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6월26일] 국공내전 개시, 우얼카이시 등 망명




美의회 의화단 배상금 반환 결의, 장길수 일가족 베이징 유엔 고등판무관실 사무소 진입, 덩샤오핑 대만통일 방안 밝혀, 유엔 정식 성립, 美 대만 국민당군 본토 주둔 시도 지원 거부 밝혀, 톈진 조약, 케네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 체코 공산당 제1서기 두브체크 해임, 유엔 안보리 북한군 격퇴 결의, 김구 선생 피살

1908년 6월 26일 미 의회는 의화단 배상금 총 1480여만 달러를 반환하기로 결의했다. 의회는 반환한 돈을 문화학술 사업에 사용하도록 조건을 달았다.

미국은 선통(宣統) 3년, 즉 1911년에 이 자금을 바탕으로 칭화학교(淸華學校: 칭화대학 전신)가 설립되는 것을 지원하고 이 학교 학생들이 미국에 유학할 수 있도록 했다.

이해 10월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청나라는 다음해 2월12일 선통제 퇴위로 멸망했다. 이로써 중국에서 수천 년간 지속된 군주제가 폐지됐으며 공화정이 시작했다.

프랑스가 왕정통치를 거부한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한 것처럼 미국은 공화정 전야에 칭화대학을 선물했다고 비유할 수도 있겠다.

현 중국 최고지도자 시진핑과 전임자인 후진타오는 칭화대학을 졸업했다.

대청(大淸)시대 2001/05/21 16:22

2001 년 = 탈북한 장길수군 일가족 7명이 베이징(北京) 주재 유엔 고등난민판무관 사무관(UNHR)에 진입했다.

1989년 = 우얼카이시(吾爾開希)과 차이링(柴玲) 등을 포함한 천안문 사태 학생 지도자들이 홍콩을 통해 서방에 망명했다.

천안문 시위 주역 3인 중 한 사람이며 이해 6월13일 중국 당국이 공개 수배한 21명 수배자 가운데 첫 머리에 오른 왕단(王丹)은 국외 탈출하지 못하고 후에 체포됐다.
1983년 = 덩샤오핑(鄧小平)이 미국 뉴저지주 시튼홀 대학(Seton Hall University)의 양리위(楊力宇) 교수를 접견한 자리에서 대만과 통일방침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덩은 대만의 완전자치(完全自治) 구상은 ‘두개의 중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국제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강조했다.

덩의 구상에 따르면 통일 후 대만 특별행정구는 독립적이며 최종심판권을 중앙정부에 넘겨주지 않고 스스로 보유하는 완전한 사법독립을 누리게 된다.

대만은 독립적인 군대 보유가 허용되며 단 이 군대가 대륙에 대한 위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앙정부는 대만에 관리를 파견하지 않으며 대만은 당정군을 모두 스스로 관할한다.

1946년 =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1946년 1월10일에 체결한 정전협정이 파기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로써 국공내전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사흘 전인 국민당군은 23일에 중원해방구에 대한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군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가운데 시작된 국공내전은 1950년 3월28일 중국 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민당 병력이 철수함으로써 공산군의 완승으로 끝난다. 내전의 포성이 울린지 3년9개월5일만이다.

소련의 무기지원으로 전력이 크게 강화된 공산군은 랴오선(遼瀋)전투를 통해 1948년 하반기 동북지방을 장악했고 이어 이해 말과 다음해 1월까지 벌어진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핑진 전투(平津戰役)를 통해 화북지방을 석권했다. 이어 양쯔강 도하 전투(渡河戰役)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강남 지역을 유지한 뒤 훗날을 기약하려던 장제스(蔣介石)의 마지막 희망을 무산시켰다.

이후 1950년 3월28일 국민당군의 마지막 철수 때까지 전투는 바둑으로 치면 끝내기 수순이었다. 이 과정 중인 1949년 10월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1945년 = 유엔이 정식으로 성립됐다.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이 유엔 창설국의 하나였다.

1962년 = 미국이 대만 국민당 정권의 본토 병력 주둔 시도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858년 = 청나라가 영국과 톈진(天津)조약을 체결, 추가 개항을 하고 아편거래를 합법화하였다.

세계사 속의 오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西)베를린을 방문, 동독 정권이 탈주자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베를린 장벽 옆에서 연설을 했다. 100만명의 서베를린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케네디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Berliner)’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1963).

이로부터 38년 뒤인 2001년 뉴욕시가 9.11 테러를 당한 직후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우리는 뉴욕시민이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케네디의 발언이 공산독재에 대한 자유진영의 굳건한 연대를 상징한 발언이었다면 르몽드 제목은 반(反) 테러리즘의 국제적 연대를 호소하는 제언이었다.

그러나 9.11 테러직후 전 세계적인 공강대를 불러 일으켰던 이 반테레리즘 연대 호소는 미국의 일방적인 테러전 수행으로 그 반향이 급속도로 잦아졌다.

미국이 중성자탄 개발계획을 발표했고(1961),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소련의 압력으로 1968년 소련 주도로 바르샤바군이 침공하기 전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란 슬로건 아래 자유화와 민주화를 적극 추진해왔던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를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1970).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경교장에서 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1949). 1876년생으로 향년 73세였다.

광복 이전에는 조국 독립을 위해, 독립 이후에는 분단을 막기 위해 가시밭길을 자청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비명에 마친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남한을 기습 침공한 북한군 격퇴를 긴급 결의했다(1950).

한미 원자력협정이 발효됐고(1974), 한미 연합야전군 사령부(CFA)가 경기도 의정부 미군기지 캠프 레드 클라우드(CRC)에서 기념식을 갖고 해체됐다(1992).

독립운동가 이동휘(李東輝) 등이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후에 고려 공산당으로 개칭)을 조직했다(1918).

2019/06/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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