로 독립국가 연합 결성 추진을 선언하고 같은 달 21일에는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아타에서 발틱 3국과 그루지아를 제외한 소련 11개 공화국이 소련 해체와 독립국가 연합 결성에 서명했다.

결국 1991년 12월25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에서 사임함으로써 소련이 해체됐다. 소련은 1992년 1월1일자로 공식 해체되고 각 공화국은 독립 주권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을 때 소련 고르바초프는 정치 우선의 개혁을 택했고 중국 덩샤오핑은 경제를 우선한 개혁의 길을 추진했다. 그 결과 중국은 위기를 일단 극복했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今天歷史-5월15일] 고르바초프 방중 장쩌민 방소

1996년 9월1일 베이징(北京)과 홍콩의 주룽(九龍)을 연결하는 전장 2536km의 ‘징주철로(京九鐵路)’전 노선에서 기차운항이 이루어졌다.

1906년 = 청조가 입헌국가 준비를 위한 조칙을 반포하고 관제개혁에 착수함.

1965년 = 티베트가 중국 자치구로 선포됐다

[일지] 티베트...20세기 이후.

세계사 속 오늘

일본에서 간토(關東) 대지진이 발생하였다(1923).

오전 11시 일본 간토 지방 남부를 습격한 대지진의 진원지(震源地)는 사가미(相模)만으로 동경 139° 3부, 북위 35°2부의 지점이었다. 최대진도 8.3이었다. 첫 지진 이후 5일 오전 6시까지 인체가 느낀 여진(餘震)은 936회에 달했으며 각지에 해일이 내습했다.

지진으로 일본의 심장부인 게이힌(京濱) 지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피해는 도쿄를 중심으로 가나가와(神奈川), 지바(千葉), 사이타마(埼玉), 이바라키(茨城), 시즈오카(靜岡), 야마나시(山梨)의 1부(府) 6현에 이르렀다.

도쿄시청에서 펴낸 ‘도쿄 지진록 전집(1926)’에 의하면, 이재자(罹災者)는 약 340만명(1부 6현 인구의 29%, 그중에서 요코하마·橫濱시는 인구의 93%, 도쿄시는 인구의75%), 사망자 9만 1344명, 행방불명 1만 3275명, 중상 1만 6514명, 경상 3만 5560명이었다.

재산피해로는 전소(全燒) 38만1090세대, 전괴(全壞) 8만3819세대, 반괴(半壞) 9만1232세대, 손해액은 약 55억엔으로 추정된다.

1922년도 일반회계예산이 약 14억7000만엔인 것과 비교하면 그 손해액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알 수 있다.

칸토대지진이 있을 무렵의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여서, 대내적으로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운동의 고양에 따른 민중운동의 조직화와, 그것에 반발하는 우익의 대두,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 암살과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죽음이 계기가 된 천황제의 동요, 전후(戰後) 공황에 의한 타격 등에 의해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또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유·워싱턴체제 하에서 영미(英美)와 대립의 심화, 한국과 중국의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격화, 시베리아 출병의 참패 등에 의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간토 대지진 이후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내각은 도쿄 주변에 계엄령을 펴는 동시에 비상 징발령(非常徵發令)을 발하여, 구호·복구활동에 착수하였다.

일본은 11월15일까지 계엄령을 유지하며,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 등 1부 3현 주민의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

또한 일본 관헌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재일(在日) 한국인의 폭동설(暴動說)을 조작 유포,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 곳곳에서 한국인을 야만적으로 학살하였다.

즉, 불시에 선포된 계엄령 하에서 군경(軍警)을 중심으로, 그리고 각지에서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무차별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일본은 세계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인 폭동설은 거짓이니…’라는 급고전단을 살포하고 일본인의 자중을 호소했다.

또한 10월20일에는 학살사건의 보도금지를 해제하였으나, 군대·관헌이 학살한 것은 모두 은폐,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기에 급급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 특파원이 조사 보고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의 피살자 수는 도쿄에서 752명, 가나가와 현에서 1052명, 사이타마 현에서 239명, 지바 현에서 293명 등 각지에서 6661명이 피살되었다.

간토 대지진은 20세기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지진 중 최대 규모이며 21세기 들어와 2011년 3월11일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규모 9)이 일어나기 전까지 과학적 지진 관측이 시작된 이래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지진으로 기록됐다.

나치 독일군이 전격전(電擊戰 : Blitzkrieg) 방식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1939).

전격전이란 주로 지상군과 공군의 잘 통합된 공격력으로 적을 신속히 기습 공격하여 적진을 교란시키고 적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가하는 군사작전이다.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에 앞서 1938년 스페인 내전에서 이를 선 보였으며 1940년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를 침략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수십, 수백 대의 전차로 편성한 기갑부대를 앞세운 공중과 지상 부대가 협력하여 이루어지는 입체적 전격전 전술 개념은 소련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독일에서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각기 독자적으로 창안했다.

투하체프스키의 '종심돌파 전술 교리'의 개념은 대규모 전차 기갑 부대로 적 중앙을 돌파하여 적 진영에 혼란과 공포를 불러 일으켜 적 진영 전반을 흐트러뜨린 뒤 잘 무장한 보병 부대로 궤멸시킨다는 것으로 전격전 교리의 원형이다.

이는 러시아 원정의 주인공 나폴레옹이 구사하였던 포병부대로 타격한 뒤 정예 기병대로 중앙을 돌파한다는 이른바 '중앙돌파 전술 개념'을 이어받아 탱크, 즉 전차와 같은 각종 신무기 개발을 흡수하여 20세기 버전화한 것이다.

1차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같은 처지인 투하체프스키와 포로수용소에서 친교를 맺었던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도 1차대전 말 발명된 전차에 주목하여 역시 독자적으로 전격전 개념을 수립했다.

미국에서는 조지 패튼이 이 전술 개념을 창안, 전력화하였다.

구데리안이 전격전 개념을 창안하였으나 이를 2차대전에서 극적으로 선보인 독일 장군은 메르빈 롬멜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다.

프랑스가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마지노선을 무력화한 아르덴느숲 돌파작전을 수립한 인물은 바로 만슈타인이고 아프리카 전선에서 갖가지 기상천외의 기갑전을 펼쳐 '사막의 여우'로 불리며 연합군의 경탄을 자아낸 인물은 롬멜이다.

소련 투하체프스키는 나치 독일의 역공작과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불신이 겹쳐 독소전 발발 4년 전인 1937년에 반혁명죄로 부인,형제와 함께 처형됐다(딸은 수용소에 갇혔다. 니키타 흐루시초프 시집권 시기인 1957년에 복권됐다).

독소전 발발 직후 소련군이 산사태 무너지듯 붕괴한 것은 대숙청 과정에서 투하체프스키 등 소련군의 장성과 고위 장교들이 대거 쳐형되고 투옥됐기 때문이다.

독소전 후반기 소련군이 반격을 가할 수 있던 데는 스탈린의 대단히 성공적인 슬라브 민족주의 고취와 제2 전선 형성을 위해 미국이 제공한 막대한 물량 지원 외에 투하체프스키가 육성한 살아남은 장성들이 꼽히고 있다.

'투하체프스키 키즈' 중 한 사람은 레닌그라드 방어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 진격을 막아내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낸 게오르기 주고프가 있다.

주고프는 1차대전 후 독일군과 소련군 간 군사교류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만슈타인과 친교를 맺은 인연이 있다.

드골의 전격전 개념은 프랑스 참모본부가 받아들이지 않아 드골이 지휘하는 부대에만 소규모로 적용되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의 전격전에 마지노선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드골의 부대는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는 있었으나 거대한 독일 전차 군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드골은 덩케르크를 통해 영국으로 후퇴 망명하여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 나치 독일과 대항했다.

패튼도 대전 전에는 미국 군부에서 '왕따' 처지였으나 그가 지휘하는 전차군단은 아프리카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독일 진격 등 유럽 전선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1973년 10월 이 전술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대한항공(KAL) 007기가 사할린 근해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하였다(1983).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 2척이 2차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부산항에 입항함(1996).

2019/09/0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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