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2월14일] 周恩來 방북, 중소조약, 蘇 당대회

안중근 의사에 사형 선고

1958년 2월 14일 =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1953년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국과 북한은 모든 외국 군대의 철군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1958년 2월 5일 북한은 또다시 남북한으로부터 외국군대의 전면 철군을 요구했으며 중국은 북한의 주장에 동의하는 형식을 빌려 북한과의 철군협상에 들어갈 것임을 밝혔다.

저우언라이의 북한 방문은 이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중국은 1958년 이전에 이미 3차에 걸쳐 한반도에서 외국군대가 전면 철군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
저우언라이 북한도착 6일 뒤인 20일 북한 주둔 중국 인민 지원군 총사령부는 이해 말 이전 북한에 주둔한 중국군이 모두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군의 철수는 이해 3월 15일부터 시작, 이해 10월 26일에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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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같은 해 12월 소련과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만으로 패퇴한 국민정부가 체결한 것이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조약’도 모스크바에서 체결됐다. 그것은 얄타 협정에 따라 중·소 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중국과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얄타회담(1945. 2. 4. ~ 1945. 2. 11. )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와 그 조건에 대해 중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일본의 항복 전날에 정식조약으로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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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정상적 배경 하에서 체결한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기지화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러한 법적보장은 마오의 눈으로 볼 때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승계한 것이기 때문에 마오는 대륙을 장악한 뒤 최우선 과제로 소련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오가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소련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협상은 해를 바꾼 1950년 1월 20일 시작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에서 날아 와 협상에 참여했다)중국 공산당 기록에는 마오쩌둥이 49년 말과 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어 마오가 소련이 회담에 응하지 않자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가 다시 소련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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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온 마오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던 소련이 뒤늦게 1950년 1월 20일부터 회담 논의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8일 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49년 8월 5일 중국백서(白鼠)'를 통해국민정부의 국공내전 패배가 국민당과 국부군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규정한 미국민주당의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선포로대만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새주인을 인정하고 악수를 먼저 공개적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이보다 일주일 앞선 1950년 1월 5일 영국은 서방 국 최초로 공산 중국을 승인햇다. 홍콩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1차적 목적이 있었으나 세계 전략 적으로 미국의 힘을 유럽으로 집중시키자는꾐수였다. 미국은 이를 덥석 받은 것이다.

이런 국제 정세 하에서 체결되었기에 마오쩌둥을 카운터파트로 한 중소 상호원조 조약은 소련의 양보가 두드러진다.

이 조약은 전문(前文)과 6개조의 본 조약 및 2개의 부속협정·교환각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중국에서의 특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부속협정에서 1952년 이전까지 창춘(長春)철도의 일체 권리와 재산을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또 뤼순(旅順)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이 철수하고 다롄(大連)항도 반환하기로 했다. 이러한 특권이 바로 소련이 대일전 참전대가로 미국의 적극적지지 아래 국민정부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의 1945년 이후 시설물의 건축 비용은 중국 정부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소련은 연 1%의 싼 이자로 3억 달러의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본 조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여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문화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소련은 미국의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조약은 마오가 장에 비해 더 민족주의적이라는 주장의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치외법권 등 식민주의적 특권 포기를 얻어낸 사실을 상기하면 장은 해양 세력으로부터 제국주ㅢ 트권의포기를 얻어내고 마오는 대륙 세력으로부터 제국주의 특권 포기를 얻어내는 역사적 역할 분담을 하였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장과 마오는국제정세 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어냈다는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조약 체결 후 마오쩌둥의 티토화 전략을 주도하던 이른바 미국 국무부 내 '스틸웰 그룹‘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스틸웰 그룹‘은 2차 대전 당시 중국 파견 사령관으로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의 요청으로 1944년 파면당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는 미 행정부 관리들, 특히 국무부 내 관리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오의 티토화’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정권을 수립, 중국을 견제하자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김일성의 대남 전면적 침공 계획을 승인, 6.25가 발발하게 됐다. 6.25의 발발로 미국의 ‘마오의 티토화’ 전략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소련을 갈라서게 하기 위해 '애치슨 라인'이란 승부수를 던지자 '한국전 도발'이라는 역풍을 맞은 것이다.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은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일본 열도를 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통해 불과 반년 전 선포한 '애치슨 라인'너머로전진 방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애치슨 노선'은 '사화산'이되지 않고 '휴화산'으로 동면햇다. 1972년 2월 말 공화당 의 리처드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이 '휴화산'은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4월 11일 발효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효기간을 30년으로 하였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조약 만료 1년 8일 전인 1979년 4월 3일 개최된 중국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는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고 이 조약의 폐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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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막되었다. 당 대회 마지막 날인 2월 25일 당시 소련공산당 제1서기였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비밀특별보고 회의에서 ‘개인숭배 및 그 결과’라는 제목의 스탈린 비판의 연설을 했다.

이 보고에서 흐루시초프는 3년 전인 1953년 3월 사망한 스탈린은 1930년대의 대숙청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시켰고, 자기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장했으며 대독일전의 서전(緖戰)에서 소련에 큰 손해를 입게 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 비밀보고를 수개월 뒤 미국 국무부가 공표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다.

▶ 중국은 ‘중소 이념분쟁’ 의 상대방인 흐루시초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캐리커처는 중국 공산당 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역사상의 오늘(歷史上的今天)’에 실린 것이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유럽제국에서는 반소폭동의 계기가 되었고 중국에서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소리가 높아져 중·소 이념분쟁으로 발전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중소대립 구도를 이용, 독자노선을 추구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1973년 이후 ‘주체사상’으로 이론화하였다.

소련에서도 V.M.몰로토프·G.M.말렌코프 등이 1957년 6월 흐루시초프를 추방하려다 반당그룹으로 몰려 자신들이 도리어 축출됐다. 1961년 10월 제22차당대회에서는 스탈린의 유해를 레닌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으나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뒤 스탈린 비판이 잠잠해졌고, 1986년 2∼3월 제27차 당대회에서도 흐루시초프비판과 함께(스탈린의) 이름을 거론치 않는 비판으로 정리됐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기회와 동서 양진영이 냉전에서 평화공존을 추구하게 하였다. 또 각국 공산주의자의 자주적 사고와 행동을 촉진시켰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국사 속의 오늘

중국 뤼순의 일본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1910).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 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그곳을 방문한 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이토는 대한 제국의 주권 을 침탈햇을 뿐만 아니라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기 때문에 대한 제국 의병 장군으로서 그를 처단햇다고 의거 동기를 밝혓다.

안 의사는 사형 선고가 있은 이 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가 거사한 하얼빈은 러시아가 관할 하던 지역이었고 재판받고 순국한 뤼순은 일본의 관할 지역이었다. 당시 중국이 반 식민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안의사는 1879년생으로 순국 당시 나이는 31세였다. 동향(황해도)의 김구 선생보다 3세 연하엿고 역시 동향인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4 살 아래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바로 그해 8월 말 대한 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탄됏다.



2016/02/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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