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9/22 05:04



[頓悟頓修] 中共 19기 3중전회...“부패는 나의 힘”

소련 70여년 역사에서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로는 레닌, 스탈린,흐루시초프와 고르바초프가 꼽힐 뿐이다.

이들 외에도 말렌코프, 불가닌, 코시긴, 체르넨코와 안드로포프 등이 수상(총리) 또는 공산당 당수(서기장)를 역임했지만 실권이 약했고 빨리 밀려나거나 병등으로 집권 기간이 아주 짧아 지도자다운 역할을 못했다.

1949년 10월부터 시작한 공산중국의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는 이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외에 시진핑이 꼽힐 것 같다.

물론 이들 세 사람 외에도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화궈펑, 후야오방, 자오쯔양, 장쩌민 그리고 후진타오가 있지만 그들은 진정한 최고지도자라고 간주할 수 없다.

마오쩌둥과 바늘 실의 관계였고 공산중국의 양대 축으로 평가받는 저우언라이이지만 그는 단 한번도 최고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 한동안 마오쩌둥을 '능상(凌上)하는 위상을 지니기도 하였으나 그 기간은 아주 짧았고 그러한 중에도 마오에 대한 의전적 예우는 견지했다.

화궈펑은 실질적으로 '의전적 최고지도자'였을 뿐이었다.

화궈펑 이후 명목상 최고 직책의 지도자들도 실권자 덩샤오핑의 그늘에 가렸거나 덩이 죽은 뒤에도 집단지도체제 하의 서열 1위 였을뿐 마오나 덩과 같은 진정한 최고지도자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시진핑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이어 공산중국의 실질적인 '제3대 황제'가 될 것으로 보이며 그 출발점은 19기 3중전회이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에서 마오가 지명한 후계자 화궈펑과 노선투쟁에서 승리,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화궈펑은 그가 보유한 당정군의 최고직책 당 주석, 국무원 총리 그리고 당 중앙군사위 주석 등 모든 직책을 한동안 유지했으나 11기 3중전회 폐막과 동시에 화는 실권을 상실했고 덩샤오핑 시대가 개막했다.

마오의 사망과 동시에 사라진 '새로운 황제'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황제'는 같은 '황제'였으나 완전히 다른 황제였다.

덩은 1997년 2월 사망할 때까지 당정의 최고 직위는 단 한 차례도 지니지 않았다.

덩이 오른 당의 최고 직책은 부주석이었고 정부에서 최고 직책도 부총리였다. 물론 중앙군사위 주석 직은 상당 기간 보유했으나 그것도 죽기 8년 전에 내놓았다.

덩의 시대가 1978년 12월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은 11기 3중전회에서 마오이즘을 완전히 폐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덩 없는 그러나 여전히 덩의 시대'로 간주되는 것은 덩의 이론이 공산중국 모든 것의 작동 원리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19기 3중전회에서는 시진핑 시대의 골격을 갖추기 위한 여러 조치를 마련할 것으로 이미 공지됐다.

하지만 핵심 중 핵심은 국가주석의 임기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헌법 개정을 사실상 확정하는 것이다.

11기 3중전회가 마오시대의 1인 종신 독재체제와 구별되는 덩의 집단지도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면 19기 3중전회는 덩이 '황제'에서 '태상황'으로 물러나 확고히 자리잡게 한 집단지도체제와 최고지도자 직책의 교대제를 끝내는 시진핑 버전의 새로운 1인 독제체제 및 장기 아니 종신 집권 체제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다.

시진핑은 2012년 말 덩 프레임 하의 당 총서기에 선출된 이래 자신 브랜드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여러 조치를 취해왔다.

전임 총서기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핵심 측근 세력을 숙청하고 '총구'의 정점 군사위 부주석을 지낸 군부 최고 실력자들과 그 추종 세력을 영어의 몸으로 만들었다.

이어 2016년 2월초에는 인민해방군 조직을 획기적으로 개편하여 당이 총구를 지휘하는 아니 자신이 지휘할 수있는 체제로 탈바꿈시켰다.

19대를 앞두고는 차기 후계자군 인사들의 당 정치국 상무위 진입을 차단했고 19대 당장에는 자신의 노선에 '사상'명칭을 붙였다.

바벨탑을 쌓듯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가며 아래의 사다리를 걷어치우는 격이다.

최고지도자가 현직에 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붙인 노선을 당장에 삽입하고 더 나아가 '사상'이란 명칭을 붙인 것은 마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덩샤오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덩샤오핑은 단지 '이론'이란 명칭을 그의 사후에서야 당장에 올렸을 뿐이다.

시진핑이 덩을 넘어서 마오와 대등한 위치에 오르려 함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의 화룡점정은 바로 국가주석 임기 제한 헌법 조항을 삭제, 장기집권 더나아가 종신집권의 길을 터 놓은 것이다.

당의 최고직위 총서기 직은 당장에 연임 제한규정이 없으나 덩샤오핑의 설계에 따라 묵시적으로 연령 및 임기 제한을 두었다.

후진타오는 이를 지켰으나 후보다 앞선 장쩌민은 이를 충실하게 지키지 않았다.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동안 덩샤오핑의 설계도는 좀더 정교하고 분명하게 작동되도록 발전되는듯 하였으나 도리어 유턴을 한 것이다.

이러한 유턴을 두고 비판자들은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손문과 손을 맞잡아 공화체제를 수립한 청나라 말 실권자이자 중화민국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가 황제 체제로 복귀를 꾀했던 것처럼 왕조체제로 반동적 퇴행 시도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위안스카이는 유턴에 실패했고 자신의 수명도 단축했다.

홍콩에서 가장 비판적인 빈과일보에 등장한 평론가들은 중난하이의 사령부를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13억의 중국인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쏘아 붙였는가 하면 8000만 공산당원 중 대장부 한 명도 없다며 개탄했다.

시진핑의 시도가 '중국 굴기'를 이룩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대한 도전이자 이탈임을 지적한 것이다.

시진핑이 이처럼 '시황제'가 되기에 이른 것은 바로 부패의 힘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에 만연한 심각하고 천문학적인 부패에 대한 처벌을 왕치산 전 당 중앙 기율검사위 서기를 앞세워 조자룡 헌칼 쓰듯 휘둘러 이를 이룩했다.

최고지도부에 만연한 부패의 심각성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는 안다'. 그래서 '너도 해먹고 나도 해먹고 우리 모두가 해먹었다'는 공범 의식 때문에 처벌은 정치적이었고 한계가 있었다 .

이처럼 처벌을 상호 견제해온 부패의 카르텔 시스템을 컬럼버스 달걀 세우기 방식으로 실현한 것이다.

시진핑이 행한 신의 한 수 '달걀 깨어 세우기'는 집권 세력의 '처벌 독점'이었다.

시진핑은 이를잘 알기에 장기집권 아니 영구집권을 도모하며 이를 지탱하기 위한 '빅브라더의 스크린'으로 국무원 감찰위를 신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너무 잘 진행되어 오히려 앞길이 불안해 보인다.

중국공산당에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 '시황제' 브랜드의 빅브라더 시스템은 곧바로 무너질 공산이 크다. <스위프트-버크왈드>

2018/02/2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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