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7/21 11:44



[今天歷史-6월27일] 문혁 과오 결의한 11기 6중전회 개막

국민정부 일제 항복 앞두고 중소 우호동맹 조약 협상 개시, 클린턴-장쩌민 베이징서 중미 정상회담, 소련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 발전 개시, 미 트루먼 대통령 미군 한국 출동 명령, 팔 게릴라 이스라엘 여객기 엔테베서 납치, 체코 지식인 2000어 선언, 이승만 휴전 반대 성명, 한국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 실시,

1981년 6월 27일 = 중국 공산당 11기 6중전회가 개막되었다. 29일까지 사흘간 계속된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 발동을 과오로 규정하는 등 마오의 공과를 평가한 ‘건국이래 당의 약간(若干)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를 통과시켰다.

이 역사결의는 중국판 과거청산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12월 18일~ 22일 열린 11기 3중전회를 통해 집권한 이후 그의 주도 아래 마오와 문화 대혁명에 대한 평가 작업을 진행했으며 역사결의를 통해 이의 완결이 이루어졌다.

[今天歷史-10월25일] 鄧 역사결의 지침, 중국 유엔 가입

[今天歷史-3월 19일] 역사결의의 지도지침

총 3만여 자에 8개 부분으로 구성된 이 역사결의는 마오의 중국 혁명 과정에서의 공적이 그가 범한 과실을 훨씬 뛰어 넘는다고 규정하고 "공적이 ‘먼저(第一位的)’이며 과실은 ‘그 다음(第二位的)’이다"라고 선언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역사결의가 지도사상에 있어 발란반정(撥亂反正), 즉 ‘난을 다스리고 정도(正道)로 돌이킨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ㅣ에 비추어 덩샤오핑의 집권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덩샤오핑 반정'이다.

이 회의에서는 또한 화궈펑(華國鋒)의 당 중앙위원회 주석(당 주석) 및 당 중앙군사위 주석 직의 사임을 수리하고 후야오방(胡耀邦)을 당 주석에 선출하였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 되었다. 시중쉰(習仲勛)을 중앙서기처 서기에 선출하였다.

현 총서기 겸 국가 주석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은 광둥성 서기로 있으면서 경제 특구 설치
를 제안,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이다.

화궈펑은 부주석으로 강등되었다.

화궈펑의 ‘탈당’과 천두슈의 ‘출당’(1) 2001/11/13 12:08


중국 지도부는 '역사 결의'를 통해 과거를 정리하고 시중쉰의 중용을 통해 '미래'의 방향을 예시했다. 덩샤오핑의 슬로건 '1개 중심 양개 기본점'의 '1개 중심'은 경제 발전인데 이의 단초인 선전 등 경제 특구가 한국의 마산 수출 자유공업단지를 벤치 마킹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시중쉰의 제안을 통해 구현된 덩샤오핑 경제 발전 노선은 '박정희 경제개발 모델'의 중국 버전인 셈이다.

1945년
= 국민당 정부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이 외교부 차장 후스쯔(胡世澤)과 선훙례(沈鴻烈)과 장징궈(蔣經國)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 중소 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체결 협상을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의 이러한 특사 파견은 6월 15일 주중 미대사 헐리가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얄타 협정에서 미국이 소련과 맺은 비밀협약을 통고하고 소련과의 협정 체결을 권유한 데 따른 것이다.

중화민국, 즉 국민당 정부의 중국과 소련 간의 중소우호동맹 조약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인 이해 8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됐다.

이 조약은 얄타회담에 따라 중·소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조약은 중·소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다.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참가 조건에 대한 중국의 수용을 확인박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소련은 중국의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滿洲)가 반소(反蘇)기지화 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는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제정 러시아 당시의 이권을 회복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실행되고 미구그이 원폭 투하로 일본의 패전이 명백해진 뒤에서야 중국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이 조약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됨으로써 효력을 상실하였고,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今天歷史-6월 15일] 毛 “두가지 한 일” 鄧 ‘好猫論’(1945년 항목 참조)

1945년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은 장제스의 불가피한 선택이자 한계였다. 장제스는 소련이 제정 러시아의 식민주의적 유산 상속을 인정햇다. 마1950년의 중소 우호동맹 상호 원조 조약은 마오쩌둥이 장제스와의 천하 쟁패 싸움에서 승리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준다.

마오는 장제스가 엄두를 내지 못한 소련의 식민주의적 유산 상속 포기를 이끌어냈다. 마오는 직접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를 성취햇다. 19 45년 조약의 중국 측 협상 주역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거과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였다. 장제스는 이조약의 체결에 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1998년 =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베이징(北京)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세계사 속의 오늘

소련이 모스크바 인근 오브닌스크에 건설한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가 발전을 시작했다(1954).

체코 지식인 70명이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2천어 선언’을 발표했다.(1968)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이스라엘 여객기를 납치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인질극을 벌였다(1976).

한국사 속의 오늘

한국정부가 북한군의 남침으로 수도를 대전으로 임시 이전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 지원을 결의했으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미군에 한국전 출동을 명령했다(1950).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 휴전반대 성명을 발표했다(1951).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등단체장을 뽑는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됐다(1995).

2016/06/27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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