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7월3일] ‘中 공동관리론’과 ‘바다 넘은 악수’

청나라 미국과 불평등조약 망하(望廈)조약, 베이징 대학 개교, 미소 지하핵실험 금지조약 조인, 이스라엘 특공대 엔테베 인질 구출, 미군 이란 여객기 격추, 한국 반공법 공포, 포항제철 준공, 부천서 성고문 사건 문귀동 경장 피소

1998년 7월3일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6월25일부터 시작된 중국 방문을 마쳤다.

중국과 미국은 클린턴 방중을 통해 양국간 지극히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6월27일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연회에서 양국 정상은 군악대를 교대를 지휘했다. 장쩌민이 지휘한 곡은 중국 가곡 ‘조국을 노래한다(歌唱祖國)’이었으며 클린턴의 답례 지휘곡은 ‘바다를 넘어선 악수’였다.

중국 연주자들은 중국악기인 ‘이호(二胡 : 胡琴의 일종으로 현이 둘이고 음이 낮은 악기)’ 와 클린턴이 잘 다루는 악기인 색소폰을 이용해 중국 명곡 ‘두 개의 샘에 비친 달(二泉映月)’을 연주했다.

이어 미국 민요 ‘첼시아의 새벽’을 연주, 클린턴 부부를 감격케 했다. 클린턴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이 곡의 명칭에서 딸의 이름(Chelsea)을 지었다.

클린턴이 둘러본 만리장성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팔달령(八達嶺) 만리장성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73km 떨어진 무톈위(慕田) 만리장성이었다. 특별 예우일수도 있고 경호상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의전 면에서 당시 중국이 미국을 '유일 초강대국'으로 특별한 대접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환영행사는 북한 김일성 때처럼 인민대회당 전면 천안문 광장이 아닌 동문에서 했으며 지방도시를 먼저 방문한 뒤 수도로 오게 하는 아이티너러리도 다른 여타 국가의 정상과 마찬가지였다.

1989년 5월 소련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지방도시를 거쳐 베이징에온 것이 아니라 베이징으로 곧바로 직행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지방도시를 베이징 방문에 앞서 먼저 들르는 정착화한 관행의 아이티너러리를 제시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수도에 직접 왔다가 역시 지방도시를 들르지 않고 그대로 모스크바로 되돌아 갔다.

클린턴 방문 환영행사는 방중 사흘째인 27일 오전 인민대회당 동문(東門)앞 광장에서 치러졌다.

클린턴은 25일 시안(西安)에 도착했으며 다음날 저녁 베이징(北京)으로 와 29일까지 머무르면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외에 고궁(故宮)박물관, 만리장성을 둘러보았으며 마침 개교 100주년을 맞은 베이징(北京)대학을 방문, 강연을 했다.

29일 상하이(上海)를 방문한 클린턴은 다음날 30일 상하이 도서관에서 간담회를 가졌으며 상하이 인민TV의 생방송 프로그램인 ‘시민과 사회’에 출연했다. 50분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에서 상하이 시민 8명으로부터 전화질문을 받기도 했다.

클린턴은 다음날 7월1일 상하이 미국상공회의소 조찬회에 참석한 뒤 구이린(桂林)을 거쳐, 홍콩을 방문했다.

상하이 방문 기간, 클린턴은 대만 문제와 관련한 ‘3개의 NO 독트린’을 천명했다. 그것은 ‘대만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의 중국, 하나의 대만(一中一台)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만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지 않는다’이었다.

당시로서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미국이 ‘바다를 넘어선 악수’를 청한 때로부터 75년 전인 1923년 7월3일 당시 역시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은 중국을 국제사회가 공동 관리하자고 각국에 제안했다. 이 구상이 실현되지 못했던 것은 미국이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벌이 지배하던 베이징 정부가 통치하던 중국은 법률이 제대로 준수되지 않고 재정이 문란하였으며 지방세력이 할거한 데다 도둑들이 횡행하였다.

때문에 중국의 국제적 지위는 날로 하락하였고 결국 영국의 국제 공동 관리론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날 정식으로 ‘중국의 난국을 돕기 위한 방안’이라는 제목의 국제공동 관리안을 제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국제군을 출동시켜 베이징-톈진(京津) 철도를 장악

2. 외국인을 고용 중국경찰을 재조직하고 훈련시켜 중국 정부의 관할 하에 두되, 만일 중국 정부가 책임을 지지 못하면 열강이 관리하도록 한다.

3. 중국 항구들에서 국제해군이 시위행동을 한다.

4. 조세 징수와 군민의 행정경비 지출을 국제 공동관리 하에 둔다.

이 같은 제안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5년에 걸친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과정 데자뷔이다.

선두 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과 일본이 각각 아시아에서 필리핀과 한반도를 식민화한 과정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특히 일본은 불과 반세기 이전까지 만해도 국력과 위상 면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고 대등하였으며 역사가 유구한 국가이던 인접국 조선(대한제국)을 식민화한 것을 보고 영국은 그 이전까지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중국을 식민화한다는 구상을 구체화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은 영국이 한번에 삼키기에는 너무나 큰 덩치여서 일단 들러리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동 관리론이다.

이에 핵심 해양국가 미국은 이 구상을 이미 오래 전에 정점을 지난 노대국의 과대망상적 몽상으로 판단했다.

알렉산더 대왕, 몽골제국 그리고 나폴레옹의 시대착오적이며 주제 파악 못한 데자뷔로 본 것이다.

한반도 병탄과정에선 묵시적 합의를 하였던 영국과 미국은 아시아 병탄 시즌2에서 등졌다.

영국의 공동관리론의 내용을 한국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으로 만드고서 1910년 병탄하기 전 재정권, 군권, 치안권과 사법권을 차례로 박탈한 과정을 압축하고 있다.

영국이 제국주의 국가들로 컨소시엄을 만들어 중국을 보호국화한 뒤 주도권을 가짐으로써 실질적으로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동양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를 벤치마킹한 이 원조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을 좌절시킨 국가는 그 나라의 식민지였던 미국이었고 단독으로 무력을 통해 이 구상을 실천에 옮겼던 일본의 야심을 좌절시킨 국가 역시 미국이었다.

영국은 미국의 '비토 카드'에 선선히 물러난 반면 일본은 무력으로 맞섰다. 영국은 '영광스런 쇠퇴'를 일본은 원폭 세례 등 철저하고 참혹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1898년 = 베이징(北京)대학 전신인 경사(京師)대학이 설립됐다. 중국 최초의 근대적 대학인 경사대학은 무술변법(戊戌變法)에 따른 신정(新政) 정책 중 하나로 ‘무술대학(戊戌大學)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 후 경사대학은 베이징 대학으로 이름이 바뀐다.

1844년 7월3일 = 청나라 양광(兩廣) 총독 기영(耆英)과 미국 전권대사 커싱(C. Cushing) 간에 마카오 부근 망하촌(望廈村)에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오구무역장정 :해관세칙(五口貿易章程 :海關稅則)'을 체결했다. '망하(望廈)조약'으로 부른다.

4척의 군함을 이끌고 1844년 2월 마카오에 도착한 커싱이 북경(北京)으로 황제를 '알현'하러 가겠다고 위협하는 가운데 맺은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5개 항구의 통상권을 획득하였으며 영사재판권 등 권리를 얻었다.

조약은 영사재판권 확대, 관세자주권 파괴 등 아편전쟁 후 영국과 맺은 '남경(南京) 조약'에 비해서 훨씬 불평등한 조약으로 이후 서방국가와 중국 간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의 모델이 되었다.

영국, 일본과 다른 미국의 중국에 대한 프래그마티즘적 접근법을 알 수 있다.

무력 침공과 침략을 하였던 영국과 일본은 고비용 저효율이었다면 미국은 가성비가 아주 높았다는 말이다. 미국은 아편전쟁의 효과를 당사국인 영국보다도 더 톡톡히 누렸다.

미국은 2차대전 후에도 장제스 정권에 대해 당시 중국이 감당하지 못할 시장개방을 강요, 실현함으로써 이를 또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공산정권이 곧바로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대체하는 바람에 아편전쟁 직후에 누렸던 '엉클 샘의 왕 서방 곰재주 장사 시즌 2'는 재연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화 직전인 1949년 8월 발표한 '중국백서(白鼠)'는 이 같은 100년에 걸친 미국의 대중국 관계에서 미국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긍정과 부정적 행동 등에 대한 자기중심적 자술서였다.

세계사 속 오늘

미국과 소련이 지하핵실험 제한협정을 조인했다(1974).

이스라엘 특공대가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억류된 자국인질 103명을 구출했으며(1976), 미국 순양함 `빈센트'가 걸프해상서 이란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 격추, 승객과 승무원 290명 전원이 사망했고(1988), `블라디보스토크 아비아' 소속 러시아 여객기 투폴레프(Tu)-154기가 시베리아 남부 이르쿠츠크에 추락, 145명이 사망했다(2001).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헤이그 밀사사건이 대한매일신보 통해 국민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1907).

반공법이 공포됐으며 박정희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한 가운데 장도영 중장 등 44명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1961).

포항제철 공장이 착공 3년3개월 만에 준공됐으며 불국사 복원공사가 완료됐다(1973). 한국종합전시장(KOEX) 개관됐다(1979).

북한의 '인공기 게양' 사과를 수용하고 대북 쌀 지원 전면 재개했고(1995),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정의 승조원 시신 9구를 판문점에서 북한에 인도했다(1998).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장이 성고문 사건으로 피소됐다(1986).

2019/07/03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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