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3/29 22:03



4인방 張春橋 지난달 21일 88세로 사망

4인방의 한 사람인 장춘차오(張春橋)가 지난달 21일 암으로 사망했다고 신화통신이 10일 보도했다. 1917년 생으로 향년 88세.

장춘차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처 장칭(江靑), 노동자 출신의 왕훙원(王洪文), ‘신편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로 문혁의 봉화를 올린 야오원위안(姚文元) 등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이끌었으며 이들의 사실상의 리더였다.

이들 4인에 대한 '4인방(四人幇)'이란 명칭은 마오쩌둥이 붙인 것이다.

중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문화대혁명 11년 동안(1966~1976) 득의의 시절을 보냈던 그는 중국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1976년 이후 29년 동안은 갇힌 신세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 득의의 문혁시절 장칭과 자리를 함께한 장춘차오(오른쪽)

장춘차오는 산둥(山東)성 쥐예(巨野)현 출신이다. 장칭과 또 다른 문혁의 주역 캉성(康生)과는 같은 산둥성 출신이라는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1936년 상하이문예가협회원(上海文藝家協會員)이 되었으며 1943년 중국공산당 해방구에서 선전활동을 했다. 공산정권 수립 후인 1954년 상하이 해방일보(解放日報) 사장이 되었다.

◀ 1981년 재판정에서의 장춘차오.

1956년 상하이 당위원회 문예공작부장, 1963년 상하이 당선전부장을 거쳐 문혁이 시작된 1966년 상하이 당제1서기와 당중앙문혁 부소조장(副小組長)이 되었다. 1967년 왕훙원과 상하이 코뮌을 수립하고, 상하이 혁명위원회 주임이 되었다.

1973년 정치국 상무위원, 1975년 부총리, 군총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논문 ‘부르주아에 대한 전면독재’를 발표하는 등 문혁의 노선 정립에도 주력했다.

그러나 그는 마오가 사망한 1976년 9월 9일로부터 채 1개월이 지나지 않은 1976년 10월 6일 다른 3명과 함께 체포되어, 1980년 반혁명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과정에서 묵비로 일관한 그는 1981년 2년 집행유예부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7년 2월 유기징역 18년, 정치권리박탈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98년 보석되어 그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장춘차오의 사망으로 이제 4인방 중 생존자는 야오원위안 만이 남았다. 야오원위안은 1931년생으로 올해 74세이다. 그가 문혁의 불씨가 된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때는 1965년 11월 10일로 그의 나이 34세였다.

한편 장칭은 1991년 자살했고 왕훙원은 한해 뒤인 1992년 간암으로 병사했다. 사망 당시나이는 장칭이 77세, 왕훙원은 57세였다.

통신은 뒤늦게 그의 사망사실을 전하면서 그를 ‘린뱌오(林彪), 장칭 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이라고 표현했다. 병사한 사실 외에 재판 및 형량변동 사항만을 보도했을 뿐 다른 약력은 싣지 않았다.

4인방 張春橋 출옥 장쩌민과 만나 2002/08/13 00:00

2005/05/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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