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歷단상-7월19일]3전4기 鄧, 唐이세민 미래비전


덩샤오핑이 3번의 실각을 딛고 다시 권력 상층부에 진입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고희를 넘긴 그는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1978년 12월 중국 권력의 최정상을 움켜쥘 수 있었다.

최고 권좌에 오른 그는 1997년 2월 죽을 때까지 그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권력세계는 생물과 같은 것이다. 또 최고권자의 자리 위에는 데모크레스의 칼이 한 올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간당간당 거리며 번뜩인다.

덩샤오핑 역시 항상 내부와 외부로부터 치명적 도전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덩은 이러한 도전에 죽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응전하여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1978년 집권 이후 도전자들은 하나같이 생물학적으로 그보다 젊었다. 덩이 총서기로 사실상 임명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그보다 한 세대 연하였다.

천안문 광장을 메워 그의 업적과 위치를 벼랑 끝까지 몰고간 대학생들은 환갑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는 내부와 싸움에서만 불패의 승자가 아니었다.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사회주의 미래 방향을 놓고도 마오쩌둥과 후르시초프 간의 이념 논쟁 못지않은 세기적 대립과 경쟁을 벌였다.

덩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우선순위를 놓은 반면 고르비는 정치개혁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1989년 5월 베이징에서 링사이드의 관중이 고르비에게 열광하는 가운데 덩은 코너에 밀려 수건을 던지기 직전까지 밀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2년 7개월 뒤인 1991년 12월25일 고르비는 KO패 당했다.

덩샤오핑은 그 1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남순강화 이니셔티브를 시작, 동구권 몰락과 소련체제 해체라는 폐허 가운데서 일당독재의 사회주의를 기사회생시켰다.

덩샤오핑은 죽은 뒤에도 후계자들과 일당독재 사회주의 미래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의 유훈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공산 중국이 분열 해체되지 않으려면 일당독재가 강력학게 견지되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이념이 강고하게 지켜져야 한 다는 것과 시장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과유불급의 자세로 국제 패권싸움에서 상당기간 1위 자리를 넘보지 않는 양 물러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을 중화인민 공화국의 테두리 안에 담아 두려면 강력한 독재 체제와 국제주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중국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되겠다)국제주의가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는 죽은 뒤에도 '상공 위의 망령'처럼 떠돌며 후계자들과 중국 인민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등에서 소수민족의 소요가 공산 중국을 밑바탕에서부터 흔들어댈 때마다.

덩샤오핑의 유훈은 그러나 강경일변도가 아니다. 강온 균형 배합이다.

그는 일국양제라는 개념을 통해 느슨한 확대 새장 설계도면을 내놓았다. 그가 죽기 전에 홍콩에 그것을 설치하는데 성공했으나 그의 비전은 대만까지를 넘보는 것이다.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국제주의적이며 이민족 세력을 책봉과 조공을 조건으로 자치하도록 허용하는 기미제도로 느슨하게 아울렀던 당나라를 본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강행하다 망한 것과는 달리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후퇴할 줄을 알았다.

그 결과 이세민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강력했던 정관의 치를 이룩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이세민을 닮았다.

하지만 그 후계자들은 덩의 비전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양화를 구축한 악화와 같은 비전을 밀어붙이면서 수양제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ㅜ

2019/07/1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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