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옐친’ 판위에(潘岳) (3) 지난 해 2월 장쩌민의 책상 위에는 두개의 ‘만언서(萬言書)’가 놓여졌다. 하나는 ‘지하 총서기’로 불리는 덩리췬(鄧力群)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판위에의 것이었다. 판위에의 만언서는 홍콩의 시사잡지 개방에 공개되어 중국 정계를 진동시킨 바로 그것이다. 물론 문건의 제목이 만언서는 아니다. 이 시사용어는 1992년 덩리췬의 문건에서 비롯됐다. 덩리췬은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에 나서기 전, 개혁ㆍ개방 정책의 철회를 촉구하는 문건을 당 지도부에 제출했다. 이 문건이 1만 여 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기에 홍콩의 언론 등이 이를 ‘만언서’라고 지칭한 것이다. 한동안 만언서는 덩리췬이 발표한 문건들들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으로부터 소외된 개혁파 혹은 반체제 인사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덩리췬처럼 방대한 분량의 문건에 담아 당 지도부에 제출하기 시작하면서 만언서는 당의 노선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문건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만언서는 집체(集體)작품이다. 덩리췬의 만언서가 덩을 포함한 보수적인 원로 이론가들과 신진 좌파 이론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며 분량이 수십 만자인 판위에의 만언서 역시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의 수십 명의 신예 학자와 이론가들이 함께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덩리췬과 판위에는 이들 문건 작성의 지휘 책임자이다. 1992년 이래 당 대회 등 중요 당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언서를 발표한 덩리췬은 이번 문건에서는 한 해 전에 장쩌민의 장쩌민이 운을 띄운 ‘3개 대표론’을 공격했다. 장의 3개 대표론이 계급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영도 노선을 방기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는 당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해를 준다고 비판했다. 판위에의 만언서는 덩리췬과는 정 반대로 3개 대표론을 옹호하며 그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판위에의 만언서의 내용을 살펴 보자.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 전환을 촉구 판위에의 만언서의 제목은 ‘혁명당이 집권당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사고에 대하여’다. 판위에는 중국 공산당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상황인식에서 출발한다.그는 그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혁명당에서 변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또 당의 변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그 이유로 날로 강도를 높여가는 서방진영의 군사, 외교적 압력과 정치 사회적 불안정 요소로 인해 당이 도전받고 있는 현실을 들었다. 중국 공산당은 안팎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판위에에 따르면 혁명당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정치체제를 개편하지 않고 원래의 혁명 수단으로 중국을 통치, 결국 평화 건설의 수용에 적응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 때문에 모순은 누적되고 부패는 날의 갈수록 심해져 동란의 요소가 사회 곳곳에서 발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판위에는 중국 공산당이 유지하고 있는 혁명당의 속성으로 ▲투쟁철학의 신봉 ▲특정 계급을 대표 ▲국가 업무에 대한 직접적 간여 ▲특정 이데올로기 견지 등 네 가지를 들었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당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사회 충돌과 경제위기가 중첩되게 되면 또 다른 폭력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폭력 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정치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이렇게 될 때라야만 중국 공산당의 통치가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위에는 주장한다. 그럼 혁명당에서 어떻게 변화하여야 할 것인가. 판위에는 집권당이라는 개념을 해답으로 내놓고 있다. 혁명당이 투쟁을 중시하는 반면 집권당은 평화와 안정을 지향한다. 집권당은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지 않고 각 계층의 이익의 균형을 추구한다. 또 투명한 입법 실현과 법의 의해 업무를 처리한다. 판위에는 중국 공산당이 혁명당에서 이러한 속성을 지닌 집권당으로 변모할 시점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집권당 수준과는 아주 동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련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 문제를 타개해 나가야 한다고 판위에는 보는 것이다. 판위에에 따르면 현재 당은 전인대 정협 국무원에 군림하고 있다. 당은 이들과의 관계에서 혁명당이 아닌 집권당으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혹은 기타 사회 기구 내의 당 조직과 관리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재정립하여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판위에는 당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의 하나로 당의 사회적 기초를 명확히 하는 문제를 든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히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을 거론한다. 광범한 인민군중의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장쩌민의 주장은 표면상으로 현대 정치이념과 상치된다고 판위에는 지적한다. 현대 사회에서 한 정당은 일부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때문에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현실적 이유에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며 판위에는 3개 대표론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집권당으로서의 중국 공산당은 그 전제로서 성숙한 사회시스템을 형성해야 하며 각 방면의 이익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판위에는 주장한다. 3개 대표론 중 선진적인 생산력을 대표해야 한다는 문제와 관련, 그는 이를 선진 생산력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과 계층의 발전 요구를 대표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혁명 시기 혁명당으로서의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을 대표해야 했다. 하지만 현재는 과학기술인과 기업가의 발전욕구를 대표해야 한다. 이들이 생산력발전의 질과 양, 그리고 속도를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판위에는 이어 혁명의 방식이 아닌 사회적 방식으로 사회를 다스려야 당이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방식의 통치란 당이 중간계급을 배양하고 기층 계급의 자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그는 규정한다. 최종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정치체제의 개혁을 추진, 현대적인 정치체제 구조를 창립하여 완성시켜야 한다. 이는 권력감시와 견제 시스템을 건립하는 것이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차액(差額)선거제(선출 인원보다 2분의 1~ 5분의 1 정도 많은 후보자들을 내세워 낮은 득표자 순으로 탈락시키는 제한적 경쟁선출 방식)실시를 확산시켜야 하며 탄핵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판위에는 주장한다. 5항원칙을 내세워 정치개혁의 한계를 설정 판위에는 그러나 이같이 정치개혁의 필요성과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으로 한계를 설정했다. 그리고 이를 덩샤오핑의 ‘4항원칙’ 처럼 ‘5항원칙’이라고 명명했다. 그 5항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일당 집권하의 당내 민주를 실현해야지 다당제를 수용해서는 안된다. ▲공산당 지도하에서 법에 따른 통치를 하되 삼권분립을 도입해서는 안된다. ▲신문과 여론의 감독 기능을 강화해야 하지만 언론자유는 용납할 수 없다. ▲군 현대화를 진행시키되 군사국가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전인대 제도를 발전시켜야 하지만 보통선거제는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 시집을 내고 장정(長征)의 행로를 답사하는 등 마오쩌둥을 흉내냈던 판위에는 자신의 정치개혁 이론을 구성하면서 짐짓 덩샤오핑을 본뜨고 있다. 개혁 개방추구와 ▲사회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전정(專政)▲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ㆍ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견지라는 덩의 4항 원칙은 상호 모순되는 것으로 비판받아 왔다. 판위에의 5항 원칙은 하나하나 이와 유사한 모순구조로 되어 있다. 판위에의 기상만큼은 대붕(大鵬)의 기상이라고 높이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차이나워처> <계속>

▶ 2002/01/25 1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