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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리덩후이, 1996년 총통선거와 민난화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전 총통의 모세 관련 발언을 전하는 기사에서 익숙지 않은 단어가 걸렸다. 그 단어는 ‘다판(打拚)’이었다. ▶ 관련기사 보기
사전을 찾아보니 ‘전심전력을 다 한다’라는 뜻의 민난화(閩南話) 였다. 민난화는 대만과 푸젠(福建)성에서 쓰여지는 방언이다.
리덩후이는 1996년 총통선거 승리직후 전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민난화로 지지자들에게 감사 인사말을 했다. ‘대만 독립주의자’로서의 커밍아웃은 이미 그 때 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음 글은 그 당시에 대한 추억이다.<차이나워처 주>
대만의 총통선거와 민난화
1996년 3월 23일 오후 8시.
대만 타이베이(台北)시 국민당총통선거운동본부.
리덩후이(李登輝)총통부부가 1만여 명의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서 단상에 올랐다. 중국의 무력시위로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치러진 대만의 총통선거의 결과는 싱거웠다.
리덩후이 총통이 50% 이상의 지지를 얻어 압승한 것이다. 개표 초기에 벌써 대세는 결정되어 투표 종료 불과 4시간 만에 이처럼 성대한 승리축하대회를 갖게 된 것이다.
만다린, 즉 푸퉁화(普通話 :중국 표준어)로 인사말을 하던 리덩후이 총통이 '갑자기' 민난화(閩南話: 대만의 방언)로 바꿔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라는 표현은 적당치 않다. 민난화 이후에 영어로도 인사말을 했으니 민난화로 말한 것은 리 총통이 사전에 의도한 것이었다.
TV를 통해 당선 축하대회를 지켜보던 필자는 리덩후이 총통의 민난화 사용이 대회장의 지지자들에게 조차 '당혹'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다린으로 연설하는 동안 말이 끝나는 순간마다 열광적으로 환호를 하던 지지자들은 민난화로 말하는 동안은 거의 침묵에 가까운 무반응이었다.
리덩후이 총통은 선거기간 동안 자주 민난화로 유세를 했다. 하지만 당선 축하대회는 베이징(北京)을 포함한 전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였다. 유세 때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민난화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식석상에서는 사용이 금지되던 '불온한' 언어였다.
대만국민 그리고 중국당국과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민난화를 사용한 리 총통의 메시지는 복합적이었다. 총통선거를 앞두고 무력시위를 벌인 중국과 양안긴장을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세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추구하던 '대만의 대만화 작업'을 주춤거리지 않고 계속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대만국민들과 지지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어정쩡한 모습을 벗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대만 출신의 리총통이 대만독립을 주창하는 민진당(民進黨) 인사들을 접견할 때는 공용어가 아닌 민난화로 대화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만 출신의 내성인(內省人)들의 전폭적 지지가 압승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본 리 총통은 본토출신 외성인(外省人)들의 의구심을 의식, 공식석상에서 민난화 사용을 자제하던 신중한 태도를 더 이상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리덩후이의 이 도전적 태도는 중국이 무력시위를 해야 했던 명분을 역설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대만 총통선거를 앞두고 한국기자 24명을 포함, 전 세계 620개 매체로부터 약 700여명의 기자들이 대만으로 몰려들었다. 1971년 유엔에서 축출된 후 대만이 이처럼 국제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었다.
대만은 총통 직선을 두고 중국 5,000년 역사상 백성들에 의해 지도자를 뽑는 일은 처음이라며 그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중국의 무력시위 때문이었다.
최종개표 결과 집권 국민당의 리덩후이 후보는 유권자의 76%가 창여한 높은 투표율 속에 53.42%의 지지를 획득했다. 2위는 대만의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민진당(民進黨)의 펑밍민(彭明民)후보였다. 20.90% 지지를 얻었다.
대만 출신이면서도 대륙과의 통일노력을 강조한 전 사법원장(대법원장) 린양강(林洋港) 후보는 14.9 %, 대륙 출신의 전 감사원장 천뤼안(陳履安)후보는 9.87 %를 얻는데 그쳤다.
중국이 기피인물로 선언한 리덩후이와 펑밍민 두 후보가 얻은 지지표는 74.32 %로 전체 투표자의 4분의 3에 달했다. 중국의 군사훈련은 이솝우화속의 '북풍' 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다.
물론 선거전 리덩후이 총통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세력과 그의 대만화 정책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는 국민당 탈당세력의 협공을 받는 가운데서도 50 %이상 높은 지지를 획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낙관하는 분위기는 아니였다.
개표결과 유일한 본토 출신 총통후보로 도덕정치 구현을 내세운 천뤼안 후보의 득표율은 예상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린양강후보가 10%대의 저조한 득표율로 3위를 차지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중국의 무력시위의 최대의 피해자이다.
린양강은 1988년 1월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급서로 부총통으로 있던 리덩후이가 총통에 오르기전까지만 해도 대만출신 정치인 중 가장 앞서 나가던 인물이었다. 리덩후이가 농학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는 동안 린양강은 행정부와 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리가 테크노크라트였다면 린은 로얄로드를 밟아온 정통 정치인이었다. 장징궈 총통이 리덩후이를 부총통으로 선택한 것은 린양강의 출중한 능력을 '위험시'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장징궈 총통 사후 전개된 사태발전은 장총통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얼굴 마담'의 역할에 머물 것으로 생각되던 리덩후이는 뜻밖의 능란한 정치력으로 본토 출신의 동의와 지원을 얻어가며 대만화의 길을 강력하게 추구해나갔다.
반면 '경계'했던 린양강은 리덩후이 총통의 강력한 대만화 정책 추진에 반대하는 본토 출신의 지지를 업고 리덩후이 총통과 대결한 것이다.
린양강은 대만출신인 자신이 대만인들의 지지를 상당수 얻을 수 있는데다 리 총통의 대만화 정책 추진에 불안해하는 본토출신의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하면 해볼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 중국의 군사훈련이 없었더라면 린양강은 보다 선전했을 가능성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그 선전을 기반으로 해 4년후를 기약 할 수도 있었다. 린양강은 68세로 리덩후이보다 5살 아래였다. 하지만 결과는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길 정도로 린양강의 참패로 끝났다.
선거 전날 수도 타이베이시에서 열린 린양강 후보 지지대회에서 한 연사는 린양강 후보 주요 요직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동안 리덩후이는 도대체 어디 있었는가 하고 말해 '타도 리덩후이'를 외치던 열성 지지자들의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운과 그리고 운을 활용할 줄 아는 리덩후이의 능력 때문에 린양강은 좌절하고 만 것이다. 대만의 두 지도자의 명암은 대륙의 패권을 놓고 엎치락 뒤치락 했던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최종승부를 연상케 하였다.
총통 직선을 처음 치루는 탓인지 선거 방식은 네 후보 진영 모두 비슷했다. 후보 이름이 적힌 모자와 깃발, 허리띠와 조끼, 공약과 구호가 3면을 둘러싼 연단이 가설된 소형트럭, 그리고 거리에서의 악수 공세, 대만 총통 선거전의 후보 유세활동을 구성하고 있는 공통요소였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와 같은 죽기살기식의 과열된 양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투표 전날 밤 타이베이시 중심가에서 네 후보 진영은 각각 지지자 단합대회를 열었다. 이들 대회장은 걸어서 왕래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위치하고 있었지만 지지자들 간의 충돌과 같은 불상사는 없었다. 축제식으로 치러지는 총통선거였다.
선거운동이 이처럼 신사적으로 치러진 것만은 물론 아니다. 선거종반 국민당의 국민대회(國民大會: 헌법수정권 등의 권한을 갖는 헌법상의최고 의사결정기구로 과거 우리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성격이 비슷하며 총통선거와 함께 실시된다)출마자 몇몇은 일간지에 '대만을 팔아넘기지 말라'는 자극적인 문구를 표제로 한, 5단 크기의 린양강 후보 비방광고를 게재했다. 바로 다음 날 린양강 후보 측에서는 리덩후이 총통이 과거 공산당원이었다고 주장하는 광고를 게재했다.
선거 막판의 흑색선당도 기승을 부렸다. 민진당의 펑밍민 후보는 투표일이 가까워오면서 자신의 공약을 앞세우기 보다는 국민당 측에서 민진당원들이 리 총통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했다는 흑색선전을 펴고 있다고 비난하는 데 더 열을 올렸다.
천뤼안 후보도 자신이 투표 직전 후보를 사퇴, 린후보 지지를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을 잠재우느라 바빴다. 한편 대륙출신 2세들이 국민당을 탈당하여 만든 신당은 린양강 후보지지에서 천뤼안후보 지지로 바뀌었다는 루머를 부인하기위해 공식 기자회견을 열기까지 했다.
이 같은 흑색선전의 백미는 린양강 후보가 자신이 총통에 당선되면 단행할 정부인사 내용을 발표하면서 천 후보를 행정원장에 집어넣은 것이다. 물론 이는 자신과 노선 차이가 없는 천 후보의 사퇴를 유도하기위한 것이었지만 천 후보는 끝내 사퇴하지 않았다.
대만총통선거는 중국의 군사훈련위협에도 불구하고 리덩후이 총통의 '대만화 정책'에 대한 대만 국민들의 확고한 지지를 확인해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소득은 커녕 손해만 보았다는 평가는 성급하다.
중국은 대만이 분리 독립을 추구할 경우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를 저지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음을 대만 국민들과 전 세계에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큰 소득을 거두었다. 또한 무력시위를 통해 대만을 경제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도 중국의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의 소득은 리덩후이 총통의 이른바 '방문 외교'의 확산을 저지했다는 것일 것이다.
리덩후이 총통의 일본 방문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미국에 이어 일본 방문을 성사시킴으로써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던 시도는 또 한번 초기 단계에서 좌절을 겪은 것이다. <1999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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