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7/21 11:44



[今天歷史-6월21일]클린턴 정부 북미회담 용의, 李先念

미-프-러 등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관련 제재 경고. 서태후 8개국에 선전포고, 텐진서 폭동으로 프랑스 영사등 외국인 살해. 공산 중국 전범 335명 석방<.b>

1994년 6월 21일 빌 클린턴 미 행정부가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 중단의지가 확인되면 미-북 고위급 회담을 열겠다고 평양 측에 제의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이 같은 제의는 6일 전인 6월 15일 북한 평양에 도착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6월 18일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담에서 합의 한 내용을 수용한 것이다.

김일성과 카터는 회담에서 1) 즉각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였고 2)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며 3) 북-미 수교가 상호이익이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김일성은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국제 원자력 기구(IAEA) 탈퇴를 선언한 데 대응,비밀리에 영변 폭격의 카은트 다운에 들어가는 등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로 달한 시점에서 카터와 만났고 카터와의 회담을 통해 정책적 U턴을 감행했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당면 현안이었던 북한에 체류 중인 IAEA 사찰단의 계속적인 활동보장과 각종 핵활동 감시장비의 계속적인 가동보장을 약속, 핵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제시했고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과 한국 정부를 동시에 겨냥한 것이었다. 김-카터의 합의에 클린턴 행정부는 잠시 떨떠름한 자반응을 보엿으나 결국 북한의 유화 제스처에 홍응한 것이다.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나 김일성이 이해 7월 8일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하지만 이 제의가 있은 지 만 4개월 뒤인 이해 10월 21일 북한과 미국 간에 제네바 핵합의가 조인되었다. 제네바 핵합의는 2000년 조지 W 부시의 미 대통령 당선으로 공화당 정권이 출범하기 전까지 북-미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또한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된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에서 최고 지도자가 각각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바뀐 뒤인 2000년 6월( 13일 ~ 15일 ) 평양에서 성사됐다.남북 분단 후처음으로 이루어진 이 역사젃 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

한편 클린턴의 대북 고위급회담 제의 만 3년 뒤인 1997년 6월 21일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이라크가 유엔이 요구한 대량 살상무기 폐기작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재 강화키로 합의했다.

이라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는 결국 2001년 9.11 테러라는 계기를 거쳐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되었다. 후세인 정권의 붕괴는 이라크의 통치형태가 소수파 수니파에 의한 독재에서 다수파인 시아파가 주도하고 소수파 수니파가 견제하는 가운데 소수민족 쿠르드족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

1992년 = 목수에서 국가주석에까지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리셴녠(李先念)이 사망했다. 1909년 생으로 향년 83세였다.

리셴녠은 후베이(湖北)성 광안(廣安)현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 1927년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가입할 당시 그의 직업은 바로 목수였다. 다음 해 유격대에 가입한 리셴녠은 군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국공내전 초기 1946년 7월 중원(中原)해방구에 대한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을 돌파함으로써 전국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는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는 데 한 계기를 마련했다.

공산정권 수립 후 국무원 부총리, 정치국 상무위원, 국가주석, 전국 정협 주석을 역임했다. 특히 경제 분야와 대외 분야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후 예젠잉(葉劍英)과 함께 4인방을 타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셴녠은 제2세대 영도집단의 핵심인물로서 중요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9년 천안문 사태 후 덩샤오핑(鄧小平)에게 후임 총서기로 당시 상하이 서기였던 장쩌민(江澤民)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리셴녠이다.

장쩌민의 숙부이자 양부인 장샹칭(江上靑)은 항일전쟁 당시 신사군(新四軍)의 주요 지휘관 중의 한 사람으로 리셴녠의 동료였으며 장쩌민도 리셴녠 밑에서 일한 바도 있다. 장쩌민 집안과 리셴녠 집안 간의 오랜 세교 때문에 한 때 장쩌민이 리의 사위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리센녠의 셋째 사위인 류야저우(劉亞洲) 전 국방대학 정치위원(인민해방군 상장) 은 한중 수교 당시 밀사로 활동했으며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시절 대만을 비밀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또다시 주목을 끄는 류야저우(劉亞洲) 2004/05/24 22:23

류야저우는 2017년 1월 초 정년을 넘기지 않은 가운데 갑자기 면직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류야저우의 연인으로 알려진 미국헐리웃에서 활동중인 쓰촨성군사 지역 가무단 출신 여배우를 장정 80주년 프로그램에 출연시켰는데 그 녀가 인민해방군을 모욕했다는비 난이 sns에 떠돈 것이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 겸 군사위주석이 일를 알고 격분, 조사를 지시햇으며 고 결국 책임을 담당한 류야저우의 면직에 이른 것이다.

미국에서버를 둔 보쉰은 CCTV 군사 채널이 제작한 선전 프로그램 에 출연한 문제의 여배우가 장'정기'를인민해방군복장으로 따라가면서 교태를 부렷다는 것이다.
이 장면이 비난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녀가 미국에서 여러 편의 성인 영화에 출연햇고 미국 방송에 나와 중국에서 군 부데에 근무할 때 인민 해방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하여 낙태하엿다고폭로구설수에올랐던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구실이고 류야저우가 '정치공작은 무용지물이라고한발언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진핑은이 발언을겨냥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비난, 류야저우의 면직을 예고햇다는 분석이다.

1956년 = 중국 최고인민검찰원이일본인 전범 335명에 대해 기소를 면제하고 석방했다. 석방된 일본인 전범은 타이위안(太原)에서 295명, 푸순(撫順)에서 40명이었으며 중국적십자회가 이들을 인계,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1900년 = 청나라의 실권자 자희태후(慈禧太后), 즉 서태후(西太后)가 의화단 사건으로 출병한 8개국 연합군,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이 전화에 휩싸이게 됐다. 이를 중국은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부른다.

1871년 = 중국 톈진(天津)에서 폭동이 발생해 프랑스 영사 등 20여 명의 외국인이 살해됨. 서구 열강들의 중국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2017/06/2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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