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7/11/17 23:49



[今天歷史-11월7일]양안정상 66년만 대좌, 新華 李鴻章

2015년 11월 7일= 중국과 대만 간 역사적인 양안 정상회담이 66년 만에 처음으로 열렸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은 2015년7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양안 정상회담을 갖고 대만해협의 평화와 발전 중요성에 인식을 같이
했다.
오후 3시(현지시간)에 시작한 회담에서 시 주석과 마 총통은 '하나의 중국' 원칙 하에서 그 해석을 각자에 맡긴다는 '1992년 합의'(92 공식(九二共識)'를 재확인했다.
이와 관련해 시 주석은 당시 대만 야당 민진당을 겨냥해 "대만독립은 양안 평화와 발전을 해치기 때문에 양안 동포가 단결해 함께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샹그릴라 호텔에 6백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아일랜드 볼룸에서 회담에 들어가기 전 시 주석과 마 총통은 서로 굳게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말을 나눴다.
사진기자를 위해 잠시 포즈를 취한 시 주석과 마 총통은 곧바로 양측의 주요 관계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1시간 가량의 비공개 회담에 들어갔다.
회담 모두에 시 주석은 "우리가 오늘 한 자리에 있는 건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양안관계에서 얻은 평화와 발전 성과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며 "두 사람이 만난 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열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시 주석은 "어떤 외부 세력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우리의 뼈가 부러지더라도 우리는 육체로 연결돼 있다"며 '하나의 중국'을 거듭 역설했다.
시 주석은 '(마잉주 정권과) 7년간 쌓아올린 성과야말로 양안 쌍방이 금일 역사적인 한 걸음을 내디디게 할 수 있었다"며 마 총통의 대중 관계 개선 노력을 평가했다.
아울러 시 주석은 "양안 간 지난 66년에 걸친 대치가 많은 동포를 떼어놓고 무수한 가정에 고통을 안겨줬다"며 "난 양안 쌍방이 함께 노력해 '92공식'을 견지하고 공동의 정치적
기초를 강화해 양안관계가 올바른 길로 계속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마 총통은 "양안은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면서도 "양안 관계가 이미 1949년 이래 가장 평화롭고 안정한 단계에 있다". '92공식'을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양안의 대립을 교류로 바꾸자"고 화답했다.
마 총통은 이어 '92공식' 강화, 적대상태의 완화와 분쟁의 평화적 처리, 양안교류 확대, 양안 핫라인 설치, 중화문화 공동 진흥의 양안 현상유지를 위한 5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이중 양안 핫라인 개설에 대해 중국 측이 즉각 수용 의향을 밝혔다.
두 지도자는 회담 내내 '주석'과 '총통'이라는 직함을 생략한 채 상대방을 '선생'으로 호칭했다.
시 주석과 마 총통은 양안 간 교류 확대와 평화발전 등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면서 정상회담을 정례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이밖에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대만 참가 문제와 '적의(敵意)의 저감" 차원에서 중국이 대만 겨냥 미사일 철거를 비롯한
긴장완화 방안을 다뤘다.
시 주석은 대만이 중국의 경제확대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타당한 형태로 AIIB에 가입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표명했다.
(대만 건너편 지역의 ) 미사일 배치에 대해서 시 주석은 대만과는 관계없는 문제라면서 어떤 완화 조치를 취하지 않을 방침을 분명히 했다.
시 주석과 마 총통은 대만 주민의 저항이 심한 '양안통일' 논의나 국제사회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는 거론을 피했다.
회담 후 대만 측에선 마 총통이 직접, 중국 측은 장즈쥔(張志軍)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이 나서 각각 기자회견을 갖고 간단히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시 주석과 마 총통은 샹그릴라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미리 준비한 술을 곁들여 만찬을 함께 하면서 환담식으로 미진한 얘기를 나누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마 총통은 전용기편으로 귀로에
올랐다.
1949년 분단 이후 양안의 최고지도자가 만나는 것은 처음으로( 중 국민정부의 최고 지도자 장제스 총통과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당 주석이 1945년 10월 10일 국민 정부 임시 수도 충칭에서 만난 이후 첫 대면이다) 그동안 몇 차례 양안 정상회담이 열릴 기회가 있었지만 직함과 장소 등 민감한 문제에서 상호 간 조율이 이뤄지지
않아 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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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양안 사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영수 자격으로 7차례의 접촉이 있었지만, 국가원수 간 대좌는 없었다.
회담이 성사된 배경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현재 양안 관계의 유지를 희망하는 중국 측과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상당한 격차로 밀리고 있는 국민당 측 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중 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날선 대립각을 세우는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대만 총선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의 민진당이 승리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의 회심의 이 정치 이벤트에도 불구, 2016년 1월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집권 국민당은 민진당에게 참패햇다.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한 민진당의 집권으로 어렵게 성사된 이 양안 정산회담은 더 이상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도리어 민진당 출신의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하나의 중국 그러나 그 ㅠ표현과 해석은 양안 각각 '으로 요약할 수 있는 '92공식'을 인정하는 입장 표명마저 거리를 둠으로써 양안 관계가 악화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1931년 신화사 통신이 장시(江西) 루이진(瑞金)에서 중화소비에트가 성립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자신 역시 창설되었음을 밝혔다.

성립 당시 신화통신의 명칭은 ‘홍색 중화통신사(紅色中華通訊社)’였으며 ‘홍통사(紅通社)’로 약칭되다가 1937년 1월을 기해 ‘신화통신사’로 이름이 바뀌어 졌으며 ‘신화사’로 약칭됐다.

현재 신화사는 국무원 소속 국영 통신사로 각 성, 자치구, 직할시에 분사(分社 : 지사)를 두고 있다. 국외에는 4개 총분사와 99개 분사가 설치되었고 홍콩, 마카오에도 각각 분사를 두고 있으며 상주 기자는 500명에 달한다.

이처럼 전국과 전 세계에 걸친 취재망을 갖추고 6개국 언어로 국내외에 각종 소식을 타전하고 있다.

서방 4개통신(AP, 로이터, AFP)의 정보독점을 타파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신화통신은 러시아의 이타르 타스 통신과 더불어 세계 6대 통신의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1901년= 청나라 말기 실권자 이홍장(李鴻章)이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1823년 2월 15일 생으로 향년 78세였다.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 출신으로 1847년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태평천국의 난때(1850~1864) 증국번(曾國藩)과 함께 태평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중앙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아편전쟁(1839~1842) 패배이후 서세동점의 거센 파도를 양무운동(洋務運動: 1861~1894)을 통해 극복해 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죽을 때까지 청조의 실력자로 군림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 패배 이후 그의 역할은 패전처리용 투수라고 비유할만 하다. 그는 무력을 앞세운 서방 및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를 최소로 줄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今天歷史-2월 15일] 에드가 스노, 李鴻章

2017/11/07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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