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9/19 21:13



[今天歷史-6월22일]一國兩制 대만관계법, 向忠發 李立三

한일 국교정상화, 북한 남침 전투 명령 하달, 북한 남북 연방제 제의, 북한 공작원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 폭발물 설치 미수 사건, 속초 북한 공작 잠수정 발견, 대한 광복군 귀국, 대만 중미개발은행 가입, 프랑스 나치 독일에 항복, 나치독일 소련침공 계시

1984년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양일 간 홍콩의 상공업계 방문단과 홍콩의 사회 저명인사들을 잇달아 만난 덩샤오핑(鄧小平)은 홍콩 주권 이양 후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주권 이양 후 홍콩의 현 사회, 경제 제도는 불변이며 기본적인 법률과 생활방식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홍콩의 자유항으로서의 지위,국제무역 금융중심지로서의 지위 역시 불변이라고 말했다.

덩은 군대 파견을 제외하고는 특구정부에 관리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며 이 역시 50년간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군대 파견은 국가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홍콩의 내부 문제에는 간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개국가 양종제도(一個國家 兩種制度)’, 즉 ‘일국양제’는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10억의 인구는 사회주의 제도를 실행하고 홍콩과 대만은 자본주의 제도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1979년 =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만관계법’에 서명했다.

국내법인 이 대만관계법은 중국과의 수교에 따라 대만과 외교관계를 단절한 이후, 대만과 미국과의 관계를 규율하고 있다.

[용어설명] 대만 관계법(Taiwan Relations Act)

1931년 = 중공중앙 총서기이며 중앙 정치국 주석인 샹중파(向忠發)가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 정안사(靜安寺)에서 개최 예정인 공산당 비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택시를 대절하던 중 체포되었다.

샹중파는 공산당의 비밀 기구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 때문에 많은 공산당 지하당원들이 체포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취츄바이(瞿秋白) 등은 사전에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다.

국민당 정보기관은 공산당의 내부제보에 의해 샹중파를 체포했으나 그가 공산당 제1인자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너무 격이 떨어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샹충파는 선원시절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자른 신체적 특성 때문에 신분이 확인되었다. 자신의 정채가 발각된 뒤 샹중파는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4개의 중요한 주소를 제공했다.

저우언라이는 후에 이를 전해 듣고 공산주의에 대한 샹중파의 충실성은 창녀의 순결성과도 비유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체포 다음날 쑹후(滬)경비사령부에 인계된 샹중파는 하루만인 24일 처형됐다. 그는 명목상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공산당의 내부 비밀을 잘 알고 있지 못했으며 따라서 더 이상의 정보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80년 생으로 당시 51세였다.

샹충파는 후베이(湖北)성 한촨(漢川)출신으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 이후 줄곧 노동자 생활을 하여 지식수준이 낮았고 정치적 수완도 없었다. 그런 그가 1928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 6차 전국대표대회(6대)에서 당수 격인 총서기에 선출된 것은 노동자 출신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한 코민테른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가 총서기로 있는 동안 당의 실권은 리리싼(이립삼)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꼭두각시 총서기’ 였던 셈이다.

1967년= ‘리리싼(李立三)노선’의 주인공 리리싼이 홍위병의 핍박 속에 사망했다. 1899년 생으로 향년 68세였다.

후난(湖南)성 리링(醴陵)현 출신인 리리싼은 1919년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로그램에 따라 프랑스에 건너갔으며 1921년 귀국 후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안위안(安源)탄광 노동자 대파업을 주도한 그는 1923년 우한구위(武漢區委)서기, 1924년 상하이구위 직공운동위원회서기, 상하이 총공회 위원장을 역임하여 5 · 30 운동을 지도했다.

1927년 당 공인부장(工人部長)으로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했으며 전적(前敵)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광둥(廣東)성 서기를 거쳐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6대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겸 비서장, 선전부장에 선출됐다.

당시 총서기로 샹중파가 선출되었으나 그는 단지 허수아비로 당의 실권은 모두 리리싼의 손아귀에 있었다.

리리싼은 도시 무장봉기를 중시하는 극좌노선으로 당을 이끌고 갔으며 공산당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결국 1931년 1월 6기 4중전회에서 코민테른의 조종에 따라 일체의 직책을 박탈당한 리리싼은 재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불려갔다.

그는 1946년까지 15년간 소련에 머무르면서 코민테른 출판국에서 번역활동에 종사하였다.

귀국 후 중화전국총공회 부주석 등을 지냈으며 공산정권 수립 후에는 노동부장, 교통부장, 화북국(華北局)서기 등을 역임했다.

리리싼은 총서기 혹은 정치국 주석과 같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 영도자의 직책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공산당의 역대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사망한 날은 공교롭게도 36년 전 그의 꼭두각시였던 샹중파가 체포된 날이었다.

1991년 = 대만이 중미 개발은행에 가입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프랑스가 불과 수 주간의 항전 끝에 나치 독일에 항복, 독일 병사들이 파리 개선문 앞을 행진했다(1940). 바로 한 해 뒤 같은 날 나치 독일은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극지역에서 흑해에 이르는 3,000 km에 달하는 전선에서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했다(1941).

6월 22일은 나치독일에게 득의의 날이자 몰락의 길에 접어든 첫 날인 셈이다.

한국사 속의 오늘

6월 22일은 유난히 북한의 도발과 인연이 깊은 날이다.

1950년 6월 22일 북한이 남침을 위한 '전투명령 1호‘를 하달했고, 이로부터 꼭 20년 뒤인 1970년 6월 22일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에서 남파간첩에 의한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남파간첩들은 현충문에 원격조정 폭파무기를 설치하려다 폭사했다.

원격조정 폭파에 의한 테러는 이로부터 13년 뒤인 1983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인 전두환 대통령 일횅에 대해 가해졌다.

버마의 국부 아웅산이 묻혀있는 버마의 국립묘지에 원격 조정 폭발물을 설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전 대통령은 행사장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화를 면했다. 대신 행사장에 미리 와 있던 서석준 부총리 등 외교사절과 수행 취재기자 등 17명이 사망했다.

버마 정부는 이 테러를 수행한 북한 공작원 2명을 체포, 사형을 선고했다. 버마 정부는 북한과의 국교를 단절했으며 유엔에 이 테러가 북한 측의 소행임을 보고했다. 북한과 미얀마( 버마의 바뀐 국명)는 2007년 초 단교 24년 만에 복교했다.

현충문 테러미수 사건이 있던 1970년 6월 22일 북한은 남북연방제를 제안했다.

1996년 6월 22일에는 속초 앞바다에서 어선 그물에 걸려 좌초한 북한 잠수정이 한 택시 운전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6년 6월 22일에는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움직임으로 인해 한반도가 긴장에 휩싸였다. 북한의 해군 사령부는 서해에서 해전 이상의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전례 없이 수위가 높은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긴장을 고조시켰다.

크리스토퍼 힐 미 6자회담 대표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기 직전에 나온 이 성명은 한편으로 남북 연방제를 제의하고 다른 한 편으로 테러를 시도한 1970년 6월 22일의 북한과 남북대화를 하면서도 잠수정을 침투시키는 도발을 계속한 1996년 6월 22일의 북한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편 1946년 6월 22일에 광복군이 중국에서 환국했다. 이로부터 19년 뒤인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 간에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어 광복 20년 만에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하였다.


2015/06/2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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